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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원타스님 - 성철선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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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2002년 01월 239호
스승만한 제자는 없다 하였다. 대大자유인, 보살을 뵙고서도 보살인 줄 알지 못했다. 풀밭에서 낚시하기, 또는 민바늘 낚시질. 이 부족한 제자 원타는 성철 은사스님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산문에 든 지 29년, 그간의 삶은 겉 모습으로나마 좌복 위에서 생사를 해결해 보려는 일을 마루(宗)로 삼은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분의 간곡하고도 추상 같던 경책을 만분의 일이라도 떠받든 것이었는지, 원타 스님은 오늘 그저 무안하다.
복과 지혜를 갖추었던 분,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난 성철 은사스님은 아이적부터 별달랐더라 했다. 과수원에 열린 과일을 지키거나 다 익은 논에 날아드는 새를 쫓는 일을 시키면 삿갓을 쓰고 앉아 저를 찾는 일에 빠지기가 일쑤였더라 했다. 왜 화두가 성성히 들리지 않는지, 당신이 겪어 보지 못했으니, 그 문제에 관한 한 후학들의 어려움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출가 전에 유발有髮의 몸으로 대원사 탑전에서 정진하다가, 42일 만에 동정일여에 들었었다. 원타 스님이 성철 스님을 뵈온 것은 1973년. 그 무렵에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한 사문들은, 그 분이 존숭한 임제와 덕산과 운문의 격한 선풍을 고스란히 겪어 내야 했을 터였다. 1967년에 성철 스님이 조계종 첫 총림인 해인사의 초대 방장이 된 이후의 삶 가운데서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살림살이에다 힘있는 초임 시절이었던 것이다. 같은 경상도 사람도 알아듣지 못할 심한 사투리에, 법문을 하면 그 말이 얼마나 빠르던지 ‘앞엣말보다 뒤엣말이 먼저 튀어나오려고 다투는 듯’했으며, 귀쌈은 물론이고, 잘못된 일에는 벗고 있던 신발을 벗어 등짝을 내리치는 불 같은 성정!
이었다. 퇴설당 선방은 큰스님이 직접 경책을 돌았으니, 수시로 떨어지는 벼락 같은 할과 방으로 혼침에 들 겨를이 없었다. 성철 스님은 드리우고 있던 낚싯대를 시도 때도 없이 잡아채었다!원타 스님이 백련암을 찾은 것은 가톨릭계 고등학교 졸업을 두어 달 앞둔 겨울이었다. 그 분은 수사의 소개장을 가슴에 품고 찾아온 그에게 물었다. 찬물에 손 담가서 밥도 해야 하고, 나무 하고 불 때고 뒷간도 퍼야 한다. 그래도 중 노릇 하겠느냐. 원타 스님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다 압니더. 그런 것도 모르고 머리 깎으로 왔겠심니꺼. 내지르듯 대답하는 그를 보고 큰스님은 빙긋이 웃으셨다. 뒤에 들으니 ‘이상한 놈’이라고 하셨다 한다. 칭찬인지, 비난인지. 1년 행자 노릇 끝에 또 1년을 큰스님 시봉을 했다.
혼자 떠나 길을 걸어야 하는 구도의 길, 교괴敎壞라, 산중의 법도는 그 길을 가리킬 때 자상한 법이 없다. 백련암에서 보낸 행자 시절, 그 날은 관음전 도배를 하는 날이었다. “원타야, 풀칠할 도배지 깔 것 좀 가져 오너라.” 큰스님이 염두에 둔 것은 백련암에 참배객들이 밀릴 때 마룻바닥을 더럽히지 말라고 덧깔던, 장판지 석 장 크기의 비닐 장판이었다. 그 노릇도 모르고 그는 무심코 묵은 신문지 뭉치를 찾아 들고 갔다. 그 때 야단 맞은 일을 그는 오늘까지 못 잊는다. 묻은 풀만 닦아 내면 다시 말짱해지는 비닐 장판과는 달리, 풀 묻은 종이는 불쏘시개감 말고는 용처가 없으니, 몸에 밴 성철 스님의 근검 절약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직절直截히 해답(本源)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수좌의 공부 방법이 아니었다. 큰스님은 “비닐을 가져 오라”고 하시는 법이 없었다.
어느 봄날에는 꽃나무를 옮기려고 땅을 파는 행자에게 이렇게 일렀다. “땅 파면서 그 밑에 뭐가 있나 살피면서 조심조심 파그래이.” 열심히 땅을 파던 행자의 괭이 끝에 까만 물체가 걸려 나왔다. “그 시커먼 기 뭐꼬? 삽으로 한 번 콱 찍어 봐라.” 행자는 큰스님 말씀대로 삽으로 콱 찍었다.(《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중, 원택) 민바늘 낚싯줄에 또 걸렸다! 성철 스님은 조심해서 땅을 파라고만 할 뿐, 그 곳에 아래쪽 화장실로 내려가는 전깃줄이 묻혀 있다고 일러 주시는 법이 없었다.
