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역난(戊申逆亂) 후에는 대가(大家), 명족(名族), 문인(聞人), 현사(顯士), 달관(達官), 비위(卑位)를 막론하고 서로 이어 육몰(戮沒)하였으며 연루자가 나라 안에 편만하였다. 그리하여 수년 동안에 기상이 꺾이고 무너진 것이 겁화(劫火)가 지나가고 상전(桑田)이 벽해가 된 뒤와 같다.
영조는, 그의 재위 52년 전 기간 동안 이 무신난과 관련시킨 옥사를 계속하여, 남인과 소론을 철저히 삼제시킨다. 이같이 하여 노론들의 세력은 영조년간뿐만 아니라 정조년간에도 계속된다. 적어도 정조 12년까지는 노론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하겠다. 정조 12년부터는 남인계의 인사들을 정조 주변에 포진시켜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거니와 이때에도 노론 벽파와 정조 주변의 남인측 인사와의 사이에는 계속된 상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왕권 강화를 그 축으로 하는 남인들의, 노론에 대한 공격에 대하여 노론들은 천주교(=邪學)를 정조측근의 인사들이 신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상 논쟁을 전개하여 이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정조15년(1791)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전(六廛)이외는 난전착납(亂廛捉納)의 권리를 뺏음으로써 노론의 정치자금원을 차단하자 이해 겨울에는 호남의 사옥(邪獄)을 일으키는 것이라든가, 정조 18년의 화성(華城 : 수원) 역사가 시작되고 19년 봄에는 이 가환(李家煥), 정 약용(丁若鏞)등으로 하여금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편찬하도록하여 수원으로의 천도가 임박하고 있음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서 신부 주 문모(周文謨)를 중국으로부터 데리고 들어온지 황(池璜), 윤 유일(尹有一), 최 인길(崔仁吉) 등을 교도인 김 여삼(金如三)으로 하여금 발고케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의 이같은 사상 논쟁에 의한 노론의 남인 견제에 대하여 정조는 내심 몹시 당황하고 있었음이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하도록 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정조 20년의 일이었다.
복건(福巾)은 실제(失制)하여 주자소론(朱子所論)의 횡첩지법(橫輒之法)과 같지 않기 때문에 남인들은 복건을 쓰지 않는다. 병진(丙辰 : 正祖 20年, 1796) 겨울 상(上)께서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함께 한 조정에 있으면서 건복(巾服)의 제(制)가 다른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채 좌상(蔡左相 : 채제공), 이 가환(李家煥), 이 기양(李基讓), 정약용(丁若鏞) 네 사람이 쓰면 남인은 반드시 모두 쓸 것이니 내일 4인이 모두 입궐하고 또 복건을 쓰도록 하고 금호문(金虎門) 밖에서 벗도록 하라” 하니, 이에 4가(四家)에서는 밤가는 것을 잊고 조단(皂緞)을 샀으나 부인들이 이제는 만드는 법을 몰라서 편지를 보내 서인(西人 : 老論)의 건(巾)을 빌려서 밤새도록 봉조(縫造)하여 아침에 맞추어 대궐에 나아갔으니 역시 성세(盛世)의 일이었다.
이때에 노론(老論)은 일컬으면 반드시 선건(禪巾)이요, 소론(小論)은 일컬으면 반드시 겹건(袷巾)이었다. 내가 승정원에 도착하니 서로 다투어 물었다. 내가 웃으면서 속담에 물리려면 차라리 큰 호랑이에게 물리라고 하였다 했다. 4인이 모두 선건(禪巾)을 쓰니 노론제인(老論諸人)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洌水全書, 二十七續集八 墓誌銘秘本 茯菴墓誌銘附見聞話條)
외견상으로도 그들의 복제로 사색의 당인들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사회였으며 그들은 언어나 행동거지까지도 서로 판이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이 위 사료로도 판명된다. 그것이 조선 후기의 양반사회인 것이며 정조년간의 당색간의 상쟁도 이로써 극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님인들이 사상 논쟁으로 인한 그들의 정치적 열세를 천주교도를 통한 대박청래(大船請來)로 만회하려 했음은 ‘경술(庚戌, 正祖 14년, l790)년에 제의(諸儀)가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편소(編小)하기 때문에 신부를 숨길 수가 없으며 신부는 끝내 탄로날 것이나 만약 큰 배(大船)를 청하여 오면 일은 풀릴 수 있다’라거나 ‘신부를 데려오고 이에 서양의 큰배가 우리나라에 오는데 만약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바탕 결판을 짓도록 한다’와 같은 사료(純祖辛西推案)에서 확인된다.
