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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어떤 존재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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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만우(시인) 1991년 06월 112호
교주 석가와 역대천동조사(歷代傳屬祖師)들의 눈 속에 머물었을 저 달은 뭇 삶들의 행간에서 빛이었을까? 그림자였을까?
빛은 어둠을 겨누고 그림자는 실체에 구속되어 있는데 관과 조(照)의 맞닿음으로 여하한 존재도 보호될 수 있을까?
농통태로서의 빛과 수동태로서의 그림자는 존재일반에 걸쳐 보편적 질서개념인가? 파괴개념인가?
여하한 개념설정도 판(觀)과 조(照)의 타협으로만 가능한가?
관(觀)의 투명함과 조(照)의 현란함이 종교와 사상 일언을 지탱해주고, 이 순간 내 눈동째 머물러 있는 달의 흐름-존재와 운동을 규정하고 있다. 이단상은 인간이 규명해 놓은 사실이라는 것과 친구인가, 반대인가?
수많은 생각파 논리의 피난처로 선태한 방편이 통일(同一)한 감정-사실 길들여 닮은꼴에 가까용에 호소해서 공정을 유도해 내는 부호-특히 언어는 상황조작의 선봉에서 미래라는 재계와 인간을 규정해 내고 있다-들과 대립된다면 해방이니 자휴니 열반·혜탈 등은 빛의 좌석에서 그림자의 화석으로 옮겨가야 하지 않을까? 그 방편이 죽음일지라도 -해서 우리의 삶은 파기할 수 없는 예약된 번뇌를 물려주는 연속일까?
생(生)은 빛이 그림자를 낳은 것일까? 그렴자가 그림자를 낳고 그 연속선상혜서야 죽음과 일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나는 묻고 있다.
6월은 별리의 계절이다. 오월의 수많은 함성들이 영글어 하나의 힘찬 몸짓으로 맺어진다. 그리하여 떠난 자와 남는 자를 명확허 가름해 낸다. 남아 있는 것만으로써 떠난 것이 무엇인지 안다.
여름 속에서 붐이 떠났음을 알 듯이…. 사실 별리는 고통과 즐거움의 무게를 균형있게 지탱하고 었는 감미로운 언어 중의 하나다. 최고의 서정성과 처연함을 내포하고 었기 때문에 자체(自體)의 모순과 불합리의 의미를 완벽하게 조화시켜 내는 작용(作用)으로 자리지킴을 하고 있다.
떠나는 것과 남는 것, 떠남으로써 남아 있는 것은 자연스례 확인된다. 떠남은 버림이 아니고 남음은 선태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정이고 예비 되어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 그림자는 현 존재를 온통 발로해 내면서 당체의 자리를 숨기지 않는 다. 화신(化身)으로서 부처의 의미는 관(觀)으로써 조(照)를 드러내 보임이요 법신(法身)으로서 부처는 조(照)로써 판(觀)을 열어 보인다.
때문에 법신(法身)으로서의 빛과 회신으로서의 그림자는 오고 갑의 완벽한 조화다. 별리의 정순한 자리매김이다.
서산(西山)의 언어는 부모와의 별리를 비유로 그림자와의 만남을 이렇듯 표현하고 있다.

一別萱掌後
久歲月深
老兒如父面
覆底薰 心

어머님을 한번 이별한 뒤에
도도히 세월은 깊어갔나니
늙은 자식이 아비 얼굴 닮아
못 밑 그림자 보고 문득 놀란다.
출가란 관계의 확인이다.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의 그림자가 실체가 없고 상관되어 있다는 관계의 확인절차, 그것이 출가(出家)다. 왕사성(王舍城)의 말과 서산{西山}의 그림자가 둘이 아니고 서산의 달과 왕사성의 그림자가 하나가 아니라, 단지 거래가 있을 뿐 이다. 그 거래는 희을려진 무수한 의미의 파편들을 일관하고 본래자리에서 후인들을 기다린다.
서산의 그림자는 이 순간 물 밑 그림자에 놀란 사람들과 함째 었고, 뭇이 있는 듯 사람을 향해 웃고 있는 꽃 속에도 었다. 연대기적 삶과 죽용은 이 분양(分上)에서 논해져야 맺힘이 없다. 공간적으로 무수한 광주(光州)와 시간적으로 수많은 오월(五月)이 생명올 버리고 선택하는 역을, 별리의 완벽한 균형으로 흔들림을 바로잡아야 한다. 가증스러운 행위에 의한 파멸적 의미를 소거하고 타당하고 불편(不偏)한 의미로 치환시킬 때 비로소 가치의 척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가치에 전 삶을 걸어두고 시시각각 변하는 모양·색깔 등을 그려내고 써내는 역사는 화멸적 의미의 별리를 추방할 것이다. 별리는 진정한 만남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들먹거리는 모든 외첨이 현수믹헤 갇힌 낡은 구호처럼 퇴색되어 나부낀다면 팔만대장경도 녹슨 언어의 하치장으로 전략하지 않을까? 이 외침은 어떨까?

彼此將幻身(澤守初)
健生於幻世
如可kI幻中
復與爭事
피차 환의 몸으로 함께 환의 세상에 났는데 어째서 환과 환 속에서 다시 환의 일로 다툴 것인가?
………
그림자여, 허깨비여
또 하나의 불행한 언어여
거룩한 환상이여 .
여시아문(如是寶聞) 이와 같이 나는 듣고 있다.


만우스님은 갑사로 출가하여 해인사 강원, 제방선원 등에서 정진하였으며 지금은 만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