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홍 / 원효종 종정 · 금수사
칠십여 년 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안거를 날 때의 일이다.
나는 그 때 풋풋한 열다섯의 행자로 주지스님인 운학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유점사에 강원은 없었고 동국선원에 스물다섯 분이 결제에 들어가 있었다. 효봉 스님이 입승을 보고 계셨고 그 밖에 청담 스님, 고암 스님, 보성 스님 등이 주석하며 정진을 하고 있었다. 1930년 겨울 금강산 유점사의 풍경은 그랬다.
그 때 내가 운학 스님의 찬상을 봐가지고 들어가면 스님께선 ‘반찬 잘 만들어 입승스님께 갖다 드려라’ 그러시곤 했다. 운학 스님께서 지금 살아 계시면 세수 백세가 되셨을 터인데, 스님의 입승스님에 대한 예우가 각별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효봉 스님께 찻상을 올리고 탁자 옆에 앉아 ‘그만 찻상 물려라’ 하는 말씀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간 벼르고 별렀던 말씀을 드렸다.
“스님, 저도 이번 용맹정진에 참여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제 끝무렵에 하는 용맹정진은 칠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하는 가행정진이다.
대중 스님들의 참선하는 모습을 보면서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행자인 주제에 언감생심 말씀을 드려 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께서 어이없다는 듯 그러셨다.
“이 놈아, 애들이 무슨 용맹정진이냐.”
그쯤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벼르고 별러 말씀드렸던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불쑥 이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용맹정진에 무슨 애들이 있고 어른이 있습니까.”
“야, 이 놈 봐라.”
열다섯 어린 행자의 당돌한 말에 입승스님께서 허허 웃으시며 물었다.
“그럼, 한 번 해 볼 테냐.”
“예.”
“그럼 대중 스님들의 허락을 받아 오너라.”
그렇게 해서 행자인 나는 감히 그해 겨울 칠일용맹정진에 참여하여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비록 하판이었으나 아홉 살에 출가하여 실로 여섯 해 만에 기라성 같은 수행자들 틈에 앉아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되었다.
내 나이 아홉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께선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호압사에 데리고 갔다. 그길로 그렇게 한평생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요즘 출가인들은 자칫 의식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노승은 의식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출가자로서의 가치관이 올바로 서질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식은 수행자가 지녀야 할 위의를 돈독히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의식을 치를 때 그것을 잘 집전하지 못한다면 수행자로서의 위의가 서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개운사에 계시던 우운雨雲, 완월玩月, 범호凡虎 세 스님께 상주권공, 영산작법 등 의식을 배우고 범패를 익혔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장엄하고도 환희롭게 고하노라면 수행자로서의 위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환희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의식 배우는 것을 마치고 서울 법륜사 대륜 스님 인도하에 운학 스님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유점사로 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해 보고 싶었던 용맹정진이라는 것이 말이 그렇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고요히 앉아 선정에 든 스님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저기에 평생 내가 찾아야 할 보물이 있으리라 생각해 왔건만 막상 해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50분 좌선을 하고 10분을 쉬었는데, 쉬는 시간엔 포행을 하거나 뒷간에 볼일을 보러 가곤 했다. 그리곤 정진 또 정진이었다.
다른 것은 다 견딜 만했는데 여름날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잠을 참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용맹정진을 시작한 지 삼사일 후였을 것이다. 밤 12시에 간식을 먹고 30분쯤 쉬었다가 다시 정진을 시작하고 새벽 두시쯤 되었을 무렵 포행을 하다가 그만 내가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만 것이었다.
어찌나 졸렸던지 비몽사몽 잠결에 지대방 문지방에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순간 졸음이 싹 달아나며 속절없이 쏟아져내린 오줌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서 있을 때 인례引禮 스님의 꾸중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놈아, 여기가 어딘데 오줌을 싸.”
어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겠는가. 선방의 상판, 하판을 가리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찾아드는 불청객이 졸음 아닌가. 내 오줌 사건으로 그 날은 모든 대중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진했으나 반갑잖은 손님은 그 후에도 대중스님들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스님들이 하도 정신없이 졸면 효봉 스님께서 나를 건너다보고 그러셨다.
“애, 법홍아. 너 오줌 한 번 더 싸야겠다.”
그럴 때면 좌중은 늘 웃음바다가 되었고 잠시나마 잠을 깰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말이다. 평생 잊지못할 추억을 남기고 행자시절은 그렇게 끝났다. 내가 스무 살 되던 해 마흔다섯이던 내 아버님이 유점사에 와 삭발하고 출가하여 내 은사스님의 사제가 되었으니,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지만 유점사는 이래저래 추억 많은 곳이다. 사미계를 받으며 수행자의 꿈을 키웠던 그 곳에 살아 생전에 한번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행자시절은 본격적인 구도자가 되기 위한 연습의 시간들이다. 무슨 일이든 연습을 제대로 충실히 해야 틀이 잘 짜이고 성취하게 되어 있다. 연습을 소홀히 하면 올바른 그릇을 이룰 수 없다. 성공적인 삶은 성실한 연습과 비례하는 것이 인간사 이치다.
행자시절은 수행자로서의 틀이 짜여지는 시기다. 한 번 짜여진 틀은 바꾸기 어려운 법, 해서 행자시절에 무엇을 어떻게 익혔느냐가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내가 행자시절을 보낼 땐 어른스님들께서 한결같이 그러시곤 했다.
“나무 패고 불 때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면 안 된다. 너희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은 조사 되고 부처 되는 길이다.”때로 행자들이 심부름을 하다 도망이라도 치는 날이면 스님들께서 우리 행자들을 불러 앉혀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씀들을 한치 의심없이 믿고 행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의 금강산 눈구덩이 속에서 장작을 팰 때도, 시린 물에 빨래를 할 때도 모든 것이 조사가 되고 부처가 되는 길임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열다섯에 견고히 했던 그러한 믿음은 나이 구십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한평생 그러한 생각을 견지해 왔고 노력했다. 그랬기에 언제 어느 곳에 있어도 찬 잘 만들고 국 잘 끓이고 밥 잘하고,의식 잘하며 한평생을 수행정진으로 일관한 중으로 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행자시절은 스님들의 그러한 말씀을 의심없이 믿고 이해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내 나이 지금 여든일곱.
내일 모레 아흔을 앞두고 아홉살에서 열다섯까지 보냈던 행자시절을 돌아보려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해방이 되고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해인사에서 효봉 스님을 모시고 원주를 살면서 불바다가 될 뻔했던 해인사를 목숨 걸고 지킨 일, 인민군 총부리 앞에 있던, 지금 송광사 방장스님인 보성 스님 등을 구해낸 일들, 그리고 그 뒤 일본에 가서 공부하며 가행 정진했던 시간들, 그리고 묵담 노스님께 율맥을 전해 받았던 일.
출가수행자의 길에서 이 늙은이는 무엇을 보았고 이루었던가.
겨울 바람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