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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미륵신앙과 천년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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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엮는 한국불교사 - 정석종 1987년 08월 66호
우리나라의 미륵신앙의 전통은 꽤 오래고 끈질긴 것이라 생각된다. 사회가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일 때 미륵신앙은 예외없이 일반민중이 의지하는 바가 되었다. 고삼국시대는 물론이고 삼국쟁벌의 전쟁시와 통일신라 시대까지도 미륵신앙은 일반민중 사이에서 가장 주요한 신앙으로 되고 있었으며 후삼국 시대에도 궁예가 그 말년에 미륵불을 자칭하는 것으로 일반 민중의 환심을 사려고 한 사실들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는 터이다.
미륵신앙은 괴롭고 절망적인 현실사회를 미륵이 출현하여 평등한 이상사회로 실현시킨다는 믿음인 만큼 그것은 현실사회를 개변하려는 하층민중의 혁명적인 성향과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 한 가지 예로 고려 신종 원년 5월에 있은 만적(萬積)의 난을 들 수 있다. 개경 내의 사노(私如)들이 그들의 주인을 죽이고 최 충헌을 살해한 후 자신들이 장상이 되어 고려사회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사변이었다.
그들은 바로 미륵신앙을 그들의 이상으로 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누런 종이에 丁자를 새겨 그것으로 동지임을 표시한 것에서 그들이 미륵신앙자임이 드러났다. 황색은 미륵을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이 반적의 난은 배신자의 고발로 불발되고 말았으나 이같은 미륵신앙의 혁명적인 성향은 고려 말의 왜구의 침구와 기근이 계속되는 사회현실속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이 사료에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미륵신앙은 격심한 재해기와 난리시에는 민중 사이에서 끈질기게 신앙되고 있었으며 현실적인 질곡이 가일층 심화되면 될수록 하층 민중의 의지하는 바가 되고 있었다.
인조년간에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살인계나 숙종년간의 살주계, 검계 같은 비밀결사나 숙종 14년(1688)에 양주가 중심이 되어 서울을 쳐들어 가려 한 미륵신앙 사건이나 숙종23년(1698)의 승려들의 거사계획에도 모두 미륵신앙이 그들의 지주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영조 39년(l763)에도 무신란(戊申亂)의 후예가 해서(황해도)의 미륵신앙자와 관련된 사건 때문에 처형되고 있거니와, 이로 보더라도 미륵신앙은 영조년간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무신란은, 그로 인해 영조4년(1728)에 청주, 안성, 죽산이 함락되고 영남지방에서는 안음에서 일어나 거창 등지가 함락된 난으로서, 조선 후기 정치사에 획선을 그을 수 있는 큰 사건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문족등과기(門族登科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 난을 설명하고 있다.

무신역난(戊申逆亂) 후에는 대가(大家), 명족(名族), 문인(聞人), 현사(顯士), 달관(達官), 비위(卑位)를 막론하고 서로 이어 육몰(戮沒)하였으며 연루자가 나라 안에 편만하였다. 그리하여 수년 동안에 기상이 꺾이고 무너진 것이 겁화(劫火)가 지나가고 상전(桑田)이 벽해가 된 뒤와 같다.

영조는, 그의 재위 52년 전 기간 동안 이 무신난과 관련시킨 옥사를 계속하여, 남인과 소론을 철저히 삼제시킨다. 이같이 하여 노론들의 세력은 영조년간뿐만 아니라 정조년간에도 계속된다. 적어도 정조 12년까지는 노론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하겠다. 정조 12년부터는 남인계의 인사들을 정조 주변에 포진시켜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거니와 이때에도 노론 벽파와 정조 주변의 남인측 인사와의 사이에는 계속된 상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왕권 강화를 그 축으로 하는 남인들의, 노론에 대한 공격에 대하여 노론들은 천주교(=邪學)를 정조측근의 인사들이 신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상 논쟁을 전개하여 이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정조15년(1791)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전(六廛)이외는 난전착납(亂廛捉納)의 권리를 뺏음으로써 노론의 정치자금원을 차단하자 이해 겨울에는 호남의 사옥(邪獄)을 일으키는 것이라든가, 정조 18년의 화성(華城 : 수원) 역사가 시작되고 19년 봄에는 이 가환(李家煥), 정 약용(丁若鏞)등으로 하여금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편찬하도록하여 수원으로의 천도가 임박하고 있음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서 신부 주 문모(周文謨)를 중국으로부터 데리고 들어온지 황(池璜), 윤 유일(尹有一), 최 인길(崔仁吉) 등을 교도인 김 여삼(金如三)으로 하여금 발고케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의 이같은 사상 논쟁에 의한 노론의 남인 견제에 대하여 정조는 내심 몹시 당황하고 있었음이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하도록 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정조 20년의 일이었다.

