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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나를 만드는 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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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강행원 1997년 11월 189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정신적으로는 혼란스럽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을 느낄 만큼 빠른 변화의 물결에 숨가쁜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다투어 눈에 보이는 새로운 것과 귀에 들리는 다양한 정보를 쫓아 경쟁사회로 우리를 내몰고 있는 현실은 오욕으로 얼룩져 한없이 어두워 보인다. 또 미래를 짊어질 신세대들의 창조적인 모습이라 여기는 영상미디어에 대한 눈길은 몽롱한 열광으로 어지러운 마당이 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의 틀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인 ‘마음’이 언제 조용히 쉴 틈이 있을지 참 답답히다.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계율이나 도덕에 움직이며 사는 것이 이니라 여론이라는 무명의 힘에 따라 움직이며 산다. 특히 정치인들은 여론을 생명체로 여기기까지 한다. 우리의 생활 문화에서 이름 없는 어두운 실체를 어떻게 회복 할 것인지 하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불법佛法의 연기도리緣起道理를 이해하면서부터 부처님을 향해 한없는 그리움을 안고 산다. 무명으로 혼미한 이 시대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진리는 한사람을 만날때마다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아마 진리의 향기가 배어들면 쉽게 가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만 해도 세계 종교사상사는 동양사고의 종교세계는 검증하지 못한 채 서구사상 만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을 보아왔다. 그 사상적 정의는 신과 인간의 관계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서구사회의 종교는 세상을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보아 온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자기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로서 그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해결되고 또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실아왔다. 이러한 신과 인간의 관계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으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밝음이 있음을 믿고 인간 스스로가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동양사고의 종교가 바로 불교다. 문聞, 사思, 수修. 듣고, 생각(사색)하고, 실천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불교에 있음을 검증한 뒤부터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기독교 중심의 서구사상은 폐기되었다. 그 뒤 종교사상의 정의는 새롭게 탄생되었으며 그 학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종교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참 지혜의 모습이다.” 동서를 구별한 것은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다행히도 동서를 융합한 새로운 학설의 탄생은 혼미한 이 시대에 걸맞는 이정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어쩌면 불교사상에 더 깊이 접근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현대인의 화두인 무명을 풀어내는 정답을 제시하고 있다. 문聞, 사思, 修를 행하는 일이야말로 무명이라는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빛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수 있다.
첨단 과학의 물질문명이 극에 달한 지금 우리의 겉모습은 잘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속모습은 덴마크의 철인 키엘 케골이 말했듯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다. 이러한 양면의 갈등 구조 속에서 겪는 우리의 정신은 더욱 혼미해져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렇게 눈이 어두워진 것은 한줄기 무상한 욕망의 덫에 걸려 업력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그림을 그리는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거나 보는 눈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다. 이러한 까닭은 우리 동업 중생이 함께 겪는 공업력公業力의 소산일 것이다.

“그대가 만일 위대한 예술가가 되려면 일체의 슬픔과 고뇌를 마음에서 추방하고 그대 마음을 거울같이 맑게 하라.” 이 말은 르네상스 시대를 살다 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의 제자 조바니에게 한 말이다. 진리의 정신에는 시대를 넘어 동서가 따로 없는 것 같다. 음미해 보면 욕망의 덫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는 슬픔과 고뇌를 지워 버릴수 없음을 간파한 말이다. 욕망의 부패한 때가 끼어 있다면 마음은 거울같이 맑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과佛果를 이루는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마음을 맑히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사명은 시람의 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습을 늘 새롭게 해 주는데 있다. 작품의 순수성, 진실성, 일관성을 보여주는 제작 과정에서 일찍이 있던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모방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바퀴의 예를 들어 보면, 사람의 다리와는 전혀 다른 둥근 모양의 바퀴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얼마나 엉뚱한 모습인가? 육안을 통해서 보는 현상적인 모습이 사뭇 다르다고 해도 쓰임새가 같은 것이 활용하기에 따라 얼마나 편리한 것이 되는지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분명 산업사회의 과학사에 대한 혁명이었다.
창조의 훈습은 다리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통한 초현실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초현실은 우연인가 과학적인 의도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다분히 비판적인 논리 전개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이것이 과학적 의도나 우연이라기 보다는 예술혼을 익힌 훈습으로 얻어진 결과물이다. 마음을 맑히는 데는 좋은 훈습이 절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종교의 사명인 지계持戒를 들 수 있다.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 그 관습이 몸에 익어서 자유스러움을 얻으면 차츰 밝은 마음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도리에서는 어떤 사항도 다 있을 수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세계에서도 훈습이 생긴다고 한다.
불법은 해가 함께 사는 삼라만상이 내 생명과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학이나 물리학의 공헌 없이는 불타의 교리도 그 빛이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시대를 맞고 있으나 첨단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긍하고 있다. 삼라만상을 이루고 있는 생명 속에는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유정 중생과 생각할 능력이 없는 무정 중생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 무정중생도 환경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 훈습의 인연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시냇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곳에서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고 자란 대나무를 베어서 퉁소나 단소를 만들면 그 소리가 한결 영롱하다. 그리고 오동나무 역시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나무로 거문고나 가야금을 만들면 다른 오동나무 악기보다 그 소리 울림이 뛰어나게 아름답다고 한다.
좋은 훈습을 기르게 되면 그 습관은 좋은 업이 되고 좋은 업은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밝은 나를 이룰 수 있으리라.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