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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나와 이웃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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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묘주 1991년 06월 112호
서울 거리는 요 몇 년 사이에 교통체증이 부쩍 심해졌다. 기사들끼리 언성올 높여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상대방의 순간적인 실수로 나까지 생명을 뼈앗길 수도 있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도 역정을 내는 것은 주위 사랍들올 찌중나게 만든다. 나는 주로 지하철올 이용하지만, 부득이 돼시를 탈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기사아저씨들은 친절하게 대해주는데, 간혹 퉁명스러운 기사를 만날 때가 었다. 한번은 기사가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해진 때도 있었다. 불쾌함올 참고 점잖게 한마디 해주고 내렸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착한 행동이 이웃에 주는 감동보다도, 한 사람의 자제되지 못한 불쾌한 행위가 주위 사랍들에게 미치는 여화가 더 큰 것 같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렇잖아도 별로 살맛이 나지 않는 요즘, 도섬 속에서 살아가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롭다.
불자가 닦아야 할 여섯 가지 덕목〔六彼羅寶〕중에 인욕바라밀이 있다. 인욕바라밀(Ksanti-paramita)은 괴로움을 편안한 마음으로 참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몸에 밴 끝없는 인내이다. 인욕은 결코 비굴이나 굴욕이 아니다. 인욕은 여유있는 사람의 넉넉한 행동이다. 「금강경」에 다툼이 없는 삼매라는 말이 나온다. 상대방이 악의를 품고 아무리 시비를 걸고 해를 입히고자 해도, 이쪽에서 마음의 동요없이 오로지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결코 다툼이 되지 않는다. 참으로 멋진 수행자의 경지이다. 이것은 모든 사물이 연기(緣起)로 쩌 존재하므로 독립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반야공(般若)의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얻어진다. 또환 인욕은 현재를 최대한으로 열심히 사는 사랍의 굳건한 의지이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금방 좌절해서 “역시 나는 안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마음가짐으로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젠가 나는 분노와 미움으로 잠을 못 이룬 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심각했었다. 나는 자기에게 해를 입힌 적이 없는데. 아니 썩 잘 해주는 못했어도, 인격을 존중해주고 할 만큼 해주었는데. 그런데 나를 이렇게 모욕하다니.
내가 인덕이 부족하구나-----생각할수록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는 내가 그 동안 닦은 수행력이 이정도밖에 안되는가 하는 자책감이 뒤섞여서, 몸과 마음이 무척 피곤해졌다.
다음날 새벽, 겨우 예불을 드리고 나서 차 한걷f올 들면서 그 얼의 전후를 차근차근하게 생각해보았다.
차츰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상대방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 나에게도 허물이 적지 않음을 깨달았다.
상대방의 기분을 혜아리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만 행동했었구나.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하고 우직하게 감정만 내었구나. 설사 내가 잘못이 없더라도 대범하게 넘겼어야 했는데------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되도록이면 상대방의 입장을 이혜하고, 성을 내기 전에 먼저 일의 전후를 판단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나의 인격적 결함을 고쳐준 고마운 도반이다.
평소 인욕바라밀을 몸에 배게 하려면-다른 바라밀 수행도 마찬가지이지만-반복된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인욕을 잘하기 위한 평소의 마음가짐을 다옴과 같이 들 수 있다. 첫째, 성을 내기 전에 먼저 일의 전후를 객관적으로 조사·판단하려고 의식적으혹 노력 해야 한다. 둘째,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견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내가 옳은 것 같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나의 잘못도 있음을 우리는 경험해 본 적이 었다. 셋째, 불쾌한 감정은 되도록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마음 속에 담아 두고 되새가면, 새록새록 분해지고, 그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까지 한꺼번에 솟구쳐서 한이 맺힐 수도 었다. 작은 불씨를 소훌히 넘겨서 방치하면 커다란 화재로 진전되듯이. 만약 어떤 사랍이 나를 모욕하고 괴로움을 준다면, 역정부터 낼 것이 아니라,
“아, 저 사람이 지금 나에게 인욕바라밀을 닦을 기회를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인욕바라밀은 모든 일에 무조건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불의 앞에서도 참는 것은 인욕이 아니라 비굴이다. 일부 부도덕한 정치 ·경제계 지도충 인사들의 비리, 일부 몰지각한 이교도들의 훼불행위 앞에서 불자들의 인욕바라밀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 이에 대처하는 방법론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진정한 분노, 파사현정의 금강보검을 높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인욕바라밀은 연기(緣起) ·중도(中道)·공(空) 의 이치를 투철하게 깨우친 위없는 지혜廠若에서 가능하다.


묘주스님은 이리 연국사로 출가하여 동국대 불교대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지금은 동국대 경주 캠퍼스에서 불교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