수련, 삶의 총체적 구현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이 오면 각종 불교단체에서 실시하는 수련회로 인하여 산사는 몸살을 앓는다. 재가 불교단체가 수련회에 할애하는 비중은 ‘부처님 오신날’ 행사 다음으로 큰 것이다. 그런 만큼 회원 각자가 수련회에 거는 기대 또한 자못 크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시되어 온 수련회가 올바른 방향성과 내용을 확보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차제에 막연한 구도열로 쉽게 뜨거워진 감정을 냉철한 이성으로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련회가 갖는 참된 의미를 진지하게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성취해야 될 목표로서의 ‘방향’과, 그목표 실현을 위한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내용’과, 실천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장(場) 또는 장소(場所)의 세 항목으로 나누어 지금까지 실시되어 온 수련회를 반성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수련회가 가지는 의미는 전체 수련과정-총체적인 삶을 통한 수련-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방향, 목적
폭염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고통스러운 작업을 하는가?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찬이슬을 맞으며 가슴을 옥죄어 오는 공포심을 누른 채남의 물건을 홈치는 도둑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고통스러운 작업을 하는가? 쉽게말해서 둘 다 ‘먹고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자의 목적은 똑같단 말인가? 분명히 같지 않다. 농부는 ‘먹고 살기 위해서’ 생산을 위한 노동을 한 것이고 도둑은 ‘먹고 살기 위해서’ 남이 생산해 놓은 것을 훔쳐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가 모두 목적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목적이 올바른 방향과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았을 때 마땅히 배척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가 이기심을 버리고 사회의 발전과 역사의 창조를 담보한 것일 때 비로소 올바른 방향성과 목적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 수련회가 지녀야할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련회가 총체적인 삶을 통한 수련의 부분일진대 그 목적은 바로 불교자체의 목적과 다를 수 없다.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깨달음(성불, 해탈)을 얻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초기 불교사상 중 연기법(綠起法)과 삼법인(三法印)에 의거하여 현대적 개념으로 표현해 보면 ‘과정과 관계의 끊임없는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개인 또는 집단의 대립이나 갈등, 구조와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과 관계의 끊임없는 재창조’의 행위는 바로 ‘관계의 재창조’로부터 사회의 발전을 꾀할 수 있고 ‘과정의 재창조’로써 역사 창조의 새 장(場)을 열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깨달음
(성불, 해탈)은 역사사회 속에서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이지, 본래의 깨달음(성불, 해탈)이란 어떤 정체된 상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실시되어 온 수련회에서 농후하게 드러난 ‘스님들의 생활을 한번 체험해 본다는 의미’, ‘세속을 잠시 떠나 산사(山寺)의 정취를 맛본다는 감성적 차원의 의미’의 목적성은 배제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뜻하는 의미는 이해하지 못한 채 껍데기만 흉내내는 형식주의도 마땅히 배제되어야 한다. 지혜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야겠다는 참선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만 흉내내어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어도 지혜는 커녕 멍청함만 더할 뿐이고, 이기심으로 비롯된 업장을 소멸하고 고통받는 중생들과 함께 고통을 여의겠다는 발원을 굳게 하는 참회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밤새도록 삼천배를 해 봤자 그것은 자학적인 육체적 고통일 뿐이다.
내용
내용에 포함되어야 할 사항은 지도의 문제와 프로그램의 문제이다. 이 두 문제가 내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런데 지도와 프로그램도 어떠한 형태로 실시되는 수련회인가에 의해 규정된다. 지금까지 실시되어 온 수련회의 형태는 대개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형태는 사찰 스스로가 자체 프로그램과 지도진을 확보하여 실시하는 것이고, 둘째 형태는 어느 특정 집단이, 단위 조직이건 연합된 조직이건 프로그램과 지도진을 준비하고 사찰만 빌리는 경우이며, 셋째 형태는 어느 특정 집단-주로 소규모의 단위조직-이 사찰에 지도와 프로그램을 의뢰하는 경우이다.
