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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설법(無情說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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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경현 1987년 08월 66호
중생이란 가슴마다 제 모양대로 한(恨)을 품고, 그 한을 아끼고 부퉁켜 안아 끝내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고 난 배워 왔다. 중생은 슬픈 존재이며 슬픔을 잊기 위하여 더욱 슬픈 일을 저질러야 하는 쳇바퀴 속의 삶, 그것이 윤회라는 주장도 들어왔다.
지치지 않고 목적을 향해 치닫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 뒤에 뒤따르는 무상감. 허함을 느낄수록 엄청난 일을 하고 마침내는 고무풍선 터지듯 마무리짓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의 한 속성인지도 모른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단어가 딱이 들어맞을 만큼 삶의 현장은 괴로움의 바다이며 부끄러움의 산실인 셈이다. 고통과 미움과 욕망으로 가득 찬.
온통 저마다 의롭다고 자부한다. 그러한 연유로 마음을 비웠다 한다. 제 스스로의 방향 설정도 없이 따라오라고 한다. 하여 이끄는 이나 뒤쫓는 이나 불안 속을 헤매기는 매일반이다.
하나의 결과가 존재함에는 무수한 원인들의 총체적 작용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원인이나 결과는 일대일로 대용한다는 도식적 설명만이 판을 치고 있다. 이야기를 듣노라면 문제가 명확해지고 과제가 제시되건만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말의 미진함은 떨칠 수 없다. 진실과 비슷해 보이는데 진실은 아닌 것들(似而非)뿐인 듯하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면(一徵廛中含十方)삶의 장이란 한티 끌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국가, 세계, 나아가 우주까지도 개인의 구성 논리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전체를 위하여 개인은 희생하라는 논리가 버젓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물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사람들은 포장을 한다. 내용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못한 사림들은 겉포장에 현혹되며 본질을 보지 못한다. 하여 경에서는 형상으로 나를 구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 자는 잘못된 도를 행하는 자이며 부처님을 뵈올 수 없다고 하였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포장된 물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실체인즉,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감싸여진 보배 덩어리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그토록 아끼고 집착하는 이 더러움의 옷을 벗기기만 하면, 놓아 버리기만 하면(放下着) 청정무구한 광명의 덩어리라는 중생의 실체는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으로 구성된 사회 전체는 부처님의 깨끗한 나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늘날 난무하는 세태는 더러움의 때를 벗기기는커녕 더러운 옷에 집착하여 허물을 하나 더 입히고 있지 않은지…
순간의 교육으로 인간이 개조될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진 이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은 사람을 개조시키기보다 사림들에게 사기를 칠 뿐이다. 짧은 기간 동안 대중들을 속이고 움직여 얻은 획득물을 가지고 싶은 이들이 단기간의 교육을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한편에서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수행만이 진정한 내면의 평화의 근거를 제시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을 세간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모인 곳은 그러한 것을 벗어난 출세간이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이다. 자신들의 본능과 생활양태, 질서가 세속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데 그것을 출세간이라고 하다니, 그렇다면 그들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며, 규율없는 상태에서 구름보고 달보고 공기 마시며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인가.
스스로를 얽어매는 원칙들이 세간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으며 다르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논리 속에 잠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만한 우월의식과 무지의 덩어리가 아닐까…
초월적인 수행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중생을 구현할 수있을까. 그 논리에는 시대착오의 망상이 잠재해 있다. 피해를 보상받고자 하는 보상심리가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남들은 모두 돌아서 가게 하고 자기 자신은 혼자 몰래 지름길을 달려서 과시하고 싶은 의식, “눈들이 세상을 보니 사람다운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지나 삼백주에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식의 화두, 구름잡는 식의 화두, 그 심오함이 가리키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폐해는 또 어떻게 하랴. 다인의 노력 속에서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자의 고충을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찾는 사람들이 많을까. 무엇을 그리도 애절하게 원하고 있을까. 모두들 비장의 보배를 찾아서 그것으로 무림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심에 가득 찬 무협소설의 주인공에 되려고 하는 것만 같다. 그 한수를 배우기 위해서 산을 찾고 숨어 있는 스승을 찾고 책을 찾고 영험있다는 부처님을 찾아 산으로 골짜기로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다.
산천초목의 법문을 들으라고 하였다. 본연의 모습과 처연한 외로움과 참혹한 갈등 구조를 편견없이 직시하고 그것 앞에 스스로의 몸을 그대로 던지라고 하였다. 산사에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 본연의 외로움, 본연의 고와 더불어 함께 딩굴고 있는 삶의 원형. 수행자의 뒷모습 속에 깃들어 있는 그 처절한 외로움이 물소리 바람소리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 하여 산사는 모든 것의 고향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산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두들 깜냥 따라 무엇을 얻어가는 듯하지만 결국 가져가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일뿐, 스스로의 쳇바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이들을 바라볼 뿐이다.
산에 절이 있는 사실 하나로도 인간은 자신의 구도에 과감히 부딪쳐야 한다는 용기와 자세를 바람소리 물소리를 통해익힌다. 어디 법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