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시작도 없이 흐르는 세월에 새해라는 마디를 그어 송구영신(送舊迎新)하고 마음 청소를 하며 새 삶을 다짐하는 인간의 지혜가 새삼 예지로워 보이고 고마우니 철이 뒤늦게 드나 보다. 해야 늘 같은 모양으로 뜨고 지지만 3백65일주기로 새해라 이름하여 모두 함께 거듭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만 하여도 희망차고 뜻깊다. 이러한 새해의 의미를 경오년 새아침에 되새기게 되었으니 올 새아침 나는 더더욱 정복(淨福)을 느낀다.
90년대의 첫문을 여는 경오년 설날 아침 나의 발원은 아주 소박하면서도 어쩌면 원대하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우선 나부터 시작하여 모든 불자들이 한명씩의 이웃을 부처님 앞으로 인도해 진리의 말씀에 눈 뜨고 귀 열 수 있도록 전법하고 포교하자는 발원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가까운 데서부터 불법을 전해 간다면 우리 주변에는 부처님 법음이 늘 충만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음이 충만하여 불교를 믿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온누리에 가득하면 늘 질서가 유지되고 화합과 평화의 꽃이 사시사철 피어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한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까닭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부처님께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이셨기에 우리는 그 가르침을 배우고 믿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대중의 근기에 맞게 아주 상세하게 일러주셨으므로 우리는 마치 공식에 대입하여 수학문제를 풀듯 그대로만 살면 행복할수가 있다. ‘행복의 길’이 환히 열려있는데도 개인의 가슴에 번뇌가 끊이지 않고 중생계에 시비와 불화가 들끊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생심 때문일 것이다. 남보다 내가 제일 잘나고 싶고 뭐든지 우선하고 싶고 이 세상 좋은 것은 다 갖고 싶고 오래 살고 싶고 그러다 보니 나만을 위한 욕심에 눈이 멀어 남을 비방하게 되고 성내고 마침내는 그러한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중생계는 그래서 늘 시끄럽고 어두울 수밖에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중생계의 속성과 원인을 제거하고 그 구덩이에 열반의 꽃이 피어날 수 있는 법등(法燈)을 밝히셨다. 마치 새해 아침 찬란한 태양이 희망차게 솟아 오르듯 우리 모두의 가슴에 빛의 세계를 열어주셨다. 그러므로 법이요 진리요 열반이신 부처님 말씀대로만 산다면 그곳에는 행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누가 이‘행복의 길’을 마다 할 것인가.
불교에서는 행복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보살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을 서원한 선남자 선여인들이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걷는 길의 첫 덕목으로 보시(布拖)하는 생활을 강조하셨다. 자기를 드러내지 말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가운데 남에게 주는 일을 행하라고 금강경에서 거듭 거듭 당부하셨다.
남에게 주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티끌만한 것이라도 내 것을 들어 내려면 아깝다는 말이 앞서,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것이 중생심이다. 한없고 끝없는 소유욕, 인간의 그 본능 때문에 탐심은 우리 마음에 잡초처럼 돋아나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 누누히 일러주신 보시는 바로 탐심 제거의 묘약이다.
흔히 “준다”고 하면 손해보는 일로 생각하기 쉽다. 특히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러하리라. 그러나 참으로 줄줄 아는 사람은 주는 마음이 거두는 풍요로운 수확의 의미를 알 것이다. 사람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삶이란 너와 나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 이웃의 희노애락이 언젠가는 내게 파급되는 연계성을 지니는 것이 우리의 삶이므로 너와 나는 엄연한 개체이면서 상관관계를 이루는 공동체다. 그래서 주는 것은 곧 받는 것이며 이웃사랑은 곧 나를 아끼는 것과 같다.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꼭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길을 가다가 길을 묻는 이가 있으면 좀 바쁘더라도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이웃을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하고 미안해 하는 자세는 모두 주는마음에서 비롯된 ‘보시’다. 이렇듯 마음으로 줄 줄 알아야만 물질도 선뜻 내놓을 수가 있다.
내가 아는 동국대학교의 人교수는 지하철에서 발을 밟히고는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함께 사과를하자, 되차“미안하다”고 함께 사과를 했다. 이유인즉 상대방으로 하여금 발을. 밟게 한 원인이 자신이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거룩한 법문인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기를 돌아보는 그 교수의 넉넉한 마음씀은 그대로 넉넉한 ‘보시’다.
나는 이웃에게 어떤 존재인가 남을 위해 무엇을 도울 것인가를 수시로 점검하고 생활화하게 되면 주는 마음, 즉 보시는 몸에 익어 습(習)이 될 것이다.
물론 히루 아침에 간단히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닦고 또 닦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경(經)을 수지독송하며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고 염불독송을 천만번 한다 해도 이는 묘약을 두고 먹지않음과 다르지 않다.
한 해의 삶을 새롭게 결의하는 경오년 새아침, 이 땅의 불자들은 한결같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을 다시금 발원하자 8만4천 법문 모두 소중하지만 새해에는 보시바라밀을 자기 수행의 첫 덕목으로 삼아 탐심을 탈색하자 그리고 한사람씩의 이웃을 꼭 불교와 인연맺도록 전법하자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화합과 평화를 구가하는 보살의 길을 걸으면, 거기 행복이 가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