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당 성관慧菴堂性觀 종정스님께서는 한마디로 두타행으로써 평생을 일관하신 분이다. 스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두타행이 끊어지면 정법안장이 끊어진다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영산회상에 여러 상수 제자들이 있었으나 오로지 마하가섭만이 평생을 두타행으로써 일관하였는데, 세존께서 염화미소拈花微笑하신 자리에서 특별히 말씀하시기를 “나의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付囑摩訶迦葉)”고 함으로써 후래의 정법을 가섭 존자에게 당부하셨던 일을 우리는 어제 일처럼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로써 석가 세존의 바른 법은 서천 28조와 동토 6조로 면면히 내려와, 아래로 선종은 5가 7종으로 번성하여 지금까지 그 법맥은 끊어짐 없이 이어져 온 것이다. 끊어짐이 없다는 것은 외형상의 이어짐만이 아니라, T. S. Eliot의 말처럼 “전통이란 외형적인 것이라기보다 내면의 흐름을 말한다.”고 한 것과 같다.
마하가섭은 부처님보다 몇 살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 노경老境에 이르도록 흐트러짐이 없이 두타행하는 가섭 존자를 보신 세존께서는 마침내 존자에게 “이제는 나이도 연만하니 두타행을 풀고 좀 편안히 하도록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러나 존자는 세존께 여쭙기를 “제가 금생에 어쩌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게 된 것을 더할 수 없는 홍복洪福으로 생각하옵니다. 세존께서는 저의 두타행을 계속토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청을 드려서 끝까지 계속하였다고 한다. 두타행은 열두 가지의 법으로써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일중일식日中一食 차제걸식次第乞食 단좌불와但坐不臥와 착분소의着糞掃衣(해진 옷만 입을 뿐 새 옷을 입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일중일식을 항용 줄여서 ‘일종식’이라고 발음하나 ‘일중일식’이며, 잠은 앉아서만 잘 뿐 눕지는 않는 것이다. 이를 포함한 열두 가지 법들이 곧 난행고행難行苦行을 위주로 한 피나는 수행을 내용으로 하며, 오로지 법을 얻어야만 쉴 뿐 그렇지 않고서는 서원코 편안히 쉬지 않겠다는 커다란 원력을 바탕으로 한다.
기실 이 문중의 종지는 정법안장에 서 있다. 서산西山의 《선교석禪敎釋》에서 어느 제자가 묻기를 “종문의 법이 마하반야바라밀이 종지가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서산 스님의 대답이 “마하반야바라밀이 종지라면 사리불이 정법제자가 되어야 할 터이나, 정법안장이 종지가 되므로 마하가섭이 정법제자가 되는 것이다.”고 하는 문답이 있다. 이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난행고행을 통해서 얻은 법, 그리고 세존의 일대시교一代時敎가 아닌 이심전심 교외별전以心傳心 敎外別傳하는 마음의 법(心法)을 존숭하는 것이며, 오로지 마음의 법을 요달하여 부처를 이루고 생사해탈법을 성취하여 우리의 본분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바른 법이고 나머지 모양 있는 법은 삿되어 바른 법이 되지 못한다.
내친 김에 역사적인 사실들을 상고해 보면, 부처님 법이 동토로 전래되어 동양 삼국을 중심으로 발전과 기복起伏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어 왔다. 그 예들은 중국과 우리 해동에서 여러모로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을 위시한 수천 번의 불법사태佛法沙汰를 겪어 왔다. 그 가운데서도 당 무종唐武宗 때의 회창법난會昌法難(842~845)이 가장 극심했다고 한다. 당시 승니僧尼 36만 여 명이 도태되었다고 하니, 가히 온 천하의 불법이 된서리를 맞은 셈이다. 수隋·당唐 대를 통하여 왕성하였던 교종들은 거의 멸절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변방과 산중에 위치한 선종 사찰들은 이런 대법난을 모면하면서 장차 천하의 불교를 선종이 담당하는 결과가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내려온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 아래서 제종 통합을 거듭하면서
결국 조계선종으로 단일화되어 불교를 대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정법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정법이란 어떤 것인가? 마음의 법을 종취宗趣로 삼고 마음을 궁구하여 자성을 깨치므로써 대지혜를 이루어 생사해탈법을 성취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길을 도모하는 공부이다. 언어 문자 이론을 배제하고 모양 있는 부처를 추구하지 않으며, 마음의 종취(心宗)로써 종문의 가풍과 전통을 이루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법이다. 이것은 천상 인간의 궁극의 공부이며 모든 종교와 철학 및 제자백가들이 추구해도 이르지 못하는 최상승의 법이다. 그 많은 부처님의 방편과 법문 가운데서 오로지 심종心宗만을 존숭하고 우리의 본래 부처로 삼는 참선문이 그 수행방편이 된다. 단월의 시주물에 의지하지 않고 화려한 교세를 뽐내지 않으며, 심산궁곡에서 띠밭 일구고 주먹밥 먹으며(種田團飯)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피로함을 극복하면서 각고의 정진으로 참선궁행하는 청백가풍이다. 이 가풍의 내용은 물론 두타행의 고행정진으로써 이른바 ‘백장청규’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이다. 이러한 도량과 수행 집단은 산중과 변방에 위치하면서 법난?
