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존자의 형이어서 부처님과는 사촌 사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의 부인이셨던 야수다라의 아우라는 말도 있고, 그밖에도 몇 가지 이껄이 있지만, 어느 것 이건 부처님의 측근 인물엄올 강력히 시사하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어쨌건 출가하여서는 꽤 열심히 수행도 하고 다소의 인망도 있은 듯하나, 인도에 흔한 고행주의자였던 모양이어서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요구했다 한다.
1. 비구는 일생 동안 숲에서만 살아, 마을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
2. 비구는 일생 동안 걸식만을 하고, 남의 초대에 용하지 못하게 할 것.
3. 비구는 일생 동안 분소의만을 업고, 재가신자로 부터 의복의 보시를 못 받게 할 것.
4. 비구는 일생 동안 나무 밑올 집으로 삼아 지붕 있는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
5. 비구는 일생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할 것.
그리하여 이 제의가 거부되자 부처님은 사치에 빠져 있다고 공격했다 전한다. 그리고 이같은 극단적 금욕주의가 집요한 중오감으로 연결되는 예가 혼하듯, 제바달다 또한 왕자 아사세에 접근해 그를 부추겨 부왕을 죽이게 하는 한편, 그와 결탁하여 부처님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백방으로 획책했다. 그래서 부처님께 교단의 지도를 저에게 맡기고 은퇴하시도록 요구했다가 거부되자, 그를 지지하는 5백의 비구를 이꿀고 별도의 교단올 채웠으나 사리불·목련의 활약으로 이것 또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더욱 중오의 효단으로 바뀐 그는 술을 먹인 쿄끼리를 놓아서 부처님올 짓밟아 없애려 하기도 하고, 바위를 굴려 그 조각이 부처님의 발가락에 튀어 피를 나게도 하여, 부처님올 시해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한 바 있었다. 이런 사람이므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셜이 나돈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러면 「법화경」에서는 그를 어떻게 명가할 것인가.
ㄴ. 재명가된 제바달다
제바달다품에서 부처님은 보리를 구해 육바라밀을 닦던 무량겁 전의 일을 희상하시면서, 이같이 설하셨다.
“법 위해 왕위 버려 태자에게 맡기고 북을 쳐 선언하여 사방에 법 구하되, ‘뉘 능히 나 위하여 대승 설활 자이어요. 죽도록 섬기어 심부름 하리로다.”
때에 선인 있어 찾아와 아뢰오되, ‘제게 대승 있니, 이름 「법화경」이라. 제 뜻 안 어기시면 설해 드리오리다.’
왕이 신선의 이 말 듣고 뛸 듯이 기뻐하여, 곧 선언 따라 구하는 것 공급하되, 과일 따고 물 길으며 옆을 줌고 밥을 차려, 심지어 몸으로 자리가 되기도 해 몸도 마음도 고달픔 몰랐도다.
때에 이리 섬기기를 천 년에 걸쳤으니, 법올 위하기에 부지런히 일혜 모셔 결핍하는 바 없게 했느니라.’
그리고 “그때의 왕은 나요 선언은 지금의 제바달다니, 제바달다가 선지식이었기에 나로 하여 정각 이루어 두루 중생올 구제케 함이니라” 하시고, 제바달다는 미래세에 성불해 천왕여래(天王如來)가 되리라 하셨다.
결국 먼 천생의 일이긴 하나 제바달다는 더없는 선지식이어서 석가여래에게 「법화경」을 설함으로써 오늘에 성불하실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요 당시에 부처님은 강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제바달다를 섬겨 ‘몸으로 자리가 되기도 하셨다’ 했으므로, 아무데서나 스승에게 앉고 싶은 의사가 있을 때는 몸을 엎드려 그 위에 앉게 했다는 것이어서, 자존심 따위는 처음부터 내던진 순일(純一)한 구도의 자세이시다.
