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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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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일지 1990년 02월 96호
먼저 짚고 가야 할 문제
지난 팔십년대의 한국불교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거치면서 변혁과 순응이라는 상반된 가치를 경험했다. 예상되는 바이지만 구십년대의 우리 사회는 보다 빠른 속도의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우리의 불교 역시 현대불교의 새로운 전개를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데올로기의 종식, 노동력의 조직화, 기술과 정보의 발달로 특징지워지는 현대사회에서 불교는 어떻게 변모해 갈 것인가? 불교는 앞으로도 계속 불교가 전파된 지역의 사회와 산업체제, 시대의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면서 변용되기도 하며 발전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불교신앙과 사상적 성격이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는 궁금한 과제이다. 변화와 발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커진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성급한 변화의 시대라고나 할까 ! 그러나 일차적으로 붓다의 정신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그 변화가 극심하면 할수록 그 변화를 자기의 주체적인 문제로 심화시켜서 무엇보다도 불교의 윈점으로부터 사색하고 성실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하루종일 뜨뜻한 절집의 방들, 끼니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 먹는 밥들은 이미 하나의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우리의 조계종은 한국의 여러 사회조직 가운데 가장 낙후된 집단의 한 단위라는 오명을 벗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은 현재 불교의 이름으로 쓰여지는 막대한 경비와 노력들에 비해서 정체(停滯)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쉽게 비판하지는 말자. 지금 우리에게는 낙관도 비판도 아닌 진지한 자기검증이 필요하다. 우선 여기서 먼저 짚고 가야 할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 불교계는 이상한 이분법적(二分法的) 한정(限定)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즉 이판과 사판, 선(禪)과 교, 순수와 참여라는 이분법적 한정이다. 순수는 보다 종교적이며 참여는 세속화, 순수-소승적, 참여-대승적이라는 통념이 바로 불교 특유의 실천적 행법(行法)을 장애하는 우리 자신의 한계인 것이다.
선(禪)이 교학보다 우월하다는 우리의 통념 역시 그 어떤 확실한 기준이나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선(禪)이 인간존재의 심연을 관통하는 직관과 행동의 레디칼한 요소를 섬세하게 감추고 있기는 하지만 선(禪)은 결코 선으로서 끝나지는 않는다. 깨달음 또한 인간해방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선불교가 초기불교 없이, 존재의 논리를 가장 깊이 파고 들어간 중관불교(中觀佛敎)없이, 마음의 예지를 천여년 이상 줄기차게 탐구해 온 유식불교(唯識佛敎)없이, 대승불교의 웅대한 설계도인 화엄사상 없이 하루아침에 개발된 신제품이란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지혜는 결코 하루아침에 개발될 수 있는 신제품이 아니다. 선(禪)이라는 깨달음의 운동의 내면에는 불교적 예지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조용하게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선이 교학보다, 교학이 선(禪)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며 낙후된 불교에 대한 책임을 서로 뒤집어씌우는 게임을 이제는 끝장을 내야 한다. 어느 쪽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해방의 생명관(生命觀)에 입각하여 삶의 여러 과정, 형태, 방법에 적용될 수 있는 개방된 교리적 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붓다의 정신을 재생하는 작업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면 깨달음을 선(禪)이라고 부르든 교(敎)라고 부르든 아무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역할을 이분법적 통념에 한정하고 무자각하게 안주할 때 사회에 대한 아무런 봉사나 기여도 없이 사회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의식의 퇴락, 회향(廻向)과 시여의 윤리 부재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불교는 인류가 구축하고 체험한 모든 사상적 운동, 종교적 진실 가운데 매우 이상한 운명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불교가 불교 그 자체를 극복함으로서만이 불교라는 대승불교의 역설적인 명제에서도 보여지는 바이지만, 이 역설은 상반된 가치로 고정되거나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역설이다. 즉 불교는 인간의 삶을 포함해 어떠한 현상도 객체화, 추상화시켜셔 보지 않으며 인간의 추상화된 의식과 존재를 주체적으로 회복해 가는 운동인 것이다. 여기에 사상의 옷을 입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불교는 항상 보편연계·전면발전(普遍聯繫·全面發展)을 지향하고 있다. 불교는 끊임없이 절망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가장 극명한 선언이며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호흡이 길다
“불교 교단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단체이다. 쟈이나교단을 제외하고 다른 단체보다도 오랜 기간 존속해 왔다.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군단, 제국, 선단(船團)이 출현했었다. 그러나 몇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3세기 이상 존속한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불교의 승가는 부(富)보다도 빈곤을 중시하고 고의로 걸식단체의 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다른 생명은 해치지 않는다는 철저한 비폭력의 법칙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그들은 장려한 꿈을 꾸면서 공상의 대지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낸 것일까? 그들은 또한 세속적인 가치를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화(柔和), 관대한 자비, 지혜의 수련을 위한 선(禪)을 존중했다. 탐욕과 무력(武力)에 입각한 제국은 겨우 수세기 동안 존속할 수 있었지만 이 걸식단체가 일으킨 자기부정의 운동은 불교 교단을 이천오백여년 동안 존속할 수 있게 한 것이다”(E.콘즈).