?호된 철퇴를 맞지 않고 이 문중의 종가로서 전통과 가풍을 잇고 천하 불교를 담당하게 된 것은 결코 참선 납승 스스로가 내세우는 아집과 독선 때문이 아니다. 두타행을 내용으로 한 참선 수행법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살아 숨쉬는 불교의 바른 법이요 핵심이 됨을 말해 주며, 불교를 걸머지고 이끌어 가는 소이所以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행고행의 두타법은 모든 것이 유족하고 풍부한 상황 속에서는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흔히 선문에 전해 오는 격언처럼 “등 뜨시고(따뜻하고) 배부르면 도 닦기 어렵다. 춥고 배고파야 발심한다(飢寒發道心)”고 하였듯이, 아무 기릴(부족한) 것이 없는 곳에서는 웬만한 상근기가 아니고서 발심해서 도를 이루기 힘들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진정한 공부인은 수용需用이 너무 풍족한 도량은 일부러 피하여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다. 또한 살림 맡는 것을 피하고 심지어는 선원의 소임까지도 마다하고 저사抵死코(절대로) 맡지 않는다.
혜암 종정스님께서는 1970년대 초 총림이 어려웠을 때 주지 소임을 잠시 맡았다가 6개월 만에 야반도주하였다. 스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73년 가을이었던가 싶다. 당시 백련암 시자로 있을 때 저녁 예불이 끝나고 큰방에서 대중이 차공양을 하는데 백련암 스님(성철 스님)께서는 당신의 방으로부터 형색이 소박한 한 스님을 안내하여 건너오시더니 그 스님에게 아랫목 좌복을 권하면서 대중의 인사를 받게 하셨다. 혜암 스님께서 처음 머뭇머뭇하다가 앉으시니, 대중더러 3배를 드리도록 하셨다. 처음에는 어떤 스님인 줄은 알 수 없었으나 3배를 받도록 하는 것으로 보아서 제법 큰스님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혜암 스님이셨다. 당시 큰절 선원에서는 유나를 모시는 문제로 팽팽한 분위기였는데, 이 상황에서 혜암 스님은 스스로 도망을 하여 일시 백련암으로 피신하셨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나의 시자실과 앞뒷방으로 쓰던 뒤쪽 원주실인 원택 스님 방으로 안내하여 쉬시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혜암 스님은 공양을 드신 다음 이내 길을 떠났는데, 그 길로 태백산 동암으로 가셨다.
지리산 칠불 운상원雲上院 선원에서 스님을 모시고 지내게 된 것은 1976년 겨울이었다. 당시 운상원에는 열 명 가까운 대중이 함께 겨울을 났는데, 현우 스님이 가장 연만하셨고 현기·성우·인각·장춘·영진(송광사)·대현 스님 등이 함께 했다. 혜암 스님은 그 해 봄에 송광사로부터 칠불로 와서 협소한 운상원의 방을 트고 넓혀서 열 명이 지내기에는 그리 좁지는 않았다. 겨울 동안 방에 땔 나무는 미리 해 놓아서 부엌이 가뜩하였고, 다만 선원에서 수용할 물품과 양식 등은 스님께서 직접 주선하였기 때문에 더러 구례까지 가서 마련해 오기도 하였다. 차가 10리 밖 신흥까지 싣고 오면 대중이 지게를 지고 나가서 져 올리곤 하였다. 어떤 때는 스님은 밤 늦게 오더라도 당신의 일과대로 저녁도 잡숫지 않고 밤이면 정진을 함께 하면서 오후불식과 장좌불와를 계속하셨다. 당시 혜암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로서 그 해 봄 선원을 넓히는 작업을 부엌에서 하고 있었는데, 흙 먼지 자욱한 가운데 홀연히 한 노인이 불쑥 들어서더니 쪽지 하나를 건네주
고는 마당으로 나가서 인홀불견人忽不見(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음)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때는 작업 중에 쪽지를 펴볼 겨를이 없었으나 나중에 펴보니 게송 하나가 적혀 있었다.
진철심塵凸心을
금강마金剛하고
조견연照見蓮하야
섭고비攝顧悲하라
때묻은 뾰죽한 마음을
금강검으로 깎아내고
연꽃을 비춰 보아
중생을 섭수하여
자비로써 보살피라.
이는 3언 4구시三言四句詩로서 문수 보살의 솜씨임을 능히 짐작케한다. 《한산시寒山詩》에는 3언시가 여섯 편 실려 있는데 이 시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시행詩行 수만 다를 뿐 같은 시형詩形이다.
그 철을 마치고 나서 대중은 스님과 함께 모두 헤어지고 스님께서는 그 길로 해인사로 들어왔고, 성우·인각·대현 스님 등과 나는 현풍 도성암으로 가서 여름을 나고 해인사로 들어와서 26년을 함께 모시고 지낸 셈이니, 스님과의 인연은 지중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 혜암 스님께서는 결국 가셨다. 가시고 난 텅 빈 자리는 언제 또 메워질는지? 두타 수행의 표상이신 스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과 모범을 보여 주고 가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