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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라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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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불교 - 일지 1991년 06월 112호
인고(忍苦)의 스승
어느 시대이건 진리의 탐구자들은 스송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쿠마라지바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당시 스물을 갓 넘긴 젊은 수재 승조(僧肇)가 멀리 장안에서 그를 찾아 고장(站臟)까지 달려온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후진(後秦)의 왕 요흥(挑興, 366-416)에게까지 전해졌다. 요왕은 우여곡절 끝에 고장(故藏)을 치고 쿠마라지바를 장안에 영입했다. 현대의 우리로서는 일개 한 사람의 불교사상가를 영업하기 위해서 국가적인 힘을 기울였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쿠마라지바 시대의 중국과 중앙아시아에서 불교는 확실히 새로운 물결이었다. 또한 그들에게 불교란 해탈을 컬하는 사상이라기보다는 어떤 신비적인 능력을 가진 종교로 생각되고 있었다. 권력자들은 불교승려들의 영감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쿠마라지바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고승들의 전기는 그들이 모두 신비적인 초능력의 소유자들로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의 고승들은 왕의 정치고문이었다.
전기는 쿠마라지바를 예언의 달인(達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쿠마라지바가 장안에 도착한 때는 흥시(弘始) 3년, 서기 401년 12월이었다. 이때 쿠마라지바의 나이 53세. 그는 이채 사상가로서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쿠마라지바는 이때부터 후진(後奏)의 국가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전대미문의 대번역사업을 시작한다.
쿠마라지바 시기의 불전(佛典)번역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번역과는 좀 다른 점이 었다. 종교성전으로서 불전의 번역이란 그 번역올 맡은 당사자들의 사상적 권위와 고도의 학문적 기반을 요구받았다. 또한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 간의 이질성, 문화체계를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다. 단음절제(單音節制monoysUabic)의 중국어와 어미굴절(infiexional endings)이 심한 산스크리트어는 그 언어권마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불교성전어(佛敎聖典語)인 산스크리트어와 팔리(pah)어는 인도·유러피안(Undo-Ellmpean)어족에 속한다. 그러나 중국어는 지노·티베탄{Sino-Tibetan}어 족에 속한다. 확실히 다른 언어였다. 언어는 사상과 문화를 낳는다. 따라서 어떤 사상과 문화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그 사상의 언어를 숙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에 불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서기 1세기경부터 숱한 중국인들은 불교의 고향, 붓다의 땅 인디아로 떠났다. 붓다의 유적올 순례하려는 종교적인 의지와 함께 불교사상의 본질을 붓다의 언어로서 체득하려는 정열이 그들을 인디아로 떠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의 그 웅대한 한역(漢譯) 대장경은 멀고 험난한 실크로드를 통과해서 붓다의 땅 인디아를 찾아간 숱한 구법자(求法者)들의 정열과 희생으로 이룩된 것이다. 고대동양과 서양을 연결했던 비단길, 무역과 사장의 전술통로였던 실크로드(Sillg-mad)는 그 이름처럼 부드러운 길이 아니었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독일의 지리학자 EE El히트호땐(Richthofen, 1833~1905)의 대저 「중국(china)」에 실련 ‘견직물의 길(Seidensσaen)’의 영역 실크로드(SiU‘s-road)에서 유래된것이다.
중국의 승려 법현(法顆)은 339년 장안을 출발하여 실크로드를 지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서북인디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부인디아와 스리랑카를 거쳐 해로(海路)를 따라 413년 중국 남부의 청주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여행기 「불국기(佛屬記)」에서 자신의 실크로드 체험을 이렇게 쓴다.
