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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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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 현응 1987년 08월 66호
깨달음과 역사
이제 깨달음을 이야기함에 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만 두 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만, 한 스님은 참선수행하는 수좌스님이고 한 스님은 사회 일선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스님이었습니다. 수좌스님이 말했읍니다.
“왜 요즘 깨달은 사람은 예전의 깨달은 사람에 비해 열등한가? 왜 요즘 깨달은 사람은 자유자재로 신통(초능력)을 구사하지도 못하고 병이 들기도하는 등,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요즘의 수행법이 틀렸다는 말인가? 하루빨리 예전 선지식처럼 큰 깨달음과 능력을 얻어 괴로움의 중생계를 제도해야 할텐데…”
포교사스님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깨달음이란 관념적이거나 개인적인 일신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개인에게서도 성스러운 인격과 실천을 겸비함은 물론 사회적 제 문제의 해결과 정토사회의 건설까지도 싸안아 성취해야만 진정한 깨달음이요 성불인 것이다. 따라서 나의 포교활동은 깨닫고 난 뒤의 봉사활동이 아니며, 나의 사회적 실천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도의 과정인 것이다.”
두 스님의 이야기는 모두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된 진지한 구도의 자세를 보이고 있읍니다. 그러나 두 스님의 생각엔 저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깨달음이란 두 스님의 이야기처럼 일신상의 많은 능력을 갖게 된다거나 사회적 과제의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 역시 어려서 처음 출가했을 적에는 깨달은 사람은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어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내다볼 수 있고 물위를 걷고 하늘을 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불교에는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와 민족 등의 모든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원리와 법칙,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방식이 있다고 믿었읍니다. 다만 내가 아직 어리석어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또 그것을 시대의 추이에 맞게 새롭게 조명해 내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불교인들이 한번씩 가질 법한 것이지요. 그밖에 사회의 문제에 좀더 첨예한 관심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진보적인 불교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좀더 불교의 교리와 정신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삼은 것이어야 하지 않나 하고 내심 반성하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껏 실천의 장 선두에서 내달리
다가도, 마치 늘어난 고무줄이 원점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것처럼, ‘불교’라는 틀 속으로 후퇴하곤 하거나 아니면 뒤돌며 주춤거리곤 하였지요. 그와 반대로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불교인들은 이런 진보적인 불교인들의 사회 참여와 실천을 비불교적이라고 비판하는 경향도 있었읍니다.
하지만, 사제님, 그 어느때인가 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유형의 생각들이 ‘깨달음’과 ‘역사’의 문제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깨달음의세계’와 ‘역시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 곧 공(空)의 시각으로 삶을 조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삶과 존재들에서 실재성(實在性)의 장막을 벗겨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삶과 존재들을 비실재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존재를 변화의 과정에 있는 가설적인 것, 환상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을 깨닫는 주체도 역시 비실재요, 환장적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요. 따라서 깨달음의 세계는 어떤 주관적인 인식의 틀이 있어 그것이 대상 존재를 이렇다저렇다고 이해하는, 소위 서구적인 인식론의 차원이 아니라, 대상 존재와 인식주관의 영역이 서로서로 생성하고 결부되어 영향을 주고 규정하는 것을 깨달아 이러한 인식의 영역과 존재의 영역과의 상관성을 동시에 깨닫고 그것들의 비실재성(무아)을 동시에 통찰해내는 일입니다.
