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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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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고건 2002년 01월 239호
현명한 사람은 청렴한 것이 자신의 장래에 이롭다고 믿습니다.
즉 자신의 창창한 장래를 절대로 돈과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다산 선생은 ‘지자이렴智者利廉’이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가친(고형곤)께서 평생 불교철학을 전공해 오신 학자셨기 때문에 자연스레 불교의 정신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불교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앞장서서 민족과 나라를 구해 온 호국불교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대자대비의 정신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습니다. 특히,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귀중한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해인사의 불자 여러분과 이렇게 지면을 통하여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불교에는 ‘관조觀照’와 ‘청정淸靜’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관조란 지혜로써 사리를 비추어 보아 밝게 아는 것입니다. 청정이란 사욕을 떠난 마음의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관조와 청정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저는 제 나름대로 터득하여 실천하고 있는 ‘거절의 수사학’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 20여 년 동안 공직자로 일하면서 청렴을 첫째가는 덕목으로 삼아 왔습니다. 제가 고시에 합격해서 처음 공직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저는 3년 반 동안 보직을 받지 못했습니다. 집의 가친께서 당시의 최강경 야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정책의장, 사무총장 같은 당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보다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하고 청렴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생존의 법칙처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됐습니다. 또, 부친께서는 제가 중요한 공직에 나가게 될 때마다 ‘가족비상계엄령’을 선포하시곤 했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이 저에게 어떤 청탁이나 인사를 부탁하지 않도록 하는 그런 비상계엄령이었습니다.
제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전남도지사로 일하던 때였습니다. 부친께서는 남의 돈을 받지 말고 또, 판공비를 사적인 용도로 쓰지 말라는 뜻으로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돈을 거둬서 매월 사적인 판공비를 송금해 주신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청렴을 실천하는 데 처음에는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돈을 거절하는 방법이 서툴렀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인간관계까지 끊어지는 고충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거절하는 방법, 즉 돈을 기분 나쁘지 않게 사절하는, 말하자면 ‘거절의 수사학’을 연구하고 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돈을 가져 올 때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이권이나 특혜를 부탁하는 청탁성 뇌물과 명절 때 이권청탁과는 관계없이 떡값봉투나 가벼운 선물을 가져 오는 경우입니다. 우선, 청탁성 유형의 봉투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주저 없이 거절했습니다. 다음, 이권청탁과는 관계없이 상대방이 명절에 떡값봉투를 내밀 때는 우선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그 정성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봉투는 사양합니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끈덕지게 나오면 “마음만 고맙게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판공비로 충분합니다. 부족할 때는 제가 요청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대부분 이해하면서 기분을 상하지 않고 봉투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란 말이 있습니다. 윗물이 맑지 않으면 아랫물이 맑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윗물이 맑다고 해서 반드시 아랫물이 맑은 것은 아닙니다. 즉 윗물이 맑은 것만으로는 기관 전체 청렴성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하직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청렴의 명구名句’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서 ‘지자이렴智者利廉’이란 구절을 찾아냈습니다. 현명한 사람, 즉 지자智者는 ‘청렴한 것이 자신의 장래에 이롭기 때문에 청렴하다’는 즉 이렴利廉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창창한 장래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제 자신부터 지자이렴의 정신을 지키면서 부하직원들에게 지자이렴을 지키라고 늘 얘기해 왔습니다.
전남 순천에 가면 팔마비八馬碑가 있습니다. 옛날 순천에서는 고을 백성들이 원님이 딴 데로 발령을 받아 떠날 때는 전별금조로 말 여덟 마리를 헌납했다고 합니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사였던 최석이란 사람이 선정을 베풀다가 딴 데로 전임하게 되자 순천백성들은 관례에 따라 최부사에게 말 여덟 마리를 헌납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최부사는 그 동안 낳은 새끼 말 한 마리까지 보태어 말 아홉 마리를 다시 승평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 때부터 헌마폐습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 순천백성들이 최부사의 청렴한 뜻을 기리고자 한 비가 지금까지 순천에 남아 있는 팔마비입니다.
저는 전남지사로 일할 때 도청직원들 조회시에 수시로 이 팔마비의 정신을 얘기했습니다.
“내가 도지사를 하는 동안에는 여덟마리 말이 아니라 한 마리도 받지 않겠다. 서울에서 예산을 따올지언정 이 곳 전남에서는 한푼도 가져가지 않겠다.” 이런 저를 아는 도민들과 도청직원들은 제가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되어 전남을 떠날 때 전별금이란 걸 제 앞에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어떤 공직에서 이임할 때이든 전별금이란 걸 일절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직자의 도덕적인 각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패가 근절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몸담고 있는 기관의 부패를 시스템적으로 방지하고 척결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우리 서울시는 ‘햇볕은 최고의 살균제다’라는 말에 따라서 부패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창안해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시스템이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이 제도는 UN, OECD, 국제투명성기구, 세계은행, 타임지, 비즈니스 위크지 등 세계적인 기관과 언론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전세계 UN 회원국에 이 시스템을 보급하기 위하여 UN과 공동으로 6개국어로 된 매뉴얼을 제작 중에 있습니다. 또한 제가 얼마 전에 수상한 ‘세계청렴인상’은 개인적인 영광인 동시에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수반하는 평생의 멍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절의 수사학과 지자이렴, 팔마비의 정신을 조용히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더욱 결연한 의지를 갖고 시스템적인 부패척결을 통해서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창 행정을 완성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불자 여러분께서 앞으로 많은 조언을 해 주시고 서울시정에 관심을 가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해인사의 무궁한 발전과 불자님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정신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빌어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