‘악귀(惡鬼)와 열풍(熱風)이 많다. 이를 만나면 모두 죽어 남는 것이라고는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 위를 달리는 짐승이라고는 없다. 사방을 바라보아도 방향조차 잡을 수 없으며 다만 죽은 사람의 뼈를 표식으로 할 뿐이다.’ 이와 같이 험난한 사막의 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걸리는 여행,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조차 할 수 없는 구법(求法)의 길을 그들은 붓다의 땅을 찾아간다는 일념으로 떠났던 것이다. 7세기경 25년간이나 인디아를 여행했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저자 의정(義淨, 635-713)은 그 시름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구법의 길 떠나신 분
백이 넘으나 돌아오신 숫자 열이
채 못 되니 후인이 어찌
웃대의 어려움을 알리오
去者成百廳無十 後者安知前者難
서로 완전히 다른 이질의 세계를 연결하기에 고심했던 이 시기에 쿠마라지바의 경력과 사상적 수련은 이 두 문화권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는 인디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의 명암(椰暗)을 모두 체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상가에게 있어 여행이란 그 사장의 진폭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쿠마라지바의 경전번역온 바로 그 자신의 불교, 인도철학의 강조에서 시작된다. 원전(原典)과 언어의 상호연관성에 관한 엄밀한 검토없이 수준 높은 경전번역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의 강조에서 교리학·문법학·논리학을 강의했다. 쿠마라지바의 번역센터는 바로 대규모의 불교연구원(佛敎硏究院)이었다. 왕은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학승 팔백여 명을 소집하여 번역사업에 참가시켰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올 다했던 것이다. 쿠마라지바는 천생(天生)의 명문가(名文家)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훈련된 그의 암기력을 바탕으로 산스크리트어 불전(佛典)을 유려한 한어(薰語)로 옮겼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여러 갈래의 불교가 들어와 있었으나 이 이국(異園) 학문의 본질은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인도의 불교철학은 중국의 고전적 사유, 특히 도가(道家)철학과의 비유를 통해서 수용되고 있었다.
이른바 격의불교(格義佛敎)시대였다. 중국불교의 본격적인 불교이해는 쿠마라지바 학파의 노력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쿠마라지바가 장안에 도착한 A.D. 401년. 그보다 16년 전에 입척한 명승 도안(道安, 312~385)은 반야(般若)의 사상이 인간의 깊은 예지를 표명하고 있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상의 본질올 완전히 밝힐 수 없어서 유감이라는 탄식을 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불교계의 원로(元老)였던 도안역시 부견의 귀의롤 받고 있었다. 도안은 왕 부견에게 말했다.
“지금 중앙아시야에 사문(뺑門) 쿠마라지바가 었다. 그를 초치하자. 쿠마라지야말로 불교의 진정한 대가(大家)이다.”
결국 쿠마라지바외 중국행(中斷f)은 도안의 쿠마라지바 발견에 의해서 그 운명의 실마리가 맺어지재 된 것이다. 도안은 푸마라지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거장들은 항상 서로의 세계를 알고 있다. 그것이 인간관계의 숨은 비밀인 것이다. 「위서(훌훌)」 제114권 석노지에 의하면 도안은 매일 쿠마라지바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환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마 쿠마라지바가 장안에 도착한 후 도안의 제자였던 여산(I훌山)의 혜원(慧遺, 334-416)은 쿠마라지바에게 깊은 폰경의 염(念)을 표하는 서신을 띄우고 가르침을 청했으며 그들의 왕복 서신은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이라는 문헌으로 엮어졌다. 혜원의 쿠마라지바 접촉용 스숭 도안의 유지를 이은 것이다.
하여튼 쿠마라지바의 존재는 신선한 미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또한 펀마라지바의 학문과 인간됨은 당시의 중국 인탤리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 번 역사업에 참가한 쿠마라지바의 제자들은 갚은 감동을 느꼈다. 전기(홉훌E)는 쿠마라지바가 어진 성품과 대범한 마음을 가솜에 품은 사람이었다고 기록한다. 더구나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종일 사람들을 위해 일했으나 피곤한 줄 모르는 인고(忍苦)의 스승이었다 사람들은 중국에 붓다의 정신올 개화시킬 수 있는 사상의 원천을 쿠마라지바에게서 구한 것이다. 그러나 쿠마라지바는 409년 돌연히 죽었다. 그 십여 년 간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문제의 「반야경」을 시작으로 「법화경」 ·「유마경」 ·「십지경」 ·「금강반야경」 등의 대승경전파 나가르츄나의 저작 「중론(中論) ·「대지도론」 ·「십주비파사론」, 제바提婆, Arya Deva)의 저작 「백론」 등 총300여 권의 경천을 산스크리트어에서 현어(漢語)로 옮겼다. 양과 질(質)에 있어서 그의 번역은 역경사상) 전우후무한 것이었다. 또한 쿠마따지바의 손길을 거친 경전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불교권의 기초가 닦여졌다.
