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출발한 모양이다. 원당암에 도착한 것은 저녁시간도 훨씬 지나 짙은 어둠이 내려 있을 때였다. 주차장에는 꽤 여러 대의 차들이 주차돼 있었는데, 경내는 인적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다. 분명 200여 명이 넘는 대중들이 정진중이라고 들었는데….
원당암은 재가불자들의 용맹정진 도량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매월 첫째·셋째 토요일과 한철에 일주일씩 잠을 안 자고 정진을 한다. 한 번에 동참하는 불자들의 수가 500여 명. 일주일 정진이 끝나도 하산하지 않고 안거기간 내내 정진을 계속하는 불자들도 늘 70여 명에 이르니 원당암에는 항상 100여 명의 대중이 머물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많은 대중들이 오고 가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원당암은 늘 두세 사람만이 거주하는 절처럼 조용하고 깨끗하다.
혜암 스님이 원당암에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원당암은 고시생들의 공부터였다. 혜암 스님 오시고 일절 고시생을 받지 않았고, 스님의 ‘용맹정진’ 가풍대로 불자들에게 참선공부를 가르쳐오고 있다. 몇 사람이 시작한 모임이 이제는 한 번에 500여 명이 넘는 불자가 정진을 하고 있고, 스님께서 입적하신 후에도 불자들의 정진행렬은 멈추지 않고 있으니 큰스님의 크신 원력을 실감한다. 혜암 스님은 평소 부모님 상을 당해도 정진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펴시어, 정진하는 불자들은 스님의 재일에도 참석을 하지 않는다.
옷 챙겨 입고 잠자리에 드는 ‘5분 대기조’
원당암이 지금의 도량이 되기까지에는 큰스님의 원력이 큰 것이지만, 혜암 스님에게는 상좌 각안 스님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각안 스님은 혜암 스님 상좌로 결코 작지 않은 절살림을 도맡아온 원당암의 원주(공식 명칭은 감원으로 암자 주지격). 출가후 15년 동안 원당암을 벗어나지 않고 큰스님을 지극정성으로 시봉해 온 누구나 인정하는 효상좌다.
각안 스님은 큰스님 시봉하면서 옷을 벗고 잔 적이 없다. 양말은 물론이고 추울 때는 모자까지 쓰고 자기도 한다. 처음 본 사람들은 ‘이상한 버릇도 다 있네.’ 하며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곧 스님을 이해하게 된다. 평생을 장좌불와로 정진을 멈추지 않으시는 혜암 스님을 모시고 살려면 당신도 장좌불와의 정신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님은 잠을 안 주무시니까 방에 늘 불이 켜져 있습니다. 그런 스님이 언제 부르실지 모르니까. 부르신다면 급한 일인데 옷 갈아입고, 양말 신고 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스님은 속가식으로 말해 ‘5분 대기조’라며 엷게 웃는다.
그러나 큰스님 입적하시는 날까지 각안 스님은 “너 참 잘했다.”는 칭찬 한 번 들었던 적이 없다. 큰스님은 칭찬에 무척 인색(?)한 분이다. 일을 해놓고서도 칭찬은 고사하고 욕먹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디 간다고 해서 차비 한푼 주는 법이 없다. 그런데다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웬만한 상좌들은 스님 옆에서 1년을 버티면 잘 버틴 것이라 소리를 들었고, 행자들은 너무 고된 일과에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곤 하였다. 큰스님은 공부를 시켜야겠다 생각하면 매정하게 낭떠러지로 끌고 간다. 스님은 용맹정진 가풍을 이을 사자새끼를 원하셨다. 각안 스님은 그 낭떠러지를 얼마나 많이 기어올랐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했다. 그런 스님 곁에서 누군들 배겨나겠느냐고. 그러나 각안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 스님처럼 시봉하기 편한 분도 없어요. 스님은 바르게 살기를 원하셨어요. 요령을 피우는 것은 질색하셨지요. 바르게 살라고 시키시는 거 그대로만 하면 돼요. 내 식대로 하려고 하면 살기가 힘듭니다.”
작은 잘못은 호되게, 큰 잘못은 관대하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각안 스님은 승복조차 입어볼 여유가 없었다. 늘 작업복차림. 처음 원당암에 온 사람들은 각안 스님을 일꾼이라 생각했다. 15년 전, 각안 스님이 처음 원당암에 올 때만 해도 3동밖에 되지 않던 건물이 지금 17동이 되기까지 스님은 ‘노가다’ 십장什長에 버금가게 일을 많이 했다.