첫째 형태는 주로 해인사와 송광사에서 실시해 왔는데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개인 자격으로 사찰에서 이미 정한 지도진과 프로그램의 방향에 따를 뿐이다. 이 경우는 지도진과 프로그램이 알차게 짜여졌을 뿐 아니라 꽤 두꺼운 교재도 미리 준비하고 있어 수련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사찰 자체의 분위기와 성향이 매우 농도짙게 반영되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송광사 같은 경우는 참선 시간이 많고 사회적 관심을 완전히 폐쇄한 프로그램이며, 해인사 같은 경우는 참선시간이 적은 대신에 공동체적 유대감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또한 사회적 접근의 실천을 꾀하는 강의도 많이 삽입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오히려 장점으로서 권장할 만하다. 스스로 수련회를 주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찰이 자기 성향과 지도성을 확보하여 수련회를 실시한다면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회원들이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분명 올바른 방향을 가진 사찰은 해를 거듭할수록 양적으로 확산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찰은 양적으로 축소되어 결국 그 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둘째 형태는 활동이 활발한 단체 또는 실천척 역량이 많이 축적된 단체들로서 자기 집단의 목적성에 부합되는 프로그램과 그에 필요한 지도진을 확보하여 수련회를 갖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도 교재를 스스로 만들어 수련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세째 형태는 교재도 준비하지 못하여 수련의 성과를 감할 뿐만 아니라 어느 사찰로 장소를 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찰에 주석하는 주지스님의 성향에 의해 모든 내용이 규정된다. 가령 참선 수행을 오래하신 분이 주지스님으로 계신 사찰에서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참선으로 책정을하고, 참회 염불의 선호도가 강한 스님의 사찰에 가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의 시간을 절만 시키게 된다. 이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의 수련회이다.
그러면 바람직한 내용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먼저 프로그램은 교학(敎學), 참선(參禪), 독경(讀經), 참회(懺悔)등이 조화롭게 짜여져야 한다. 물론 사찰
생활에서 필수적인 예불과 바루 공양은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 교학은 역사사회 속에서 실천을 통히여 검증해낼 수 있는 가르침이어야 하고, 참선은 지혜의 칼날을 가는 것이어야 하며, 독경은 공덕을 더하는 것이어야 하며, 참회는 이기심과 업장을 소멸하고 중생과 함께 하는 동체대비(同体大悲)의 발원을 그 방향성으로 확보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 첨가할 사항으로는 그 단체 고유의 목적 실현을 위한 교육적 차원의 강의라든지 공동체 의식의 함양을 위한 탈춤, 민속놀이 등의 문화 프로그램의 도입이라든지 극기 훈련과 협동성 함양을 위한 무리별 산행(山行)이라든지 신앙 체험의 상호교류를 위한 신앙절복(信仰折代) 등의 프로그램은 도입해 봄직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의 부분이 목적성과 방향성을 얼마만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장(場), 장소(場所)
수련회 장소를 교섭할 때 한달 전쯤에 대상 사찰을 방문하여 허락받지 못하면 장소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생들의 방학 기간과 직장인들의 휴가철이 여름철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과, 똑같은 조건을 구비한 겨울철은 난방 문제가 부담스러워 사찰 스스로가 기피하고 있다는 요인으로 인해 수련회가 주로 8월에 집중하여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수련회 장소를 사찰로만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
최근 들어 사찰만을 고집하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이 전개되고 있다. 텐트를 준비하여 산림 속이나 바닷가에서 직접 밥을 지어 먹으며 수련한다든지, 방학 동안비어 있는 학교 교실을 이용한다든지, 사찰 순례의 형식으로 법당만을 잠깐 빌려 신앙 프로그램을 갖고 잠은 텐트에서 자고 또 다음 사찰로 순례하는 것과 같은 매우 바람직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해 보자. 수련의 장(場)이 한정된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실천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바로 장(場)이요 장소(場所)일진대 삶이있고 생활이 있는 모든 곳이 바로 수련의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사회의 ‘지금 이곳’이 수련의 장(場)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남는 문제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들에 대하여 합의를 하고 공감을 표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건은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이다. 가장 지도성을 광범위하게 발휘해야 할 승려들의 한계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현재의 위상, 그리고 세속생활과 진리의 생활을 창조적으로 통일해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동적 신앙의 형태에 머물고 있는 재가신도들의 현재의 위상이 조선조 억불정책과 일제하 사찰령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불교의 비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로 뒤엉켜 미로를 헤매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불교계 일각에서 들려오는 불교 자주화와 사회 민주화의 외침은 한국불교의 가느다란 빛임에 틀림없다. 올바른 수련이 바로 이러한 한국불교의 질곡을 불식시켜 줄 관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