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뒷사람을 위해 왔습니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90년 01월 95호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인연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면 그는 인생을 조금은 아는 사람이다.
인연은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접근해 온다.
헤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만나기 위하여 헤어짐을 겪는다. 이를 인연의 소치로 본다. 한 존재가 거기 그렇게 있기 위해서는 숱한 인연들이 관계해야만 한다.
거기에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있고 같은 동료며 도반들의 인연이 있고, 선배와 후배의 인연이 있으며, 성직자와 신도의 인연들이 있다.
그러한 인연들이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질긴 끈으로 서로 연결하고 있기에 쉽게 끊을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면서 과거 선배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평가하고 그리고 현실에 반영한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의 삶은 우리 스스로 평가하기보다는, 또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결정하기보다는 우리의 후배와 후손들이 평가하고 결정을 내릴 일이다. 그들이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우리는 단 한 치도 예측할 수가 없다. 다만 성실하게 정진할 뿐이다.
우리는 먼저 이 세상을 살다 가신 우리 선배들을 평가할 때, 그 분들이 과연 얼마나 그 시대와 뒷세상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셨는지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뜻에서 강월헌(江月軒) 나옹선사(懶翁編師) 혜근(惠勤) 큰스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충숙왕 7년(1320년) 1월 15일 선관서령(曉官暑令) 아(牙)선생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태어난 큰스님은, 인도의 고승 지공선사와 주고받은 이야기에서처럼, 오로지 불교와 사회를 위해 특히 뒷사람을 위해 살다 간 분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골상이 남과 달랐으며, 모든 일에 열중하여 의문이 생기면 그 의문을 풀고자 끝까지 노력하였다.
그러던 그 분께 다정한 벗의 죽음은 삶의 무상(無常)을 깨닫게 하였고, 비로소 모든 인간, 아니 생명 있는 모든 존재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반드시 죽음이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평범하고도 심오한 이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가 20세이니, 한창 다감한 나이였다.
그러나, 이내 또 한 가지 의문 제기되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풀어나가야 할 커다란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인간은,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왜 태어나는가? 삶은 무엇이며 죽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죽음, 그 자체도 그렇거니와, 그 뒤는 어찌할 것인가? 이 죽음의 세계 아니 삶과 죽음 즉 생존의 체계는 어떻게 풀어야 하며 또 무엇인가를 회의하게 되었다.
자신의 문제이면서 또한 같은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의 문제였다. 이 세상을 이어받아 다스려 나갈 큰스님의 후예들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출가하지 않고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음을 알았다. 생사에 관계한 이 엄청난 과제는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고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것이다. 나고 죽음, 삶의 깊은 문제는 세간의 학문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출가를 결심하였다.

처음 출가한 곳은 경북 문경 공덕산에 있는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寺) 앞이었다.
요연선사는 당신의 심오한 선(禪)의 경지를 서예로 표현하기도 한, 당대의 이름난 명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몇 마디 주고받는 대화에서 요연선사는 나옹스님이 너무나 큰 인물임을 간파하여, 다른 곳으로 가 스승을 찾을 것을 권한다. 이처럼 요연선사가 상좌 욕심을 버리고 그를 좀더 훌륭한 인물로 만률기 위해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춘 것은, 오늘날의 선지식들이 종종 상좌 욕심으로 다투고 있는 것에 따끔한 경종을 울려 준다. 큰스님은 요연선사의 곁을 떠나 운수납자의 길을 걷는다. 그리하여 숱한 선지식들을 참방한다. 편력의 길은 고달프다.
그러나 새로운 인연, 새로운 큰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편력은 한없이 소중하다.
그렇게 하기 5년,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格岩寺)에서 뼈를 깎는 참선 수련에 들어간다. 때마침 회엄사에는 당대의 고승인 석옹(石翁)화상이 주석하여, 그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기를 4년을 보내고 나니, 하루는 석옹화상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아 게송을 지었다.

선불장에 앉아서
성성히 눈여겨 보니
보고 듣는 것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본래의 옛주인일세.

