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된 이야기들
하여튼, 새 세기를 맞으면서 한국불교가 해야 할 일들은 너무나 많아 보인다. 식자층 전문가들은 저마다 전망들을 내어놓는다. 그 다양하고 수많은 전망을 대충 뭉뚱그려 본다면, 대체로 ‘현대화’와 ‘사회화’라는 두 개념으로 압축될 듯하다. 사회화가 세상을 위해서 해야 할 불교의 역할에 대한 성찰이라면, 현대화는 불교가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성찰이다.
맹목적 과학지상주의의 위험에 대한 새로운 불교적 가치관 제시, 인간을 목적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상실되어 버린 인간성 회복운동, 사회적으로 소외된 외로운 이들을 위한 복지사업에의 헌신, 경제적으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분배정의의 실현, 정치적으로 소외된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인권운동, 공해와 환경파괴를 극복할 환경보전운동, 물질적 이익이나 편의를 위해서라면 생명마저 담보하는 물신주의에 맞서는 생명존중 운동, 갈등과 알력과 쟁투를 종식하고 영원한 평화를 위한 노력, 이런 역할들이 불교가 새 시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대 사회적 역할, 곧 사회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승가공동체 구성원의 자질향상을 위한 교육과정의 개혁 및 재정립, 삼보정재(淨財)의 합리적 운용과 투명성 확보, 청빈과 정결貞潔과 정진의 수행생활 확립, 외진 곳에서 자기 위안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을 위해 법음을 전파하는 적극적 포교운동, 지식정보 산업시대에 걸 맞는 정보화체제 구축, 구태의연하고 고답적인 의식으로부터 오늘의 현실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의식의 개혁, 이런 것들이 불교가 새 시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대내적 할 일, 곧 현대화 또는 개혁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이미 수없이 되풀이 된 것 들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들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필자는 다음 세 가지가 새 시대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고싶다.
불과의 자기 정체성 확립
관용과 포용력을 장점으로 삼는 불교는 새로이 만나는 종교와 문화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수용해왔다. 중국에 도착한 불교는 도교와 자연숭배신앙을, 한국에서는 무속을, 일본에서는 신도神道를, 티벳에서는 본교(Bon)를, 동남아시아에서는 낫Nat전통을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변용되다 못해 심지어 변질되었다. 인도불교는 7세기에 이르러 힌두교의 박티bhakti신앙을 턱없이 수용하다가 자기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무엇이 붓다의 가르침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그것은 붓다가 명백하게 극구 제지한 행위들을 붓다의 이름 아래 버젓이 행하고 있기 때문이며, 너무나 번연히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아무런 반성적 성찰 없이 불교의 이름으로 한꺼번에 쓸어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제 새로운 결집을 해야만 한다. 정법과 비법을 분명히 변별해 내어야 한다. 이질적인 것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혼돈과 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비불교적인 것들이 오히려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구축하고 있다면, 이것은 이제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는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비불교적 요소들이 불교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붓다를 왜곡시키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청산해야만 한다. 무속과 자연숭배와 뻥튀기 교환적 가피만을 기대하는 기복적 행태들과 어줍잖은 타협을 끝내야 한다.
나는 불교의 자기 정체성 확립이야말로 새 시대에 불교가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현대화의 핵심이라고 판단한다. 오늘의 한국불교가 혼란과 자멸의 징후를 노정하는 가장 큰 까닭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 지표의 창조
불교와 기독교는 이천 년 이상 동서양의 사장과 문화를 창조하며 이끌어 왔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이 두 전통 속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았다. 그러나 지금 서양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기독교를 버렸고 동양 사람들 역시 불교적 가치관을 더 이상 삶의 지표로 삼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과학적 사고방식에 입각한 합리적 가치관에 따 산다. 과거 인류의 원동력이었던 불교와 기독교는 이제 합리적 가치관에 입각한 신앙을 새로 세워야 한다. 새 시대의 불교는 이제 종교적 독단이나 아집을 과감히 집어 던져야 한다. 과학적 사고방식과 합리적 가치관에 따라 사는 -그러나 이직도 불행한-현대인들을 다시 매료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지표를 창조해야만 한다. 과거의 불교만으로는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과감하고 분명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불교는 현대의 지성들이 창출한 과학적 성과들을 겸허히 수용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영성마저도 수용해야만 한다. 혹자는 새 시대에 사상사적으로 새롭게 기대되는 것은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라고 한다·. 나는 이천여년 동안 인류의 절반을 인도해 온 기독교에 대해서 한국불교는 왜 이리 무관심한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기독교 알기도 새 시대의 큰 과업 중의 하나다. 선진국의 지상들은 두 종교를 함께 생각하는 작업에 이미 깊이 들어가 있다.
시대와 세상의 현인에 헌신
값비싼 골동품 밥그릇은 박물관 진열대에서 자신의 과거를 뽐내지만 무엇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용도를 상실한다. 싸구려 밥그릇은 부뚜막에서 뒹굴지만 그릇으로서의 용도를 십분 발휘한다. 새 시대의 불교는 고이 간직 되는 박물관 진열대의 골동품이 아니라 부뚜막의 싸구려 밥그릇처럼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새시대의 불교는 자신의 전부를 바쳐서 시대와 세상의 현안에 헌신해야 한다. 불교가 자기를 돌보지 않고 시대와 세상의 현안에 자신을 헌신할 때, 비로소 그 존재가치를 인정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환경문제든, 통일문제든, 분배정의의 문제든, 시대의 현안이 무엇인지 예리한 통찰력으로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현안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삼아야 한다. 자기 위안으로서의 깨달음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다. 불국토 완성, 곧 부처님나라 만들기야말로 불자의 궁극적 목적이다. 자유와 평화, 곧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부처님 나라야말로 오로지 자기 없음의 깨달음과 자기헌신의 실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자기헌신을 소홀히 해왔다. 우리는 이제 좌복 위에서가 아니라 자기 헌신의 실천 속에서 깨달아야 한다.
그릇은 자신을 담지 않는다. 그릇이 지신의 존재를 위할 때는 곧장 박물관의 진열대로 옮겨진다. 그것으로써 그릇의 생명은 상실된다. 불교적 삶이란 자기를 위하거나 불교를 위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위하는 삶이다. 마치 그릇이 자·신을 담지 않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