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스님들 사이에는 은연중에 산중중, 도회 중하면서 경시와 불신감에 반반섞인 구분들이 있는 것 같다. 옛날 스님들이 보여주었던 이판승이냐 사판승이냐 하는 상호 존중하고 또다른 수행의 연장으로서 이해하려던 애정어린 태도와는 달리, 멸시와 배타의 감정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용하여 이질시하고들 한다.
그러한 설익은 태도들은 어찌보면 작금의 절 집안 풍토와 전도된 풍조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폐쇄적 심리에도 원인이 없지 않을 것이다. 사실 승가의 그 오랜 장판지의 때 같은 전통이나 엄격한 가풍의 버팀목들이 무너졌다는 지성의 소리는 어제 오늘에 있는 지척도 아니요, 기존의 가치들이 들볶이는 윤리적 위기 의식은 승-속을 막론하고 그 궤를 같이하는 바라 하지만 그것을 불가항력의 시대의 추세라고 따돌려버리기에는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고 화급한 난제들 투성이다.
문제는 스님들의 어설픈 태도와 구태의연한 의식구조에 있으며 투철한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당초에 중노릇이란 먹줄을 치듯 그 어떤 가상의 목적의식이나, 얻고자 하는 소유의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바에야 장소나 때를 탓하거나 절대적 가치의 신봉자가 되어 목을 빼고 기다리는, 그야말로 타율적이고 소극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선방에 있을 수도 있고, 도회지에서 포교도 할 수 있으며, 주지도 할 수 있고, 거리에 나가 데모 대열에 끼어 외칠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주체적 실천과 파기되는 행위들 속에서 보살도 부처도 확인되는 것이며 깨달음도 구체적 사실로 손아귀에 퍼득퍼득한 냄새와 생기 가득한 삶으로 요동칠 것이다. 그렇게 자기 지신이 무한정 바뀌어지고 비워지는 순례 속에서 고정될 수 없는, 아니, 한 가지 모습으로는 가당찮은 부처고 보살을 늘 새로운 실체로 만날 터에, 볏단 속에서 모이찾는 닭처럼 부처를 한 곳에서만 고집한다는 것은 또다른 이름의 미혹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몇몇 스님들이 자기가 처한 곳에서 그러한 사명과 불법을 실천하는 마음가짐으로 노심초사 촛불을 밝히듯 뜨겁게 자신을 태우고 있는지. 그 주어진 소임에 합당하리만치 열심이고 보살의 희생적 정신을 발휘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도 벼슬이라고 있는 자리에 전전긍긍 연연하는 ‘가사를 걸친 마군 파수’는 되어 있지 않은지. 또한 금력과 권력에 탐닉하여 부처님을 파는, 저 숫타니 파아타에 나오는, 죽어도 못 쓸 비린 것이나 되지는 않았는지. 출가한 사문이라면 마땅히 경계해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채찍질해서 쫓아버려야 할 것들이건만, 눈과 귀에 들어오는 말과 주위에서 벌어지는 눈꼴사나운 작태들은 그렇지만도 않다보니, 갓 머리깎은 젊은 스님들의 갈등과 방황은 엉뚱한 모습으로 변질, 왜곡, 도태될 것은 뻔한 이치이며, 심지어는 십년이 넘게 중노릇한 스님들마저 자기 자리 보존이나 세력 형성에 휩쓸려 개인적 삶으로 전락하고 마는 현실이고 보면 너무도 병색이 완연하다 못해 비린내가 등천할 지경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가장 활짝 열려 있어야 할 우리 절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의식구조나 생각들이 예상 외로 딱딱한 철갑 상어이고 옹고집들이다. 물론 종교 집단이 주는 교조적 자기 틀 속에 갇혀버리는 것도 상상 안 해보는 바도 아니지만, 대다수의 젊은 스님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넘어 서글퍼지기도 한다. 입으로는 시방세계가 곧 겨자씨에 값한다느니 무애자재라느니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서슬푸른 말들을 곧잘 서슴없이 상용어처럼 사용하기도 하면서, 막상 그 어떤 낯선 것에 당하여서는 전혀 다른 표변이고 칠통을 닮은 사람처럼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경전에 있는 교리들이 곧바로 자기것이 되어버린 양 으르딱딱 해석할 뿐 아니라 자기도취와 협소증에 빠져버리는 것에도 함정은 있을 것이다. 종교적 사상은 피나는 체험이며 부단한 자기 부정 속에서만이 새로운 정화력을 얻는다는 것을 아침 저녁으로 늘 깨달아 샘물 길어올리듯 퍼올려야 하리라.
그러나 그 무엇에 앞서야 할 일은 그 어떤 곳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있건 서로가 서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의 열림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한한 진리 앞에 선 자의 겸허한 마음가짐인 것이기에. 지금까지 가져왔던 소위 ‘중이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도식적이고 협의의 가치에 꿰맞추어서 법조문 읽듯 꾸짖지 말자는 것이다. 포교하는 이도, 선방 수좌도, 주지하는 이도, 그외 자기 소양과 적성에 맞게 익혀가고 노력하는 이들 모두가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책보따리를 싸들고 쫓겨가는 젊은 스님들의 슬픔을 되풀이하여 안겨주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불사라고 생각하고 장려할 때 그야말로 우리의 절 집안은 큰 열림으로 변신하고 발전을 꾀하는, 승가라는 이름에 걸맞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화합의 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