백련암 초입에 계곡 물이 흘러넘쳐 고인 물 웅덩이에는, 흙 묻은 것, 또는 옮겨 밴 물을 우려 빼야 할 비닐을 담가 두곤 했던 곳이다. 이틀사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가 두었다가 참 혼도 많이 났다. 생사를 해결하는 일, 다시는 윤회의 길에 드는 일이 없어지는 해탈의 길, 멀고 또 먼 길이니 일각도 미루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것이 성철 스님의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백련암 대중이 여덟도 되고 열도 되던 때, 큰스님과 함께 오분향례와 능엄주와 발원문을 외는 일로 아침을 열고, 또한 백팔배를 올리며 공덕을 찬양하고 未?발원의 각오를 되새김으로써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하였다. 그 옛날 큰스님이 ‘부처님의 법대로만 살자’고 외치며 봉암사에서 실천해 보였던 선가의 전통 그대로였다.

지난(2001) 여름 결제 직전에 원타 스님은 주지 소임을 맡고 이 곳 봉암사로 왔다. 천 년의 개산 역사도 역사려니와, 나라 안 유일한 종립 선원으로서, 속인의 발길이 와 닿는 법이 없는 청정 수행 도량인 이 곳의 대중을 외호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선원과 강원과 율원을 함께 갖춘 총림은 회통 불교의 뜻을 살리는 의미 있는 체제이기는 하나, 선방 단일 체제인 이 곳은 조계종의 종지가 되는 간화선의 본격 수호 현장이라는 점에서 총림에 견줄 수 없는 자긍심으로 가득 찬 곳이다. 지난 산철에도 60여 대중이 한 달 동안 14시간 가행加行 정진을 했거니와, 결제 때마다 80~100명 대중이 태고선원에 앉아 공부를 짓는다. 선원장인 정광 스님을 비롯하여, 설정, 함주 등 이력과 법랍이 만만찮은 60대의 어른들에서부터 강원을 갓 졸업한 초참에 이르기까지, 노소를 막론하고 공부 한마음뿐인 도량이다. 주지로 소임 맡았으니, 일구어 낼 일에 대한 각오가 없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원타 스님은 ‘그저 평대중으로 함께 좌복 위에 앉을 마음뿐’이라 했다. 지난 산철에도 소임자로서 해야 할 일 없는 날이면 하루 6시간쯤 함께 정진을 했다. 사중의 일이 어?
側H?익어지게 될 겨울철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면, 있는 일도 줄여서 8시간쯤은 앉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진, 소임자로서 노릇할 바 있다면 그가 바탕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희양산 봉암사.
‘청납(수행자)의 거처가 아니면 황건(도적)의 소굴이 될 만큼’ 기가 센 곳, 지증 대사는 이 곳에 두꺼비 기와 네 개를 기둥으로 세우고 철불 두 분을 조성하여 그 험한 지세를 다스렸다. 지증을 비롯한 정진긍양, 태고보우, 함허득통, 환적의천의 유향이 깃든 곳, 그리고 근세에 이르러 성철 은사스님이 큰 족적을 남기신 곳이다. 1947년부터 3년 동안 성철 스님의 주도로 ‘봉암사 결사’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청담, 향곡, 자운, 월산, 우봉, 보문, 성수, 도우, 혜암, 법전 스님 등이 동참하고, 이후 조계종의 재건 및 운용에 정신사적 기초 역할을 하게 되는 이 결사의 근본 목표는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었다. 결사 공동체의 목적과 구체적 생활 규범이 ‘공주共住 규약’으로 제시되었다. “(억불기와 일제 강점기를 지나온 동안) 교단의 현황은 불조 교법이 실낱 같았으니, 이를 복구시켜 보자는 것이 주안점이었다.”(성철) “삼엄한 부처의 계법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은 근수勤修 역행力行하여 구경 대과의 원만한 속성速成을 기약함”을 목적으로 삼고,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의 교칙敎勅 이외의 각자 사견을 절대 배제?
권求?결사 공동체의 생활 규범은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할 만했다. 재齋를 끊는 대신 탁발과 자급자족을 하게 했다. 목발우 대신 쇠와 옹기로 된 발우를 쓰게 했으며, 검은 장삼이나 비단 가사 대신에 괴색壞色의 면이나 삼베로써 보조 스님의 장삼을 본떠 지어 입었다. 율장에 적힌 대로 아침에는 죽을 먹고, 낮에는 밥을 먹었다.