그는 「반야경」에 의해서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을 밝혔으며 「유마경」에 의해서 대승이 소승보다 깊은 종교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했다. 또 「법화경」에 의해서 크나큰 생명의 실상(實相)을 강조했다. 그의 시대 이후 동아시아불교는 완전히 쿠마라지바의 번역경전을 통해 교리의 해석 및 독자적인 종파형성의 길을 가게 된다. 예를 들어 길장의 삼론종(三論宗)은 그 종명(宗名)대로 「중론」 ·「백론」·「십이문론」을 중심으로 하여 쿠마라지바의 교학올 직접 계숭하고 있다. 천태지의(天台智觸의 천태종(天台宗)도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대지도론)의 영향을 다분히 받고 있으며 동시에 그가 번역한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웅대한 천태교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선불교(禪佛數)역시 반야사상의 탁월한 해석차이며 쿠마라지바의 제자인 숭조(뺨훌)의 「조론(훌꿇)」을 애독하고 있다. 정토종 또한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무량수경」·「아미타경」 ·「십주비파사론」에 의해 그 교리적 기초를 수립해 가는 것이다. 쿠마라지바는 「대지도론」에서 아미타신앙올 논한다. 그는 중국에 대승불교의 정토사상을 삼은 인물이었다.

쿠마라지바의 淨土思想
여기서 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쿠마라지바는 정토교 경전의 번역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내면에 깔려 있는 정토(種土)에의 염원이다. 정토사상의 본질은 구원이다. 숙업의 올가미에 묶여 있는 연약한 인간, 그 어둠의 나락올 갚이 바라본 인간의 종교인 것이다. 탐욕과 무지, 그리고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있는 인간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염리예토·자력절망(厭離樓土 自力望)’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인간은 붓다의 대자비 ·본원(本願)에 귀투하여 정토를 열망하는 것이다. 이것을 ‘혼구정토·타력투귀라고 한다. 그러나 정토사상은 절대 연약한 신앙이 아니다. 스스로의 죄업을 참회하고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 정토(淨土)를 구현하려는 실천의 신앙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죄업을 웅시한다는 것은 결코 연약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정토사상이 중국의 기존적인 왕토(王土)사상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상의 모든 것은 왕에게 귀속된다는 왕토사상은 모든 존재가 명둥하며, 정토는 모든 중생에게 열려 있는 대동(大同)의 세계라는 자각 앞에서 그 절대적인 권위를 잃었다. 그리고 정토사상은 승려들이 독점하는 불교(佛敎)도 아니었다. 쿠마라지바는 단순히 어학의 천재, 불교사상의 거장만은 아니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란의 와중에서 보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참담한 죄업을 누구보다도 깊이 절망하고 있던 사장가였다. 우리가 표면적인 시각만으로 그를 보면 그는 중국불교의 방향을 결정지은 수많은 경전의 번역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내면에 눈길을 돌림으로써 인간 쿠마라지바의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사상가도, 종교의 개조(開祖)도 정치가도 모두 인간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상도 그 실체는 결국 인간이 어느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체험했던 사실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즉 역A}는 체혐의 투영인 것이다. 이 투영이 모든 개인의 상이한 체험에 의해 굴절되면서 그 사상의 단층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선택하는 가치관의 굴절이 생겨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쿠마라지바가 자신의 숙업을 웅시하는 솔직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만년의 쿠마라지바를 정말 어쩔 수 없게 만든 일이 있었다. 쿠마라지바의 학문과 인간됨을 지켜본 왕 부견은 생각한다. ‘이 사람의 총명과 깊은 깨달음은 천하에 으뜸이다. 만약 후손이 없다면 그의 재능은 다시 후세에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의 후손을 잇도록 하자.’ 이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아마도 국왕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올 것이다. 쿠마라지바는 이 지나친 친절에 저항할 수 없었다. 왕은 그에게 남자로서의 생활을 강요했다. 그는 이미 나한의 예언대로 서른다섯에 파계했지만 이번의 일은 정말 대파계였다. 그 이후 쿠마라지바는 매일의 강의에 앞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만이 연꽃은 피어난다. 모두들 연꽃의 향기만을 취할 뿐 더러운 진흙은 보지 말아주기 바란다.”
수명의 여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의 생활은 진흙속의 생활과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쿠마라지바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생활은 보지 말아달라고 괴로운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이번호부터 ‘특별연재/인간과 사상’ 난제목이 ‘에세이 불교/인간과 사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일지스님은 1974년 백양사로 출가하여 해인사 강원과 율원을 수료한 뒤 서옹사께 선불교 수업을 쌓았다. 한때<선사상> <월간법회>의 편집일을 하기도 했으며, 낙산사 교무를 역임했다. 역서로는 <임제록>을 비롯한 여러권과 ‘현대중공의 불교인식’이라는 논문으로 제1회 해인상 <학술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에 논문으로 ‘임제선사상의 서적구조’ ‘한역 불교 속의 도가사상’ ‘처기 불교의 재인식’등 여러 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