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 에이스 레퀴엠
도나 에이스 젬피테르남 레퀴엠
앵무새처럼 귀에 익은 구절을
따라 외우기도 한다.
그들에게 안식을 베푸소서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베푸소서
‘진혼 미사’에서 노래될 이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내 종교마저도 잊어버린다. 나는 매번 그 혼을 위한 달램의 가락, 사후死後의 영혼의 평화를 기구하는 소리에 흠씬 젖는다. 그러면서 그 숙연한 마음의 기울임을 나의 또 다른 귀의歸依라고 생각한다.
그건 여간한 정복淨福이 아니다.
레퀴엠을 듣는 것은 귀의이기 때문에 나의 그리움이기도 한 것. 그것도 장차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영혼의 안식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 알뜰한 모정慕情이다. 실제로 누려 본 적도 없고 잠시 잠깐 가져 본 적도 없는 것에 대한 사모思慕이기에 그건 ‘미래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오고 있을 것에 미리 의지하는 연모戀慕 같은 걸까?
삶이 죽음에 부치는 연모, 죽음이 삶에 부치는 모정.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 둘은 그렇게 서로 그리워하고 있기를 바란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삶이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고 죽음이 삶에 대한 그리움이기를 소망하고 있다.
“사랑해”
서로 그렇게 주고받고 하기를 빈다.
삶이 죽음을 떠받들면 죽음이 삶을 떠받들게 되는 경지! 목숨 있는 자에게 이보다 더한 ‘레퀴엠’은 없을 것 같다. 사후의 안식이 아닌,살아서 누리는 안식의 결정結晶일 것 같다.
신 새벽의 한 줄기 푸른 연기
그래서 포레의 ‘레퀴엠’에 마음 기울일 적마다 떠오르는 어떤 정경情景 하나. 그건 지금부터 자그마치 사십여 년 전, 어느 작은 산사에서 겪은 일이다.
도량석道場釋이 막 끝난 신 새벽이었다.
암자 앞, 절벽이다시피 깎아지른 봉우리에 섰다. 골짝에서는 구름들이 겹겹이 일어서서 비탈을 타오르고 있었다. 그 구름들에 밀려서는 설핏해져 가는 어둠 저 너머로 먼 산들이 뿌이연 어깨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망연 자실,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정화, 세정洗淨……
그런 낱말에 붙여서 성스러움 그 자체로 하루를 또 새로이 시작하는 대자연의 이법理法에 나는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기 푸른 연기가 보이나?’
나는 후딱 놀랐다. 돌아보았다.
어느 새 가까이 다가선 노장께서는 손을 들어서 어느 지점을 가리키고 계셨다.
그건 한 줄의 연기였다. 갈매빛으로 밝아져 가고 있는 동녘 하늘을 배경 삼아서 그 외줄기의 연기는 너무나 선연해 보였다. 아슬하게 먼 곳, 산마루였으나 그 푸른빛은 눈이 아리도록 시렸다. 시리디 시렸다.
가만가만, 거의 수직으로 무슨 계시이듯이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 한 가닥!
‘저게 뭔지 알겠나?’
나는 미처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사뭇 엄숙했다.
무슨 예감 같은 것에 나는 짓눌렸었다.
겨우 고개를 젓는 내게
노스님께선 오직 한 마디.
“어젯밤 다비가 있었던 게지.”
나직한 소리. 그러나 너무나 장중했다.
말투는 늘 스님께서 그랬듯이 스치는 바람기 같았으나 내게 전해지는 느낌은 정말이지 태산이었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의 응시가 못 박힌 저 피안에서 비취빛 연기는 이내 사라져 갔지만 나는 미동도 못했다. 오래도록……
승화昇華라는 건 저런 걸까?
아니, 비상飛翔도 저런 걸까?
무거움을 떨고 가벼움이 된다는 것!
구속도 속박도 헐고
오직 자유가 된다는 것!
‘내’가 지워지고 온전한 전체 속에 스며든다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나는 옴짝도 못했다.
아니 다만 그 생각일 뿐, 그 생각들의 날개 짓일 뿐, 나는 온 데 간 데가 없었다.
찰나는 가고 다만 영원만이!
마지막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나도 몰래 울고 있었다.
골짝을 타고 올라 온 엷은 구름자락이 소리 없이 괴는 눈물을 스쳐갔다.
상보相補하는 생사
그 아침, 공양을 마친 뒤였다.
나는 뒤뜰에 가서는 꽃밭을 매만지고 있었다.
파초와 맨드라미 그리고 과꽃들, 낯익은 화초 사이에서 이름 모를 푸른 잎새가 내 눈길을 끌었다.
그저 잎뿐이었다. 한 뿌리에서 몇 가닥의 잎이 싱그럽게 무리져 솟아 있었다. 줄기도 없었다.
꽃망울커녕, 꽃대로 보임직한 것도 없었다. 밑둥이 제법 넓으나 끝이 뾰족한 잎새들은 검은 기가 돌 만큼 짙푸르렀다.
‘좀, 별나구나?’
그러고 있는 짬이었다.
“그게 상사화지.”
곁에서 잡초를 뽑다말고는
노스님께서 일러 주셨다.
“상사라니요?”
뜨악해진 내게
그는 혼잣말이듯 입을 열었다.
“상사라! 그래 상사지 않고. 엽葉 불견不見 화花요 화花 불견不見 엽葉이라서 그렇지.”
내가 공연히 알아들은 척했다.
“잎이 꽃을 못 보고 꽃이 잎을 못 보니 그렇듯이 서로 못 보는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서로 그리워한다는 겁니까?”
“예끼, 시건방지긴!”
그러나 크게 벼락을 안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이 스무댓에 되잖은 건방을 떤 것은 따지고 보면, 어둑새벽의 푸른 연기 탓이었다.
그 승천하던 비취빛이 상사화의 뜻을 비쳐 보인 것이다.
지금은 겨울 한복판, 한데도 이 곳 남녘 바닷가의 양지에는 상사화가 움튼 지 이미 오래다.
세(細葉) 상사화는 잎이 흐드러질 대로 흐드러지고 대엽大葉 상사화는 기세 좋게 그 싹이 흙 두덩을 뚫고 일어서고 있다. 그러면서 머지 않아 피어날 그 화사하기 이를 데 없는 꽃들을 기척도 없이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잎과 꽃 중에서 어느 것이 삶에 그리고 또 어느 것이 죽음에 견주어져 마땅할까?
모르긴 하지만 잎이 먼저니 그를 삶이라고 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하면 꽃은 절로 죽음이 되니, 그 아름다움이여!
삶과 죽음이 상보相補하는 경지.
삶이 죽음을 가꾸는 것을 받아서
죽음이 삶을 가꾸는 경지.
그 해조諧調여!
생사 사이의 염화시중의 미소여!
기우는 햇살, 뒤뜰 푸른 상사화
잎새가 환히 내다보이는 창에 ‘레퀴엠’ 가락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