임제가풍을 좇아 아침에는 능엄주를 외고, 저녁에는 참회 의례를 지켰다. 한 달에 두 번 포살도 하게 했다. 뒷간 갈 때나 울력 때나 잠 잘 때 말고는 장삼을 갖춰 입어야 했고, 정해진 시간 외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밥해 먹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나무하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밭 매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일체 삯꾼, 일꾼은 안 된단 말입니다. 이것이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청규, 근본 정신이니까. 그래서 부목負木도 나가라, 공양주도 나가라, 전부 내보내고 우리가 다 했습니다. 쉬운 것 같지만 실제는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성철)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부를 못 들여 야단이었지요. 처음 얼마 동안은 한 7, 8명밖에 살지 않았습니다. 점점 그 수가 늘어나서 20명이 30명이 되고, 나중에는 많이 살았습니다.”(혜암)근세 이후 스님에게 절을 세 번 하는 것도 이 결사체가 되살린 예법이었다. 그리고 신도들은 보살계를 수지하게 된다.
봉암사 결사는 육이오전쟁으로 중단되고 만다. 그러나 결사에 참여한 수좌들 대부분이 이후에 정화운동을 주도하거나 정화운동에 참여하게 되거니와, 그것이 짧고도 미완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복과 대처 등의 식민지 불교의 극복, 간화선을 기본 수행법으로 한 임제 선풍의 회복, 그리고 백장의 청규 정신 강조, 불교의 대중화 등을 부르짖음으로써, 한국 불교의 방향타로 자리잡게 된다. 성철 스님이 나이 서른여섯에 시작한 일이었다.
1912년에 태어나 속랍 82세, 법랍 59세의 나이로 입적하기까지의 성철 스님의 일생은 출가 이후 범어사, 동화사, 마하연, 대승사 등에서 안거한 기간을 ‘출가 수행기’라 본다면, ‘공동체 수행기’인 봉암사 결사 이후, 파계사 성전암에서의 장좌불와 십 년 세월은 철저한 개인 수행기이자, 현대 학문의 성과물을 다양하게 섭렵하면서 불교 대중화(현대화)를 모색한 시기이기도 했다. 해인사 초대 방장에 취임하면서 첫 안거 기간 동안 설법한 ‘백일 법문’은 그간에 지은 살림살이를 모두 꺼내 펼치는 것이었다. 불교의 근본 입장을 중도 사상으로 풀어 보인, 이후의 ‘대중 교화기’를 시작하는 첫 사자후였다.


이후로 그는 시류와는 거리를 둔 채 산중을 든든히 지켜 나갔다. 그가 쓴 정화의 방편은 외적 조건을 바꾸는 물리적 정화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 고불 고조의 말씀을 제대로 찾아 좇아야 한다는 ‘근본 정화’였다. 근본주의적 정신, 역사에서 대승 불교와 선종을 등장시킨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오십년대의 정화 운동 이후로 거의 보편화되었던 보조의 종조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한국 불교는 육조 혜능을 원조로 하는, 임제종의 법통을 잇는 태고 보우를 종조로 삼아야 함을 천명한(《한국 불교의 법맥》 1976년)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오직 돈교만을 전해 세상에 나아가 삿된 견해를 부순다”는 것이 육조의 뜻이었으니, 선종의 종지는 ‘돈오돈수’라야 했다. ‘돈오점수’에서의 깨달음이란 알음알이(知解)이니, 이것은 참된 깨달음을 이끌지 못하는 깨달음(解悟)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돈오점수’가 아닌, ‘해오점수’라 해야 옳은 일이었다.


그가 해인 총림의 방장으로 취임한 뒤로 선원과 율원과 강원으로써 총림의 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사세는 확장되고 도량이 정비되나, 방장이란 소임은 그로서는 ‘하는 수 없이 쓰게 된 고깔’이었으니 그것은 주변사일 뿐, 그의 관심사는 ‘부처가 되는 지름길인 화두 참선’이었다.
동정일여, 몽중일여를 밟아, 그리고 숙면(오매)일여에 들어야 하니, “하루에 적어도 스무 시간 이상 화두가 여여해야 비로소 공부를 조금 한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부러지고 썩어 쓸데없는 나무 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불 땔 물건도 못 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아무 쓸모없는 몹쓸 물건- 그러나 그것이 공부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대大낙오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영원한 자유를 성취한다”고 외쳤다.
“이 도적놈들아, 밥값 내 놔라!”
수시로 선방에 들이닥쳤던 ‘가야산 호랑이’가 죽비로써 불러일으킨 삼엄한 선풍이었다.
①간식하지 말고, ②돌아다니지 말고, ③말하지 말고, ④잠은 적게 자고, ⑤경전을 보지 마라.