또 이 대박청래는 한두 번에 그쳤던 것이 아니며 계속 교도들에 의해 중국천주교당에 요청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료(純祖辛西推案及鞫案)에 ‘갑인(甲寅, 正祖 18년, 1794)년 여름 별사행(別使行) 때에 가환(李家煥), 숭훈(李承薰)등이 다시 유일(尹有一), 지황을 중국에 치송(治送)하여 신부를 작래(繳來)토록 하고 이어 대박(大舶)을 청하였으며…일장판결(一場判決)’하려 했음을 볼 때 미루어 알 수 있다. 위의 대박청래는, 그 구체적인 모습이 황 사영 백서(黃嗣永帛書)에서 드러나거니와, 이 가환을 통하여 정조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김 여삼의 발고로 지 황, 윤 유일, 최 인길 등 3인이 포장(捕將) 조 규진(趙圭鎭)에 의하여 6월 27일에 잡혀 와서 그날밤 안으로 곤살되고 그 다음날 그들의 시체가 강에 던져진 사실로 알 수 있다. 그들은 국사범인 만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신문되었어야 마땅한 터인데 그들의 신문으로 서양 큰 선박을 청해 오도록 한 사실이 정조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에 정조의 지시로 그들이 그렇게 빨리 곤살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원성 축조 다음 해에 정조가 붕어하거니와 그것은 노론들의 사상 논쟁에서 그들 남인을 비호하던 인물이 없어진 것이므로 남인의 몰락은 필연의 세였다. 이른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남인들은 철저히 제거되는데 이때(1801년 3월 12일) 자수한 주 문모(周文謨)의 공초에서 우리는 그가 의주로부터 입국하여 서울에 들어오고 이어 전국으로 포교하고 다닌 지역이 세세히 드러나며 김 건순(金建淳)과 같은 인물들을 만난 전말이 밝히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정사(丁巳, 正祖 21년, 1797)년 가을에 김 건순을 만난 사실을 공초를 통하여 알아보자.
내가 봉교(奉敎)하기를 권하니 그는 언론 중에 내가 협객(俠客)이라고 의심하면서 나에게 교우 수십가를 모아서 해도(海島)에 들어가 임의로 행교(行敎)할 수 있음을 권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도 역시 해도에 도착하여 군기를 선(繕)하고 대함(大艦)을 작하여 감히 본국을 해할 마음은 없고 오로지 타방(他邦 : 中國)에 직도(直到)하여 선치(先恥)를 설(雪)하겠다고 하였다…나는 인하여 야소교 요리(耶鮇敎要理)를 고하니 그는 심히 기뻐하며 아침에 돌아갔다. (辛酉邪獄罪人 李基讓等推案)
바다섬에 들어가 군기를 수건하고 큰 배를 만들어 중국으로 쳐들어간다는 발상은 숙종 23년 중국에 쳐들어가 최영의 후손으로 황제를 삼도록 한다던 승려들의 거사계획시의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라고 생각되며 그것은 김 건순이 미륵신앙자인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주 문모의 야소교 요리를 들고 심히 기뻐하며 아침에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주 문모의 야소교 요리가 바로 천년왕국 사상이라고 생각케 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무기나 군함과 같은 힘에 의해 중국 대륙을 석권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하룻밤에 야소교 요리를 들고 기뻐하며 돌아간 사실은 미륵신앙의 미륵이 천년왕국의 메시아로 대체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의 미륵신앙자들은 미륵의 출현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힘이 미륵의 출현에는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터득하고 있었으며 그같은 힘을 구체적인 그들의 조직과 무력에 의지하려고 했었음도 사실이지만 일부에서는 큰 배와 대포를 가지고 있는 서양의 힘, 즉 천주교에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조선 후기 천주교의 급속한 확산을 ‘천주교의 천년왕국사상과 사상적 일치를 발견한 미륵신앙자들의 천주교도화’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