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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곳, 가을 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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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만우(시인) 1997년 11월 189호
가을은 일체가 화두話頭다.
꽃으로 잎으로 중중重重무진하게 펼쳐진 세계를 하나의 열매로 갈무리한다. 열매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다함이 없는 생명의 호흡이 무념으로 응축돼 있다.
꽃으로 연 세상을 열매로 닫을 때, 그 맺힘에는 진정 깨어져야 생명을 얻는 화두처럼 새롭게 열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봉인하고 있다. 그 열매가 터져 펼칠 세계 순예단을 용납하지 않는다.
화두를 침구하면서 화두가 깨어진 세계에 대한 상상을 불허하듯 열매가 담고 있는 무한한 작용은 일체의 생명과 속 닿을 때 비로소 그 실상을 드러내 보인다. 열매 하나에는 지연의 묘용이 물려야 살아나는 화두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힘을 통해 그 세계를 엿보고자 한다면 그 즉시 생명을 거둬 버린다.
열매를 깨뜨린다고 그 속에 꽃과 잎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호흡이 함께 무심일 때 비로소 마음을 움직여 꽃으로 잎으로 피어난다. 그러므로 꽃은 열매의 그림자이며 열매는 바람과 물과 햇살 등 수많은 묘용속에서 세계성과 상相을 획득한다.
삼라만상에 대한 가없는 의심을 하나로 모아 놓은 것이 화두이듯 가을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의심 덩어리다.
숲이 물듦도, 숲을 비워냄도 마찬가지다. 열매처럼 단단한 생명의 비밀이 화두로 지리하고 있다. 때문에 가을을 갈대 같은 언어로 바라보는 일은 부질없는 정진이다. 언어의 도가 끊어진 자리에서 만나야 할 일이다. 그래서 가을 풍경은 언제나 말과 글을 부끄럽게 한다.
가을하늘, 가을산, 가을물, 달 어떤 물상을 접하더라도 그것을 형용할 말은 늘 부끄럽다. 굳이 표현하자면 느낌일 뿐, 그 느낌이 단풍잎처럼 차츰 퇴색되고 난 뒤에 말은 나타난다. 봄이라는 계절이 언어가 풍경을 이끌고 간다면 가을은 풍경이 언어를 압도한다. 봄을 지칭하는 어떤 말을 떠올리더라도 풍경과 함께 떠오르지만 가을은 풍경이 사라지고 닫혀야만 비로소 말이 뒤따른다.
때문에 가을은 어떤 형태의 글보다 시詩의 형식을 빌어 선禪의 세계를 노래한 글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오심사추월吳心似秋月, 임운조무방任運照無方. 만상영현중方像影現中, 교광독로성交光獨露成.
나의 마음이 가을 달과 같아, 어느 곳이나 마음대로 비춘다.
온갖 모양 그림자 속에 밝은 광명이 홀로 드러나 있다.”
고려말, 당대의 대선사였던 백운경한白雲景閔스님은 가을의 달을 끌어들여 자신이 노니는 자유로운 경계를 이렇게 읊으셨다. 자신의 마음자리를 표현함에 있어 고인들은 가을 달, 가을 물 등 가을의 모습을 즐겨 사용했다. 밝음을 쓰고자 했을 때는 가을 달을 불렀고 맑음을 쓰고자 했을 때는 가을 물을 즐겨 사용했다. “노립로회추수명鷺立盧花秋水明. 해오라비 갈꽃에 앉으니 가을 물이 맑다.”
사계절 같은 달, 산, 물이지만 맑음과 밝음에 있어 가장 본연의 모습을 내보이는 가을의 풍경은 사람보다 산, 물 등 주변 풍경이 더 위대한 법문자다. 가을의 산사는 이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최적의 곳이다. 도인의 법문이 아닌 도량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누천 년 동안 산빛과 함께 생명의 살림을 이어온 산사는 이 때쯤이면 어떤 최고의 수행방편문보다 우리 마음을 무심, 무곡의 상태로 이끌고 간다. 붉은 빛과 푸른 빛이 어우려져 온 산하를 화려한 단청의 법당으로 꾸미고 마침내 그 빛을 떨구어 고요한 무심으로 정좌케 한다.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서 운수 납자가 아니고, 구름이 되고 물이 되어 운수 납자이게 한다.
봄빛이 끝없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면 가을빛은 모든 생각을 일순에 잠재운다. 그것은 풍경이 언어를 잠재우기 때문이다. 바라봄, 서성거림 그리고 되돌아옴, 그것뿐이다.
가을빛은 때로 이 세계의 사바성과 존재의 범부성을 망각하게 한다. 풍경뒤에 언어가 서 있기 때문에 분별하는 일체의 사념을 무화無化시켜 버리고 산이 되고 구름이 되고 달이 되라 한다. 비록 속바꿈은 아니지만 가장 깊게 우리를 탈바꿈하게 하는 것이 가을빛이다.
내가 살고 있는 장춘사長春寺는 뜻은 늘 봄이지만 가을의 풍광 또한 봄에 뒤서지 않는다. 유명한 산이나 절에 비유해서 풍경을 나눈다면 가물거릴지 몰라도 가을의 엄정함과 화두정을 느끼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보통 스님들의 삶이 한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한 산 한 절의 사계를 다 보기란 쉽지 않다. 장춘사의 사계를 다 경험한 지금 가장 가깝게 인식되는 가을의 산사는 바로 이 곳이다.
가을은 그 화두성 때문에 경험적 인식은 가엾다. 지금 눈 앞에 펄쳐진 이 세계 밖의 것을 논한다면 풍경이 사라지고 남은 언어를 주워 정렬시키는 일 외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구월 보름날, 탑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누워 있다. 문을 열어 처마끝에 걸린 발그림자 사이로 방안 전기 불빛이 길게 탑까지 드리운다. 마당에 있는 작은 샘물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풀벌레 울음소리, 이 밤, 어떤 변화된 모습으로 나를 멍하게 하려는지….
“안타추색과강성雅拖秋色過江城, 기러기 가을빛을 끌고 강성을 지나네”가을 산사는 문이 없다. 상하 사방을 둘러봐도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 것이다. 굳이 문을 찾고 싶거든 사람에게 물을 일이 아니다. 흐르는 구름이나 물, 구르는 낙엽에게 물을 일이다. 지금 달빛을 받아 각양의 그림자를 나투고 있는 숲과 그리고 그 숲에 생을 기대고 있는 뭇 삶들에게서 문을 발견할 일이다. 그러나 풍경에의 안주만큼 비워내기 힘든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공간과 어떤 시간에 펼쳐진 풍경에 집착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경계에 몸과 마음이 고착되어 또 다른 풍경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게 된다. 경험으로 볼 때 그 거부감은 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일 따름이다. 그 두려움은 나와 남, 나와 세계를 하나로 보게 하는 자비의 눈을 멀게 한다.
신기사바身寄燮婆 심기극락心寄極樂. 몸은 사바에 있으면서 마음은 극락에 있다.
팔공산 은해사 산내암자인 기기임寄寄魔은 이 글에서 기寄 두 글자를 따서 명명했다.
가을의 산사는 사바성과 범부성을 동시에 극락화 시키기도 하지만 특정한 풍경에 이끌려 다니다 보면 몸은 극락에 있으면서 마음은 사겁에 있는 경계에 떨어지기 쉽다.
볼 줄 알 때 그저 바라볼 일이다. 정확하자는 않지만 볼 줄 알때 기을산사는 도랑道場이다. 장춘사에서 가을을 보는 것, 아직은 시간이 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