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댓가로 살리라.
일한 만큼의 댓가로 살리라.
육체적 · 정신적 노동의 댓가로 살리라.
더도 덜도 아닌 꼭 일한 만큼의 댓가로 살리라.
바로 그〈댓가〉로, 바로 그〈노동〉으로 살리라.
더도 덜도 아닌〈댓가〉로, 더도 덜도 아닌〈노동〉으로,
더도 덜도 아닌〈소유〉로, 더도 덜도 아닌〈분배〉로,
그것이 정신이든 물질이든
딱〈그 자리〉에서 살리라.
딱〈그자리〉에 들어맞는 노동이요, 그 댓가인 무소유 ·무
집착의 열림, 자유, 해방으로 살리라.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자리〉에서 살리라.
열리라.
자유를,
해방을,
그리하여 마침내,
통일을.
그래서 수행도 정신적 노동이라면 밥값이 되겠다.
그래서 공부도 정신적 노동이라면 밥값이 되겠다.
그래서 성직자도 정신적 노동이라면 밥값이 되겠다.
그래서 일체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에서 제 밥값을 하고 있는가 살필 일이다. 그러나 얼마만큼 진실되게 육체적·정신척 노동을 했으며, 그에 합당한-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자리의-댓가를 얻었고, 얻을 만큼의 노동의 대가를 치뤘느냐가 문제이다. 말하자면 터럭끝만큼이라도 착취를 해서는 안된다. 사기를 쳐서는 안된다. 음모,살상,중상,모략질을 해서는 안된다. 장물아비가 되어서는 안된다. 걸고 넘어져서는 안된다. 등치고 배 쓸어줘서는 안된다. 병주고 약줘서는 안된다.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밀어서는 안된다.
이웃이 세끼 먹을 적에 나는 네끼, 다섯끼를 먹어서는 아니된다. 이웃이 하나를 가졌는데 나는 거기에 열배 백배 천배를 가져서는 말이 안된다. 요컨대, 내가 가진 만큼 그만큼 이웃이 덜 가지게 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자기의 꼬락서니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물질(자원, 재화 등등)이든, 정신(문화,권력, 권리 등등)이든, 좌우지간 함께 더불어 누리고 즐기고먹고 싸야지, 부당하게 소유·분배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검소한 생활, 소박한 생활이 아니라면, 착취·수탈의 생활이요, 착취·수탈의 생활은 반(反)민중적이요, 반민중은 죄악의 삶이다. 그래서 착취 ·수탈은 그대로 ‘죽임’이다. 왜냐하면 생명을 살리는 밥(자원, 재화)을 뺏음은, 생명을 살리는 정신(사상, 권리, 인권, 자유)을 뺏음은, 곧 죽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여실(如實)히 현실을 바로 보고(八正道) 그 정체를 파악하여 그 구조적 모순에 대처해 나아갈 것을 가르치셨다. 즉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사는 것으로서의 깨어 있는 민중적 삶을 말함이다. 그래서 일체의 것에서 그 고정적 실체성을 부정함은 자기라는 것을 소유(그 실체성으로서의 있음, 존재로 파악)해서도 안됨은 물론, 그 없음(非有, 非所有)이 실로 또한 없음이니, 그 〈없음〉을〈못박아서〉도 안되며, 그런고로 그 어떤 〈없음〉이나〈있음〉을 실체화하여 〈소유〉해서도 안되고, 또한 할 수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얻을 바 없는 소식을 알아차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있음〉과 〈없음〉을, 소유와 분배를 동시에 뛰어넘어 실로 있음이 〈있음〉이 아니요, 〈없음〉이 없음이 아닌, 다시 말해서 얻을 바 없는 소식이 실로 얻을 바 없는 소식(本來無一物)으로써(以) 얻을 바 없는 소식을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얻을 바 있는 소식으론 잘못 인도되어 제자신은 물론 이웃의 발에도 족쇄를 채우는, 실로 멍청한 짓거리를 범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제꾀에 제가 넘어가더라는 말에 합당하다 하겠다.
제꾀에 제가 넘어가지 아니하고, 남도 점기지 아니하고, 그러지 아니하고, 본연(本然)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겠는데, 그렇다면, 자기(自己)란 무엇이냐?
자기라고 한정하고, 개념화하고, 규정하는 그 어떤 것도없이, 무아(無我)인 자기(自己)를 〈자기〉로 하는 자아실현(自我實現), 자아구현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내외적(內外的) 제 조건을 넘어서 순수한 활동영역을 실현해야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축소, 왜소, 침소봉대시키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규정 내지는 한정시키는, 그 어떤 작업도 본래의 자기와는 멀다.