결국 ‘깨달음’이란 삶들의 영역이 공(변화와 관계로서의세계)임을, 비실재(무아,無我)임을, 가설적이요 환상적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와 달리, 개인의 삶에서 능력과 덕을 계발하고 확충하는 일이나 사회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넓은 의미에서 통틀어 ‘역사의 영역’이라고 말한다면, 역사의 세계는 존재의 실재(reality)를 잠정적으로 또는 확정적으로 인정해 두고서 그를 바탕으로 존재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의 비실재성을 말하는 ‘깨달음’의 입장과, 일정한 실재의 터전 위에 집짓고 논밭 일구는 ‘역사’의 입장 사이에서 미묘한 논리적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바둑돌에서 흰 것과 딱딱한 것이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듯이말입니다. 결국 공(空)의 깨달음을 가지고 역사적 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거꾸로 역사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성취하더라도 존재, 곧, 역사가 비실재적인 것임을 깨달을 수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의 두 스님의 경우는 훌륭한 노력과 순수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결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사회를 어떻게 건립하고 꾸미는 일과 그러한 것들의 비실재성을 깨닫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두 스님은 개인과 사회의 제문제를 변화-발전시키는 ‘역사’의 차원과, 그러한 역사의 모든 것들이 환상적임을 통찰하는 ‘깨달옴음의 차원을 구분할 줄 아는 정확한 인식이 없이 적당히 혼합하다보니 혼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제님, 이제 이쯤되면 우리는 다시 ‘깨달음’과 ‘역사’의 세계는 결코 이원화되어 서로 상관없는 것이 아님을 말해야할 때가 됩니다. 이를테면 희다는 것과 딱딱하다는 것이 각기 다른 차원의 문제이긴 하지만 하나의 바둑돌로 통일되듯이, ‘깨달음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통일되는 점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통일된 삶의 모습은 보디(깨달옴)와 사트바(역사)가 결부되는 일로서 이 둘이 변증적으로 합쳐진 ‘보디사트바(보살)’의 역사적 삶이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깨달음’과 ‘역사’의 변증법적인 통일 구조는 삶이 환(幻)임을 깨달은 토대 위에서, 그리고 사회적 제문제는 그것들의 역사적 상황 속의 검증으로 도출된 방편바라밀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트바’ 즉 역사에서의 각분야의 문제는 그 해당 분야의 역사적 노력과 그 축척에 힘입은 창의적인 발전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점임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예술의 문제는 미학적인 노력이나 창조적인 작가에 의해, 자연의 법칙은 자연과학적인 노력에 의해, 경제의 문제는 경제학적인 노력과 시책으로, 사회의 문제는 사회학적인 차원으로 각각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코 불교의 깨달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불교의 뼈대가 되는 변화와 관계성의 통찰은 단 존재를 바라봄에 있어 실재 의식을 떨쳐서 깨달음에 르게 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 변증법적 사고를 갖게 해주어 존재들 사이의 포괄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상관 구조를 밝혀주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음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삶 일반에 두루 적용되는 변화와 관계성의 시각이 존재를 바라보는 데에서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통시대적이고 보편적인 관찰법만 가지고는 역사적인 많은 추이와 경험, 그리고 사실의 누적 위에 전개되는 제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읍니다. 역사적인 문제는 이러한 공(空)의 시각을 토대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각 분야 특유의 개성있는 움직임과 주변 영역과의 역사적 상관성을 읽어내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러한 역사상의 적합한 노력들을 일러 바로 ‘방편바라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깨달음)의 바탕 위에 적절한 역사적 활동인 사트바로서의 ‘방편바라밀’이 결합되는 것을 조화로운 삶의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한편 보디(깨달음)를 결여한 많은 사람들도 그나름대로의 희로애락 속에 역사적 성패를 이루어나가겠지만, 이 삶과 역사가 변화와 관계 속에 진행되는 환상적인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 무지로 말미암아 원천적인 괴로움의 싹을 안고서 삶을 꾸려갈 것입니다. 중생의 삶에서 괴로움의 근원은 실로 실재 관념(我相)으로 삶을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이미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은 갈파하신 바 있읍니다.
사회의 여러 분야가 저마다 고유하게 독특한 역할을 가지듯이 불교인에게, 특히 비구보살에게 불교인 특유의 역사적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인에게 역사적 제존재가 환상임을 상기시켜 그러한 깨달음의 토대 위에서 역사적 삶을 운용하도록 깨우쳐 주는 일일 터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환상적인 역사관은 역사를 더욱 탄력있고도 풍부하게 하며, 역사적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삶을 밝고 건강하게 꾸려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마침내는 이러한 ‘깨달음’과 ‘역사’의 조화로운 삶의 모습이야말로 열려진 보살의 역사적인 삶으로서, 그것은 환상적인 삶(보살)이 환상적인 노력(如幻慈悲)으로 환상적인 세계(淨土, 중생계)를 구현해 나가는 일과 다름없읍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살의 역사적 실천이야말로 환상으로서의 중생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며, 그것을 일러 ‘불국토청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스팔트 위의 불교인도 ‘깨달음’ 앞에 위축됨 하나없이 당당할 수 있어야겠고, 높은 산의 불교인도 ‘역사’ 앞에 떳떳이 가슴을 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