햇볕에 타 얼굴이 까만데다 깡말라 있으니 사람들은 “집 한 채를 지어도 뼛골이 빠진다는데 열 채를 넘게 짓다가 너무 몸을 상한 것 같다.”고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불사가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스님이 진정으로 힘들었던 점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용맹정진해서 큰 공부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백하건대, 한때는 집만 짓지 말고 공부하러 떠나자는 도반의 제의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다.
“일하면서 다녔기 때문에 공부는 제대로 못했지만 해인강원海印講院도 졸업했고, 선방(봉암사)에서도 1년 살아봤고, 스님 모시고 토굴에서도 있었지요. 그런데 스님께서 아마 제 근기는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더 맞다고 보신 것 같아요. 불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집은 종합작품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기초가 중요한데 기초가 잘못되면 집이 기울거든요. 그런 것을 깨달아가면서 우리 스님의 공부법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원당암 대중들은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풀 뽑기 선수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나 풀 뽑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큰스님이 일어나
뽑고 계시니 누군들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영락없이 떨어지는 꾸중. “처음에는 누구나 잔디보다 웃자라 있는 것만을 뽑게 되지요. 그러나 큰스님은 잔디 속에서 삐죽이 고개를 들고 있는 풀을 솎아내라는 겁니다. 그래야 또 뽑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큰스님은 풀 뽑는 일과 함께 쓰레기 분리수거에 특히 신경을 쓰셨는데, 그래서 원당암 경내는 언제나 깔끔했다. 더러우면 남들이 무시한다며 하찮게 생각하기 쉬운 것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셨다. 그러나 누가 봐도 큰 실수는 야단 한 번 안 치시는 관대함을 보이기도 하셨다.
한번은 중요한 일로 외국에 나가야 하는데 어떤 상좌가 여권을 갖고 오다가 택시에 두고 내려 버렸단다. 스님은 결국 출국을 할 수가 없었는데, 큰스님께 야단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상좌에게 스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런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왜 야단을 치지 않으시느냐’는 상좌의 물음에 혜암 스님은 “네가 잘못을 충분히 알고 있는데 야단을 쳐서 무엇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작은 실수를 오히려 호되게 나무라시어 공부케 하는 스님의 깊은 뜻을 대중들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각안 스님의 시봉법-완벽한 믿음
각안 스님은 누가 봐도 효상좌다. 가까이서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각안 스님의 효심에 감동한다. 각안 스님과 함께 큰스님 수발을 들었던 행자는 스님께서 큰스님 수발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한몸 같았다’고 전한다.
“한번은 원주 스님께서 다리를 주무르라셔요. 한 번도 시키지 않으셨던 일이라 웬일이신가 생각만 하고 주물러 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 대신 큰스님 주무를 수 있나를 시험하셨던 것 같아요. 큰스님 주무르기 적당해질 때까지 자신의 몸으로 시험을 해보신 것이지요.”모든 것이 그랬다. 염화실에서 미소실로 스님의 거처를 옮길 때도 스님은 자신이 몇 번 옮기는 거처에서 자보고 이부자리 역시 덮어보고 해서 괜찮아야 스님을 덮어 드리곤 했다. 소제할 물을 데울 때면 이만하면 됐을까 싶을 때 스님은 정확히 나타나 온도를 확인하는데, 너무나도 정확한 시간에 오셔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고 한다. 어느 아들이 이다지도 지극 정성으로 돌봐드릴까. 옛날 전래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
지금까지 한 번도 스승의 말씀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각안 스님. 그것은 큰스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에게 이게 아닌데 하는 한 치의 흔들림이라도 있었다면 분별심이 생겼을 것이고 짜증이 났겠지요. 그러나 우리 스님께는 그런 것을 느껴보지 못했어요.” 큰스님도 분명 사람이었을진대, 또한 각안 스님 역시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철저한 믿음에 흔들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스님은 완벽하게 살아오신 분입니다. 15년을 옆에서 모시면서 물론 겉모습으로는 화도 내고 나무라시기도 하시지만 그 속에는 칭찬하는 마음도, 나무라는 마음도,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도, 원망하는 마음도 없는 흔들림이 없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강직함 속에 간직되어있는 온유함을 사람들은 모르더군요. 저는 큰스님의 그런 부분을 보았습니다.”그러면서 나름의 시봉원칙이 생겼다.