어쨌거나 악인 제바달다가 선지식으혹 명가되어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하는데, 「법화경」을 설한 것 말고는 여전히 악당다운 면모가 발휘되고 있는 듯하여. 우리의 의혹을 가중시켜 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하여 노구를 이끌고 제자와 똑같이 노무에 종사한 백장선사 같은 분도 있는 터에, 온갖 잡일을 제지에게만 시킨 것은 고사하고, 엎드리게 하여 그 위에 앉는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악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셀했다는 「법화경」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법화경」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법화경」이라 하면 문자로 기록된 그것을 뜻하는 줄 알기 쉽지만, 부처님 자신이 “그만두라 사리불아. 다시 젤할 바 아니니”라 하시고, “이 법이 사고 ·분별로 능히 이해할 바 아니라, 오직 부처님네만이 아실 수 있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바에는, 진정한 「법화경」은 언어 ·분별을 넘어선 절대적 진리 자체요, 문자로 기록된 것은 부득이 혜 중생에게 껄하신 점에서 「법화경」의 그립자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같은 절대적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제바달다는 더없이 악하게 굴었던 것이고, 가해 오는 악을 악으로 의식함이 없이 대처하신 점에서, 부처님은 살아 있는 「법화경」의 진리를 터득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설사 그것이 언어화된 「법화경」이었다 해도, 그 진정한 이해는 문자 밖에 있는 것이므로 사청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ㄴ. 선과 악
그러면 불법의 최대의 적이던 사람이 「법화경」에 오자 부처님을 가르친 선지식으로 명가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전에 그토록 배격되던 악인이, 이 경에서 는 선지식으로 바뀌어 성불하리라는 예언까지 받았으니 어리둥절함도 당연하다 하겠으나, 보다 근본으로 돌아가 선파 악의 관계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선악을 갈라서 생각한다. 그리하여 살인범은 악인이요, 사재를 기울여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것을 보면 선언이라 하여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자선사업가라고 명예 따위를 회구하는 마옴이 없으란 법도 없고, 살인자라 해도 늘 살인을 하면서 산 것만도 아닌 점에서는 아리따운 마옵의 소유자일 가능성은 항상 남는다. 아니, 저 감옥에 갇힌 죄수의 마음이, 선인이라는 이름을 독차지하고 있는 명사의 그것보다 더 착하고 더 순수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올 수 있을 것이다. 이펀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관조하는 것에 의해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가만히 마음의 세계를 들여다 보라. 마옴 속에서 보살이 안되어 보고 부처님이 딴되어 본 사람이 누구며, 도둑질을 하고 강도·강간을 안혜 본 사랍이 누구언자 표면적으로 행동화하지는 않았다 해도, 마음에 늘 그러한 선악의 생각이 뛰엉켜 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성불의 가능성과 함께 악으로의 전락의 가농성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마음의 움직임마저 의업이라 하여 행위의 범주에 포함시키므로, 거기서 이루어지는 수행이련-이런 마음 속의 악을 누르고 선한쪽을 키워가는 띨이 되는데, 이 차원에서 선악의 관계는 더욱 미묘한 양상을 빚게 된다. 수행에 칙수하지 않던 때에는 선악의 마음이 번갈아 일어났다 꺼지기도 하고, 때로는 선 속에 악이 뒤섞이며 악 속에 선이 뒤점이기도 하여 복잡하기는 했어도, 마음을 바로잡을 뜻이 없었으므로 그런 양상에 신경을 쓰이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수행을 결의하는 순간부터는 사정이 바뀌고 말아 선을 지향함이 강할수록 이를 뒤로 끌어당기는 딱의 인력도 그만큼 강함을 느껴야 하기에, 선악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양상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악이 처음부터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러나 선악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선만이 있기는 바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악에 지는 자에게는 악이 선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질것이나, 이를 뿌리치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악이 수행을 돕고 있는 것도 되니, 악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방해가 없는 데서는 수행이 성립될 수 있을리 없고, 그러끼에 구도의 강한 의지 앞에서는 악이 수행올 돕는 보살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쯤되면 부처님에게 있어 제바달다가 어째서 선지식이었는지는 명백하지 않겠는가.
이원섭선생은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한 불교학자이며 시인이다. 1948년에 ‘시’로 문단에 나온 이래 전국 신도회 부회장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시인협회 회장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여러권의 시집과 ‘현대인의 불교’ ‘불교대전’ ‘법화경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