성철 스님이 선방 수좌들에게 일렀던 다섯 가지 계율이다. 이를 ‘신수좌오계新首座五戒’라고 부른다.
성철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백련암은 아직도 당우들을 단청칠 하는 법도, 초파일날 연등을 내거는 법도 없다. 축원 카드도 없는 곳, 그러나 ‘이 적막한’ 곳에는 여전히 스님 살아 생전과 같이 삼천배 절을 하는 불자들로 붐비고, 남을 위해 기도한다.

기본 경전과 어록을 읽고 일본어 따위를 익혔다 하나, 화급히 도모해야 할 일이었기에, 원타 스님은 다시금 삼천배 절을 올리고 받은 ‘마삼근’ 화두를 품은 채 해인사 퇴설당에 첫 방부를 들였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든 불문, ‘가슴에 마구 충동이 나서’ 해제 때면 이리저리 다니곤 했던 것은 ‘병통’이었다. 출가하기 두 해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거니와, 목전에 둔 아버지의 죽음까지 온갖 미련을 끊을 계기로 챙겼을 만큼 ‘무심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오늘에까지 기억하는 일, 선방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때에 겪은 ‘별난 일’, 대둔산 태고사의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다 말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어떤 인연으로 내가 여기에까지 왔나. 사무치는 마음으로 눈물을 쏟은 일은 또 있었다. 인도로 성지 순례를 갔을 때, 영축산에서 반야심경 외고 나서 입정에 들었을 때였다. 고맙고 또 고맙구나, 내가 만난 불연이여.
그가 이 곳에 오기 직전까지 십 년 세월 동안 주지 소임을 맡아 있던 청량사도 성철 은사스님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해인사에서는 ‘남산’이라 부르고, 청량사에서는 ‘천불산’이라 부르던 산, 그 곳에 상주하고 계신 일천 분 부처를 두루 뵈옵고 넘어오시는 큰스님의 산행은 청량사에 계신 석불 참배로 끝이 나곤 했다.
“백련암 법당 축대 밑을 너거는 쳐다보지도 말아라!”산중에서 방장으로 계시는 동안 혹시나 제자 된 자들이 심중에 품을지도 모를 당찮은 생각(큰절 주지·삼직 혹은 말사주지)에 대한 경책이었다. 큰스님의 제자로서 ‘용맹심이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참선을 본분사로 하는 근본 자리만큼은 분명히 일러 주신 분, 원타 스님은 평대중의 각오로 오늘 여기 봉암사에 와 있다.
수행 환경을 제대로 지켜 주는 일, 대중을 외호하는 일을 한 마디로 이르면 그렇게 될 터였다. 그가 힘써야 할 일 가운데서도, ‘개발’의 이름으로 위협받고 있는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목전의 현안이다. 온천과 스키장 등, 절 가까이에 이루어지려던 리조트 단지 건설 계획은 어지간히 정리가 되었다고는 하나, 희양산 뒤편으로 이어지는 괴산군 연풍면으로 몰려드는 등산객 및 관광객들의 발길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오늘의 봉암사는 이 곳을 속리산 관광단지 속에 묶으려는 계획에 맞서 82년에 자진해서 산문 폐쇄를 결정한 뒤로 자연 생태계는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지난 여름에 확인한 일, 60명 대중이 함께 감자를 캐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그 옆에 있는 드넓은 호박밭 덤불 아래서 노루가 뛰쳐 나와 달아났던 것이다. 뿌린 씨가 싹 튀운 부드러운 새잎을 절단 내는 것이 바로 저 놈들 짓이었구나!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골골이 사는 수많은 다람쥐도 모두가 한식구. 그것은 자신뿐만이 아닌 온 대중 모두의 생각이라고 했다.
봉암사가 보유하고 있는 경내지는 2,300정보, 그러나 거의 모두가 산인데다가 골짜기 안과 개울 주변 등, 예전에 농사를 짓던 곳도 묵정밭이 되어 버린 곳이 많다. 그러나 양식까지는 그러지 못하지만 지금도 어지간한 소채는 울력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도량의 풀베기는 물론이고, 정진 삼아 하루 한 짐씩 나무를 하는 분도 있을 만큼 울력에 대한 대중의 의식은 호의적이다. 좌복 위에 앉는 시간을 길게 잡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좀더 본격적인 생산 활동을 도모함으로써, 선농불이禪農不二의 전통을 되살리는 수행지로 가꿔 나가기, 대중의 공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가 속마음에 품어 보는 것은 그런 것이다. 승가가 오늘에 회복해야 할 백장 정신이자, 그 옛날에 성철 은사스님이 이 곳에서 몸으로 펼쳐 보였던 뜻있는 결사 내용이었다.□

대담/원철
조병활(불교신문기자)
정리/김영옥
사진/홍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