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수행에 있어서 수행상의 방법 차이로 서로 다른 점을 주장하던 시기와 양대 세력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 송나라 때에 조동종 계통의 굉지정각宏智正覺(1091~1157) 선사가 묵조默照(寂照)를 주장하는 데 대하여, 임제종 계통의 대혜종고大慧宗(1089~1163) 선사는 묵조를 수행하는 이들이 수행의 진의眞義를 모르고 정진하는 데 대하여 분개한 나머지 묵조를 비방하면서, 화두참구법話頭參究法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현금에 이르기까지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默照禪과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어구語句가 있게 되었다.
굉지의 주장은 ‘적정처에서 지혜의 광명을 밝힌다(於寂靜處發明慧光)’는 입장이다. 이는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자리를 지키는 수행이지, 어떤 깨달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守護本性修行 不望覺之結果)’고 하니, 참선이라는 선禪의 자체가 목적이고, 깨달음은 참선수행의 과정에서 자연히 얻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대혜의 주장은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다(參究話頭 入覺悟之境)’는 주장이다. 이는 ‘화두를 의지하여 부단不斷히 깨달음을 추구해 나아간다는 것(依話頭覺悟)’이니, 화두라는 것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위한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자기 계발의 수행이다.
화두란, 공안公案을 말한다. 이는 공公go-ng 부府fuˇ 안案a、n 독牘du、의 준말이니, 이는 수행자에게 깨달음을 열어 주기 위하여 주는 하나의 문제이다. 이 고인들의 공안을 간看하는 참선법參禪法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이상에서는 두 가지의 수행에 대한 방법을 잠깐 비교해 보았다.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요사이 선원제방禪院諸方에서 정진하는 운수선객雲水禪客들은, 뼈를 깎고 살을 에는 각고의 노력으로 간화선 수행에 진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입적하신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이셨던 혜암당 성관 대종사께서도 당연히 간화선 수행의 선지자先知者이면서 수좌首座들의 선배이셨다. 이 수행은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여 눈을 뜨나 감으나 마음에 간단間斷없이 화두를 파정把定하여 전도망상顚倒妄想·사량분별思量分別·요생염사樂生厭死의 심식요동心識搖動하는 곳에 화두를 간看해야만이 진정한 간화선일 것이다.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한 그것이 공안이고 화두이니, 화두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화두를 파정把定하여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그 의심하는 힘이 덜어지는 곳에 이르면, 그 곳이 바로 힘을 얻는 곳이 된다.
이 때가 되면 화두를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온 종일 이어진 새끼줄처럼 화두가 순일하게 이어져 화두 덩어리로 똘똘 뭉쳐져서 털끝만한 틈도 없게 된다.
이렇게 될 때, 화두하는 마음을 흔들어도 화두는 움직이지 않고 화두를 쫓아내려고 해도 나가지 않는 이 순간, 눈 앞에 나타나 있는 화두는, 마치 흐르는 물을 따라 배를 띄우는 것처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의 경계가 될 때, 화두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른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바른 생각을 가다듬지 못하면 식광識光에 빠지게 된다.
바른 생각을 가다듬어 파정把定할 때, 경계가 점점 밝아지고, 밝아지는 그 순간 다생겁으로 익혀왔던 습기習氣의 행방이 조금씩 미미微微하게나마 드러나게 된다. 이 때 산란한 마음과 혼침한 마음이 뒤범벅이 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화두 하나에 몰입하여 나아가면, 몰입한 그 오묘奧妙한 경계가 있을 때, 화두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허공에 떠 있는 기분같이 편안하고 안온함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기 때문에, 화두하는 사람은 마음이 요동하지 아니하므로, 와도 오는 줄 모르고 오며, 가도 가는 줄 모르고 가며, 포행을 해도 포행하는 줄 모르고 포행하며, 앉아도 앉는 줄 모르고 앉으며, 차를 마셔도 마시는 줄 모르고 마시며, 밥을 먹어도 먹는 줄 모르고 먹고 잠을 자도 잠자는 줄 모르고 잠을 자기에 이런 경계에 있는 이는 하루 종일 바보같이 보인다.
이 바보 같은 사람이 참으로 무서운 사람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럴 때 화두가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화두는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에 존재하는 하나의 문제이고, 끊어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화두이기 때문에 화두를 타파打破하면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경지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두話頭를 간看하는 힘을 얻는 호시절好時節이니,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1981년 퇴설당에서 동안거 정진 중에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한 쥐꼬리의 끝만한 식광識光이 있어 백련암 성철 큰스님에게 꾸중을 듣기도 하면서 해제解制를 성만盛滿하고, 해제일解制日에 수좌首座의 소임을 맡으셨던 혜암 큰스님께 삼동三冬 구순안거九旬安居의 점검을 받을 적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에게 속지 말아라.
내가 지금까지 정진하면서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쳤다.
대한민국 정진한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그런데 내 나이 만 60세가
지난 지금에 야몽夜夢이 있다.
이 때 나는 ‘나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오至晤 수좌!
너도 너에게 속지 말아라.”
스님의 이 청정결백淸淨潔白한 수행담修行談을 들려주시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삼배三拜하고, 가사와 장삼을 넣은 자그마한 바랑을 지고 오대보궁 기도를 위해 행각을 떠난 적이 있다.
아! ∼오늘,두 손 모아 합장하여 큰스님께서 남기신 족적의 사리를 친견하고 진영眞影을 대하니, 새삼 경책 받으며 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던 그 때가 뇌리를 스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