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 않은 세월을 절집안 사랍으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추구하는 일 가운데 그저 지나쳐 보내버리는 것도 있고, 관심올 두어 마음 속에 담아두는 것도 있다.
마음 속의 기억은 오래 머무는가 하면 금세 잊어버리기도 하고 자주 바뀌기도 한다. 한데 요사이 나의 마음 속에 지속적으로 머무름으로 남아 생각게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함께 시는 문제’에 관해서다. 열심히 사는 것이지 색달리 무엇올 추구하는 것이 부질없게도 보이지만 기뽑 속에 ‘함께 사는 문제’라면 정직하게 고민해 화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같이 살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행복감을 갖고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는 거창한 구호나 거대한 계획의 광포(廣布)가 아닌 소박한 내면의 소리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일구어가는 여러길을 제시하는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보시라는 덕목이었다. 보시라는 선업의 행위가 불교의 교리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고 발생한 연훤 동은 무엇인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덕목이 출가자인 나에게 던지는 의미를 결코 잊지 못하게 할 기억이 었다. 쓰고 남은 몇 푼을 건네주고 자기 위안을 삼으려 하는 마음과 고답적인 교리의 되놔임을 뛰어넘어 혼신의 힘으로 나누는 보시행올 실천하는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로 기억된다. 도시로 떠난 젊은 이들이 늘 그리워하면서도 지킬 수 없게 되어 떠나야만 하는 곳, 들녘이 농민들의 땀방울로 적셔지고 있는 농촌 마을에 몇몇 젊은이들이 찾아들었다. 차린 옷차림으로 보아 한참 생기발랄한 낭만적 사고에 젖어 자신의 관심사에 따묻혀 젊은날을 보낼 듯한, 농민들의 한숨이 스며 있는 농촌의 들녘도 신선한 공기, 맑은 물, 명화로운 전원 동 책에 나오는 글귀 정도로나 알고 있을 젊은이들로 보였다. 이들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어스릅 땅거미가 다가오는 저녁무렵까지 손발을 걷어 불이고 온 몸을 땀으로 홈빽 적신 채바쁜 농촌일손올 돕고 있었다. 정작평생을 농촌에 살아 일이라면 이골이 난 농민들도 힘들어 한숨짓는 일이건만, 농사일에 처음인 듯한 이들은 싫어 마지못해 하는 표정이나 선의를 베풀고 있다는 자만심 따위는 그들의 행동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없었다. 어쩌 힘들지 않으랴. 34~35도를 넘나들던 월의 폭염 아래서의 첫 농사일이… 묵묵히 일해 나가는 젊은이들. 마치 머리 속에 앓으로만 채워졌던 지식들의 허물올 하나하나 벗져내 살아있는 체험으로 되살리려는 고행자의 몸짓같이 그리고 그곳을 떠나 왔었다.
그후 나는 수행을 해가는 과정 중에 깨달음과 그실천에 관한 번민에 휩싸일 때나, 수행 그 자체가 뭇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되새기며 위안 받으려 하나 그것이 공허해질 때면, 그때 그 농촌의 젊은이들을 떠올려 보곤 한다. 공허한 이론, 난삽한 언어의 유회가 아닌 진실한 행동의 보시는 행하는 자들의 건강한 모습과 같이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이런 상상을 해본다.
세상엔 많은 사람이 각자의 역할과 특성올 지니고 살아간다. 아니 새상이라면 너무 광활하고 막연하다. 그보다는 한반도로 해보자 한반도 하면 아직도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북녘이 었으니 남한만으로 국한시켜 생각해 본다.
어디를 가나 푸근함과 넉녁함을 가진 곳이며, 모든 사람들의 고향처럼 생각하는 농촌, 봄부터 여름을 지나 결실의 가올올 맞아 곡식을 거둬들인다. 거둬들인 곡식은 자기 가족이 먹올 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자. 이웃은 농사짓는 이웃이 아니라 도시의 이웃올 말하는 거다. 그저 마지 못해 나누는 이웃이 아니라 내가 부양하는 가족 같은 이웃으로 도시 사랍들은 기계 ·신발·스훼터 ·빵·옴료수 동강가지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물건들, 자기 들이 쓸 만큼 남긴 채 나머지는 필요로 하는 다른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자. 어거지가 아닌 이웃올 진정한 가족으로 삼아. 지식인들,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 하는 수단으로서의 오늘날과 같은 왜곡된 형태가 아닌 마땅히 나누어야 할 지식으로 여겨 내 이웃과 나눈다.
아! 이런 세상이라면 거기에는 주는 자의 사삭스러운 자만이나 받는 이의 겸연쩍은 비굴함이 끼어들 겨를이 없을 것이고, 배운 이의 오만스러운 거드름이나 배우지 못한 이의 한스러운 자괴감이 어디 있으랴.
이런 살맛나는 세상올 이루는 것도 나눔(보시)을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주는 이나 받는 이나 아무런 허물이 없는 청정한 무주상보시를.
산빛이 짙어 간다. 새소리가 싱그럽다. 이마저도 같이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지성스님은 백양사로 출가하여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지금은 제방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