“처음에는 ‘완벽하게 살아오신 분이니 시키는 대로 하면 시봉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진짜 시봉이 어떤 것인지 알았어요. 진짜 시봉은 큰스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에서처럼 자식이 종이 되고 은사스님의 종이 돼서 산다면 그것은 종밖에 안 되는 것이지요. 모시고 살면서 뭔가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지요.”그것을 큰스님은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다. ‘내가 시봉을 받는 것은 내가 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공부하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싶다고 모두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돼지에게는 소용없듯이. 그러나 각안 스님은 분명 준비돼 있었다.
“그 분의 말씀에는 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님의 공부법을 하나라도 더 배워야겠다는 욕심이 생겨났지요. 욕심이 있으면 시봉은
자연스런 것이지요.”
큰스님은 공부를 심지법心地法으로 가르쳐 주셨다. 몸으로 몸소 실천하며 보이셨고, 몸으로 익히도록 만든 것이다.
큰스님은 마지막날을 택하셨다. 구랍 26일 신년사新年辭까지 다 발표하고 한 해의 마지막날에 너무 들뜨지 말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가라앉히라는 듯 31일 조용히 입적하셨다.
큰스님은 입적하셨지만 각안 스님의 마음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큰스님은 단지 몸을 바꾸셨을 뿐이기 때문이다. “큰스님 가르침이 죽지 않는다였습니다. 단지 몸을 바꾸었을 뿐이지요. 여전히 스님은 우리 곁에서 뭘하고 있는지 다 보고 계실 겁니다.”지금까지는 실전 준비를 위한 고된 훈련과정이었다. 이제는 스님 스스로의 수행의 힘으로 살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 큰스님이라는 커다란 그늘에서 갑자기 벗어나면 잠시는 갈팡질팡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혜암 스님은 각안 스님이 어딜 가든 곁에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이 흐트러질 수가 없다.
“스님은 바르게 살아라, 진실되게 살아라, 바른 마음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것을 심어 주셨는데, 스님을 이생에서 가장 가까이서 모신 나마저도 흐트러지게 살면 우리 스님 욕보이는 일이고 나로서도 불행한 일이지요. 누가 알아주고 않고를 떠나 내 마음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려 노력할 것입니다.”그런데 꼭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스님 살아 생전에 비디오 하나 제대로 찍어놓은 것이 없고, 그 보석 같은 말씀을 책으로 엮지도 못해, 이제는 그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스님은 법문을 직접 손수 쓰셨고 결코 누구를 시키시는 법이 없었다. 이제는 그것들을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고 각안스님은 말한다.
“부처님 말씀도 제자들이 그것을 전했듯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지요.”각안 스님은 혜암 스님과 똑같다는 것이 원당암 대중들의 공통적인 말이다. 스승을 존경하고 따랐으니 어찌 닮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이 같으니 얼굴도 닮아간다. 어떤 사람은 와서 ‘아들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단다.
물론 각안 스님은 어찌 큰스님을 따라갈 수 있겠느냐며 손을 내젓는다.
“다생겁 동안 아마 스님을 졸졸 따라다니지 않았나 싶어요. 겉모습이야 제가 스님을 따라갈 수 없지요. 스님은 하루 한끼에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하신 분입니다. 저는 밥 세끼 다 먹고 잠도 잘 만큼 잡니다. 그러니 내가 스님이 행하는 모습은 따르지 못할망정 스님의 마음속에 가지고 계신 공부하는 힘은 항시 내 마음속에 가지고 삽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항상 바른 마음으로 밀고 나가는 그것이 용맹정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밀고 나갈 겁니다. 남들은 안보이니까 모르겠지만.”
원당암을 나오면서 왠지 모를 벅찬 희열이 치솟아 저절로 미소가 배어져 나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원칙과 상식, 도덕을 목격한 데서 오는 기쁨. 세속적인 발상에서 각안스님의 승리(?)를 기원해 본다. 융통성과 재주와 재치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직한 외곬수가 받드는 도덕과 원칙과 상식의 승리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