복건(福巾)은 실제(失制)하여 주자소론(朱子所論)의 횡첩지법(橫輒之法)과 같지 않기 때문에 남인들은 복건을 쓰지 않는다. 병진(丙辰 : 正祖 20年, 1796) 겨울 상(上)께서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함께 한 조정에 있으면서 건복(巾服)의 제(制)가 다른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채 좌상(蔡左相 : 채제공), 이 가환(李家煥), 이 기양(李基讓), 정약용(丁若鏞) 네 사람이 쓰면 남인은 반드시 모두 쓸 것이니 내일 4인이 모두 입궐하고 또 복건을 쓰도록 하고 금호문(金虎門) 밖에서 벗도록 하라” 하니, 이에 4가(四家)에서는 밤가는 것을 잊고 조단(皂緞)을 샀으나 부인들이 이제는 만드는 법을 몰라서 편지를 보내 서인(西人 : 老論)의 건(巾)을 빌려서 밤새도록 봉조(縫造)하여 아침에 맞추어 대궐에 나아갔으니 역시 성세(盛世)의 일이었다.
이때에 노론(老論)은 일컬으면 반드시 선건(禪巾)이요, 소론(小論)은 일컬으면 반드시 겹건(袷巾)이었다. 내가 승정원에 도착하니 서로 다투어 물었다. 내가 웃으면서 속담에 물리려면 차라리 큰 호랑이에게 물리라고 하였다 했다. 4인이 모두 선건(禪巾)을 쓰니 노론제인(老論諸人)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洌水全書, 二十七續集八 墓誌銘秘本 茯菴墓誌銘附見聞話條)

외견상으로도 그들의 복제로 사색의 당인들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사회였으며 그들은 언어나 행동거지까지도 서로 판이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이 위 사료로도 판명된다. 그것이 조선 후기의 양반사회인 것이며 정조년간의 당색간의 상쟁도 이로써 극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님인들이 사상 논쟁으로 인한 그들의 정치적 열세를 천주교도를 통한 대박청래(大船請來)로 만회하려 했음은 ‘경술(庚戌, 正祖 14년, l790)년에 제의(諸儀)가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편소(編小)하기 때문에 신부를 숨길 수가 없으며 신부는 끝내 탄로날 것이나 만약 큰 배(大船)를 청하여 오면 일은 풀릴 수 있다’라거나 ‘신부를 데려오고 이에 서양의 큰배가 우리나라에 오는데 만약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바탕 결판을 짓도록 한다’와 같은 사료(純祖辛西推案)에서 확인된다.
또 이 대박청래는 한두 번에 그쳤던 것이 아니며 계속 교도들에 의해 중국천주교당에 요청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료(純祖辛西推案及鞫案)에 ‘갑인(甲寅, 正祖 18년, 1794)년 여름 별사행(別使行) 때에 가환(李家煥), 숭훈(李承薰)등이 다시 유일(尹有一), 지황을 중국에 치송(治送)하여 신부를 작래(繳來)토록 하고 이어 대박(大舶)을 청하였으며…일장판결(一場判決)’하려 했음을 볼 때 미루어 알 수 있다. 위의 대박청래는, 그 구체적인 모습이 황 사영 백서(黃嗣永帛書)에서 드러나거니와, 이 가환을 통하여 정조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김 여삼의 발고로 지 황, 윤 유일, 최 인길 등 3인이 포장(捕將) 조 규진(趙圭鎭)에 의하여 6월 27일에 잡혀 와서 그날밤 안으로 곤살되고 그 다음날 그들의 시체가 강에 던져진 사실로 알 수 있다. 그들은 국사범인 만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신문되었어야 마땅한 터인데 그들의 신문으로 서양 큰 선박을 청해 오도록 한 사실이 정조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에 정조의 지시로 그들이 그렇게 빨리 곤살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원성 축조 다음 해에 정조가 붕어하거니와 그것은 노론들의 사상 논쟁에서 그들 남인을 비호하던 인물이 없어진 것이므로 남인의 몰락은 필연의 세였다. 이른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남인들은 철저히 제거되는데 이때(1801년 3월 12일) 자수한 주 문모(周文謨)의 공초에서 우리는 그가 의주로부터 입국하여 서울에 들어오고 이어 전국으로 포교하고 다닌 지역이 세세히 드러나며 김 건순(金建淳)과 같은 인물들을 만난 전말이 밝히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정사(丁巳, 正祖 21년, 1797)년 가을에 김 건순을 만난 사실을 공초를 통하여 알아보자.

내가 봉교(奉敎)하기를 권하니 그는 언론 중에 내가 협객(俠客)이라고 의심하면서 나에게 교우 수십가를 모아서 해도(海島)에 들어가 임의로 행교(行敎)할 수 있음을 권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도 역시 해도에 도착하여 군기를 선(繕)하고 대함(大艦)을 작하여 감히 본국을 해할 마음은 없고 오로지 타방(他邦 : 中國)에 직도(直到)하여 선치(先恥)를 설(雪)하겠다고 하였다…나는 인하여 야소교 요리(耶鮇敎要理)를 고하니 그는 심히 기뻐하며 아침에 돌아갔다. (辛酉邪獄罪人 李基讓等推案)

바다섬에 들어가 군기를 수건하고 큰 배를 만들어 중국으로 쳐들어간다는 발상은 숙종 23년 중국에 쳐들어가 최영의 후손으로 황제를 삼도록 한다던 승려들의 거사계획시의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라고 생각되며 그것은 김 건순이 미륵신앙자인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주 문모의 야소교 요리를 들고 심히 기뻐하며 아침에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주 문모의 야소교 요리가 바로 천년왕국 사상이라고 생각케 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무기나 군함과 같은 힘에 의해 중국 대륙을 석권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하룻밤에 야소교 요리를 들고 기뻐하며 돌아간 사실은 미륵신앙의 미륵이 천년왕국의 메시아로 대체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의 미륵신앙자들은 미륵의 출현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힘이 미륵의 출현에는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터득하고 있었으며 그같은 힘을 구체적인 그들의 조직과 무력에 의지하려고 했었음도 사실이지만 일부에서는 큰 배와 대포를 가지고 있는 서양의 힘, 즉 천주교에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조선 후기 천주교의 급속한 확산을 ‘천주교의 천년왕국사상과 사상적 일치를 발견한 미륵신앙자들의 천주교도화’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