選佛場中坐
惺惺着眼看
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

큰스님은 28세 되시던 해에, 더 높은 스승을 찾아 배울 것을 결심하고, 지공화상과의 인연이 맺어지는 곳, 중국 원나라로 향한다. 삭풍이 살을 에이는 동짓달 추위와 싸우며 출발하여, 이듬해 삼월에 연경 법원사(法源寺)에 도착한다. 지공선사는 나웅 큰스님에게 있어 평생을 통해 스숭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위대한 선각자였다. 입실을 허락받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먼저 있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아니면 신통으로 왔는가?”
“신통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신통을 나타내 보여라.”
그러나 나옹스님은 손을 마주잡고 가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지공화상이 다시 묻는다.
“누가 그대를 오라고 가르쳤는가?”
“제 스스로 왔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뒷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이윽고 지공화상은 나옹 큰스님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입실을 허락하였다. 뒷사람을 위하여 왔다고 한 대답,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깨우쳐야 할 것이 있다. 평범하면서도 아주 중요한 대답이었다. 그 분의 그러한 대답은, 그 사상은 바로 오늘날까지 한국불교가 건재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옹 큰스님은 단순히 자신의 문제만을 위해서 출가수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뒷사람과, 중생들을 위해 출가구도의 길에 나선 것이다.

5년 동안 지공화상을 모시고 정진하던 큰스님은 평강(平江)의 휴휴암(休休庵)에서 여름 한철을 지내고 정자사(淨慈寺)에 이르러 평산 처림(平山處林)선사를 배알한다.
평산 처림선사는 큰스님에게는 중국 양대 스승 중의 한 분이다. 매우 높은 경지를 터득한 선걸(禪傑)이다.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연경에서 왔습니다.”
“거기서 누구를 만났는가? ”
“지공선사를 뵈었습니다.”
“지공선사는 항상 무엇을 쓰던가?”
“지공선사는 늘 천검(千觀)을 쓰더이다.”
“지흥선사의 천검은 차치하고 너의 한 검을 가져오너라.”
이에 큰스님은 좌구(坐具)를 들어 처림선사를 후려갈겼다. 얻어맞은 처립선사가 선상(輝未)에서 떨어지면서 외쳤다.
“이런 이 도둑놈이 나를 죽이는구나.”
큰스님은 처림선사를 붙틀어 일으키며 말했다.
“제 한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거니와, 살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평산 처림선사는
나옹큰스님에게 옷과 불자(佛子)를 전했다. 복룡산의 천암선원(千岩禪院)을 거쳐 사방으로 주유하면서 선지식을 찾은 뒤에, 다시 북경(연경)으로 돌아와, 지공선사의 법의(法衣)와 불자를 전하여 받고 순제(順帝)의 칙명으로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로 부임하였다.
1358년, 마침내 귀국하여 이태 뒤에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주석하였으며, 1371년에는왕사(王師)가 되어‘대조계선교도총섭근수본지중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戰敎都總攝勤修本智重觸且風福國拍世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뒤에 화엄사를 크게 중창하고 지공선사의 사리를 모셔다 봉안하였으며 왕명을 받아 밀양의 영원사(瑩原寺)로 가다가 중도에 신륵사(神勒寺)에 잠시 들른 것이 그곳이 큰스님의 열반처가 되었던 것이다. 1327년이었다.
허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나옹 큰스님의 생애도 생애려니와 그 분이 그 생애를 통하여 우리 후손에게 남긴 교훈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중국의 홍건적이 송도(松都)에 쳐들어왔을 때, 큰스님은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주석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피난할 것을 권하자 큰스님은 “홍건적의 무리가 나와 무슨 원한이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모든 스님이 절을 버리고 이웃을 버린다면, 누가 절을 지키고 스님들을 따르겠는가” 하며 끝까지 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홍건적들은 오히려 큰스님을 알현하며 불전에 향을 피우고 돌아갔다고 한다.

우리는 큰스님에게서 인연의 소중함을 배운다. 그의 자비를 배운다. 미워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인연이 맺어진 이들을 위해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우리 후손들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