한 생각도 붙들린 바 없고, 가진 바 없고, 나눠준 바 없는 열림, 자유, 해방 그것이어야 한다.
자기 지신을 지배하는 어떠한 제삼의 생각도, 힘도, 물질도 인정하거나 용인하여서는 안된다.
자기 속에 입력된 노예근성, 예속성, 제국주의 근성, 이데올로기성, 헤게모니성, 매판정 문화, 종교, 내지 사상성을 척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이제까지 자기라고 믿어 왔던 다둑거려 왔던, 비위맞춰 왔던 저 잘못 날조된, 옹골차게 고수해 왔던 자아관념(自我觀念)올 혁파해야 한다. 싹 쓸어내어 버려야 한다. 텅 비워내야 한다.
요컨대 이제까지 자기의 것이라고 믿어왔던 잘못 날조된 욕망과, 지식과, 깨달음과, 소식과, 자리매김과, 자기위안과, 자존의 성을, 비굴의 성을, 안일의 성을, 선정삼매의 성을, 어부지리의 성을, 헤게모니적 영웅의 성을, 보수적 권위의 성을, 상하판 어간의 성을, 좌우지간 헤아릴 수 없이 수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 같이 많은, 그러한 기득권 고수화의 성을, 그러한 반무상적(反無常的) 반(反)민중적 성을, 가차없이 까부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어떤 자기를 위한 사탕발림의 유혹으로부터라도 단호히 떨쳐 일어나 제삼의 내외적 제국주의 산물화, 신식민지적 기지화의 자리를 허용하는 반(反)역사적 작태를, 반(反)민중적 작태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의 구조적 모순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윤을 따지는 자본주의적 소유관은 탐욕과 투쟁을 부채질하고 많이 가짐으로써 권력과 행복과 지위가 높아지고 명문 대가집 자손이 되는 양 잘못 유도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소유관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하고 잘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곧 성공이요, 출세로서 세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뿐더러 그런 소유자로 하여금 세상에 난보람 한다는 황당무계한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진실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천하를 울리는 부자·권력자라도 오리무중에 빠지고 만다. 다시 말하지만, 깨어 있는 민중적 삶이 아니라면, 그 삶은 진실도 뭣도 행복도 아니다. 진실이 아니라면? 그렇다. 최악일 뿐이다.
지지리 못나고 못 배우고 못 생겨서 못 가진자는, 그러므로 잘나고 잘 배워서 많이 가진자에게 불리워 시킴을 받는것으로만으로도 황송하고 감개가 무량해서 넙죽 절하고 파리처럼 두 손을 싹싹 비는 것으로 겨우 제 모가지를 연명하게 된다.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귀결인 양 많이 가진자의 풍채는 위풍이 당당하고 너무도 당당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들먹거리며 점잖을 빼고, 능청을 떨고, 어깨에 힘을 줘가며 〈아랫것들〉을 제 발톱에 때만큼도 여기지 않게 된다. 어찌 다 똑같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와서 처지가 이다지도 하늘과 땅 차이란 말인가. 인류사 이래 이제까지의 반인간적 고식된 사상으로서의 노예사상이 아닐 수 없는 이같은 세계관, 소유관은 뭇삶 위에 짓밟아 군림하여 왔으니, 지배자로 하여금 어처구니 없는 자만과 잔인성을 갖게 하고, 피지배자로 하여금 비굴한 노예근성을 제 운명인 양 체념하도록, 찍소리 말고 넙죽 받아 먹도록 하였으니, 인간사 모든 게제 업이요, 제 복이요, 제 팔자소관이요, 제 못나서 그렇게되는 양 오도하였던 것이다. 눈가리고 아웅했던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독점 소유가 낳은 아전인수격의 지배논리와, 〈아랫것들〉의 체념적 노예근성이 합창되어 온갖 유언비어 독소 조항을 날조해 왔던, 작금의 우리의 비극적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와 분배의 불평등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들어와서 더욱 그 악마적 독소 조항을 발휘하여 세상의 온갖 반인간적 작태를 연출하였으니, 가난은 째지게 가난해지고, 부자는 배터지게 부유해져 세상을 참담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무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민중적 삶이 아니라면, 〈소유〉는 부자와 가난을 낳고, 계급을 낳고, 권력과 노예를 낳고, 마침내 ‘죽임’을 낳는다. 〈소유〉는 그것이 분배를 앞세운, 나누어 줌을 배태한, 나누어 주고 있는 현재진행형 속의 어느 시공간에 임시 머물러 있음, 흘러가고 있음, 나눠지고 있음을 통하여 그나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