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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성보(聖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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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7년 08월 66호
묘길상탑(妙吉祥塔)
해인사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 미터 지점 도로변에 작고 아담한 석탑 하나가 있다. 이 탑을 얼핏 보기에는 보잘 것이 없는 탑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작은 탑에는 천년이 넘는 신라의 충혼이 함께 깃들어 있으며 걸핏하면 한국 불교의 특징이라고 내세우는 호국불교의 이념이 살아 숨쉬는 그런 탑이다.
이 탑의 높이는 약3 미터인 13척(尺)에 불과하지만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탑으로서 상하가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기단 양옆에 부조(浮彫)가 된 받침기둥이 있으며 기단 면석(面石)의 중간에 부조가 된 받침기둥이 있고 또한 옥개석(屋蓋石)의 층 받침이 5단으로 되어있는 점 등이 특이한 탑이다.
이 탑은 해인사 동구에 있기 때문에 지금도 크게 관심이없으면 그냥 지나치게 되고 또 가람 배치와는 무관하므로 흔히 무심히 길가에 세워진 작은 탑이라고 생각해 오다가, 돌연 1966년에 이 소탑 안에서 발견된 탑지(塔誌)와 귀중한 불탑공양(佛塔供養)의 자료들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이는 참으로 한국 불교의 호국정신이 신라 때부터 충일했음을 알게 하는 자료가 되었으며 신라 말의 복잡한 사회상과 당시 해인사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966년 여름 석탑 안의 사리공양물(舍利供養物)만 전문적으로 도굴해내는 절도단이 검찰에 검거되어 그들의 자백과 함께 여러 가지의 장엄구를 비롯하여 4매의 지석(誌石)이 나옴으로써 이제까지 관심 밖에 있던 이 탑이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4매의 탑지와 더불어 석탑공양구는 국립박물관에 보관 진열되어 있는데 그 탑지석(塔誌石)은 다음과 같다.
① 해인사묘길상탑기-표면, 운양대길상탑기(雲陽臺吉祥塔記) -속면
② 백성사길상탑중납법보기(百城寺吉祥塔中納法賝記)
③ 오대산사길상탑사(五臺山寺吉祥塔詞)-표면, 곡치군(哭緇軍)-속면
④ 해인사호국삼보전망치소옥자(海印寺護國三寶戰亡緇素玉字)
보편적으로 탑은 전호에 밝혔듯이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봉안하거나 부처님의 몸을 상정한다고 했는데, 이 묘길 상탑은 충혼탑의 성격이거나 호국진혼탑(護國鎭魂塔)이라고 할 수 있다.
해인사 묘길상탑기는 고운(孤雲) 최치원이 지었다. 고운 선생이 신라 말에 가야산에 식솔을 데리고 은거했는데 그때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다.

당나라 19대 소종이 중흥할 즈음 전쟁과 흉년 두 재앙이 중국에서는 그쳤으나 신라 땅에는 악한 중 악한 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험악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굶어서 죽거나, 전쟁으로 인하여 죽은 시체들이 들판에 즐비하였다. 해인사의 대덕 훈혁(訓衋)스님이 이러한 사실을 가슴아프게 여겨 부처님께 자비를 구하고 대중에게 청하고 권유하여 각각 벼한단씩을 희사케 함으로써 여기 옥돌 삼충을 세웠으니, 그것은 법륜의 바퀴가 오래 구르게 함이며 또한 호국을 으뜸으로 삼으니, 곧 그 가운데 특히 원통하게 횡사하여 고해에서 헤매이는 원혼들을 천도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명복을 빌어 길이 길이 여기에 쉬게 하리라.

탑을 세운 공덕주의 이름이 그 아래 나와 있는데, 글씨체는 단정한 구양순체이고 연대는 중국 연호 건령(乾寧) 2년이니 이는 서기 895년이며 신라 진성여왕 9년이 되는 해로서 최치원이 39세 되던 해이다.
두번째 돌인 백성사 길상탑 해인사 중법보기는 길상탑지의 크기인 23 ×23 센티미터에 비슷한 크기이며 연대 역시 동일하다.
탑지의 기록에 보면 무구정대다라니경(無垢淨大陀羅尼經)을 비롯하여 법화경, 정명경(淨名經) 일부와 금강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과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명호와 선지식들이 열거되어 있으며 그속에 같이 부처님 사리와 석기여래 동화상(鋼畵像), 그리고 작은 소탑을 99개와 77개 넣었는데. 그 넣은 법으로 보아 신라 이후의 조탑(造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와 함께 넣어진 석가여래열반동화상(釋迦如來涅槃鋼畵像)은 혼란중에 사망한 승려나 속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렇게 귀중한 것들이 탑기에만 있을 뿐 도적들에게 유린되어 찾을 길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세번째 돌인 오대산사 길상탑지에는 훈혁스님이 승군(僧軍)과 같은 말인 치군(繼軍)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 있으며 그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濁數西來及薩羅十年狼犳
困僧伽吾師向覺天耶出弟子
修仙豈免魔昨喜斑螢照道
好今悲乾陣散骸蹉慾逢
東廣吉祥處爲汝澈霽窣塔波

탁한 운수가 서쪽에서 신라에 미쳐 10년 동안이나 못된 무리들이 승가를 괴롭혔구나. 부처님은 이미 열반에 드셨고, 출가 제자들이 불도를 비록 닦았으나 어찌 마(魔)를 면할 수 있을소냐. 그러므로 어제는 반닷불로 길 밝히는 것을 기뻐하더니 지금은 황량한 이곳에 흐트러진 해골이 발에 걸림을 슬퍼하노라. 그래서 이곳 길상처에 그대들을 위하여 탑을 세우노라.

쓰인 것을 보더라도 난세에 희생된 승려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으며 난세의 재액이 사찰에까지 미치므로 호국과 승문(僧門)을 위하여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승군들의 기개와 충절을 기리고 애도하는 글이다.
네번째 돌인 해인사 호국삼보 전망치소옥자(戰亡緇素玉字)에는 56명의 승려와 속인의 명단이 열기되어 있다. 여기에 구태여 그 명단을 열기할 필요는 없지만, 대체로 진성여왕 때였으니, 짐작하건대 국내의 사정이 어려웠을 것이고 특히 후백제의 침략으로 희생된 승려와 속인을 위한 탑이라고 생각되며 그것이 혹시 사상적인 투쟁이 아니었나 싶다.
흔히 한국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호국불교라고 이야기해 왔고 또한 해인사 묘길상탑에는 호국의 의지가 다분히 담겨 있으으로, 호국에 대한 현재 우리들의 입장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난다. 호국(護國)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나라를 위한’ ‘국가를 위한’의 뜻이 되겠다. 굳이 호국인왕경을 들추지 않더라도 국민된 자가, 백성된 자가, 나라를 위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은 봉건사회와 같이 왕을 위한 짓이거나 집권층을 비호하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이나 집권세력이 아니라, ‘민주’라 하여 곧 그 나라의 백성이 주인임을 알아야 한다. 불교계는 현대사회에서 호국이란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여야 할것임을 군말로 달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