다소 언용이 장황했지만 확실히 콘즈는 불교를 깊은 안목에서 보고 있다. 요즘 우리는 불교를 너무 빨리 많이 알려고 한다. 그래서 사찰마다 불교교양대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불교는 어렵다. 불교 경전은 읽어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좋은 것일까? 불교는 인스탄트식품처럼 간편해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며 해탈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르겠다”라고 말하기 전에 얼마나 불교에 대해서, 경전을 읽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스스로 반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교는 기분대로 떠들고 촐삭거리며 몰려다니는 철없는 인간들의 종교가 아니다. 또한 뜨거운 머리로 덤벼들어 마스터할 수 있는 학문도 아니다. 불교는 침착하고 의연한 인간으로서의 배우는 자세가 갖추어진 호흡이 긴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그 역사만큼이나 호흡이 길다. 지금 불교의 현안문제처럼 거론되고 있는 제도개혁이나 불교사회화운동 역시 고장난 기계의 부품을 갈아끼우는 것처럼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좀더 생각해보자. 진정한 제도개혁은 승가의 역량이 불교적인 목표에 집중될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종교개혁이다. 지금 우리가 정열을 기울여야 할 문제는 부품을 갈아끼우는 식의 제도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승가 구성원 각자의 불교 인식에 대한 연대성을 확대하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제도가 나빠서 불교가 침체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제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바뀌지 않은 한 제도는 수만번 바뀌어도 늘 낡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팔십년대의 한국불교 전개 과정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과로 평가되는 불교사회화운동은, 기성 교단의 봉건적 불교 인식과 현실 안주의 벽을 깨고 불교사회화운동에 뛰어들어 수많은 희생과 고난을 감수했던 젊은 불교인들의 창조적인 노력의 결실이다. 정권의 탄압과 기성 교단의 냉소적인 무관심 그리고 운동 역량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사회화 운동은 불교의 사상적 이해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했으며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무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불교사회화운동의 이념, 실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미약하며 공정, 부정의 논란이 계속 남아 있다. 그것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운동의 이념적 기반과 실천 역량의 위상 탓이기도 하지만 불과 십수년의 짧은 연륜과 아직 정리되지 못한 과제 인식의 미숙함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불교사회화운동의 이념과 성과를 엄밀히 검토하고 계속적인 불교사회화운동을 진행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는 것이다.

불교 신해석(佛敎新解釋)을 위해
불교사회화운동이라는 과제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제일차적인 관건은 아무래도 불교 교리의 구조·신앙에 대한 신해석의 문제일 것이다. 아울러 사회현상 전반에 걸친 사려깊은 통찰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팔십년대의 불교사회화운동가들이 시도했던 사회과학적 불교해석은 아직 충분한 이론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사회과학적 불교해석에서 문제되는 것은 불교의 언어체계에 대한 고려를 소홀히 한다는 점이다. 불교경전 특유의 반성적 사유구조와 사회과학에서 쓰이는 용어는 그 성격에서 다르다. 불교정전의 언어는 사물이나 어떤 특정한 상황을 개념화하여 한정하는 상대적 인식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세계와 자아에 관한 연기론적 통찰을 담고 있다. 따라서 불교경전 특유의 반성적 사유구조는 언제나 언어, 관념의 벽을 뚫고 나간다. 불교해석의 기초로서 불교의 언어체계는 불교의 사회과학적 변용에 앞서서 꼭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은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해석의 일정 부분은 외국의(특히 일본 불교학계) 성과를 대량으로 번역, 수용하고 있는데 우리의 자생적인 불교해석의 체계를 수립하지 않으면 불교사회화운동 내지는 포교활동에 혼선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우리의 자생적인 불교해석의 체계란 우리의 사회적 현실과의 부탄한 대면(對面), 해석, 변혁을 통해서 수립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불교의 신해석이란 우리의 불교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 작업이다. 해석이란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승불교의 수많은 경전과 논서를 역시 자신들의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당시의 민중들이 애호하던 불교설화, 불교사상의 기본적 골격을 재해석한 것임을 감안할 때 우리의 자생적인 불교해석의 체계 수립은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우리는 할 일을 많이도 갖고 있다. 모두 힘을 더 내자.

일지스님은 백양사로 출가한 이래 해인 강원을 졸업한 후 낙산사 교무 등을 맡아 일하는 한편 제1회 “해인상”의 논문 부분 수상자가 되기도 했으며 「임제록」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