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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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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 현응 1987년 07월 65호
대도무문(大道無門)
사제님, 비상한 시대에는 비상한 사상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생각 체제를 아무리 고양하더라도 결코 새 생각에 도달할 수 없읍니다. 새생각, 새행동은 결코 옛생각, 옛행동이 진보한 결과가 아니라 혁명적인 창조 및 전환의 결과입니다. 재차 강조할 점은 깨달음(돈오)을 대상적인 어떤 세계나 경지를 터득한 주관적인 심리적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이원론적 입장으로서 깨달음을 통상적인 인식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존재와 인식의 분리할 수 없는 역동적 구조를 체득하는 일로서 정진적인 절차가 아닌 혁명적 전환으로 대상존재의 차원이거나 인식주관만의 차원이 아닌, 그 둘의 종합적인 세계를 맞는 일입니다. 또한 이는 앎과 행동의 선후 관계가 아닌,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체현을 뜻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혁명성을 이해하기 위해 혜능스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스님은 오늘날 선종의 실질적 종조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을 보다 구체화시킨 장본인입니다. 스님은 수행을 점진적 노력이라고 주장하는 동료의 시에 반박하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스승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혁명적) 못은 바로 진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바탕
언제나 갈고 닦아서
먼지 하나 묻히지 마세 -신수스님
(점진적) 진리의 나무란 본디 없는 것이며
맑은 거울 또한 무슨 바탕이 아니로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어떠한 실재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묻으랴 -혜능스님
신수스님은 깨달음을 점진적인 노력의 소산으로 보는 반면, 혜능스님은 ‘맑은 거울’이나 ‘진리’로 상징되는 인식의 체계나 진리를 보는 기준까지도 고정화하여 상징하지 않는 철저한 공(空)의 입장에 서서 깨달음에 들어서는 길이 점진적인 절차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읍니다. 즉 먼지 자체가 실재가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고 먼지가 끼게 되는 그 어떤 바탕 그것조차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위에 나타나는 먼지의 문제는 자연 해결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안경에 묻은 색이나 먼지를 닦아내면 무엇하느냐? 무색투명의 안경이 되더라도 사족이다. 왜 하필 안경을 써야 된다는(사물을 ‘어떤 기준’이나 ‘어떤 논리 체계’로서 비춰본다는 식의) 생각을 하느냐? 어떠한 안경도 벗어 버리자, 부쉬 버리자, 이것이 혜능스님의 “본래 한 물꼬도 없다”는 말씀의 요점이지요.
이러한 혜능스님의 혁명적 가풍은 그의 후학인 혜해스님에 의해 ‘돈(頓)이란 단박에 모든 잘못된 견해를 철폐하는 것이며, 오(悟)란 어떤 논리나 내용의 실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頓除妄念 悟無所得.”는 명쾌한 해석을 거쳐, 송(宋)때의 혜개스님의 “진리에 들어서는 문은 없다 大道無門.”라는 역설적 명제에 이르러 그 극치를 이룹니다.
“진리에 들어서는 문은 없다”는 말은 진리에 들어가는 ‘방법’ 이 없다는 뜻으로 어떠한 노력이나 수행도 진리의 경지에 들어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표방한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공한 줄을 알아서 어떤 것에도 국집되지 않은, 해방된 마음의 상태를 진리의 경지라 한다면, 이러한 상태가 되기 이전의 노력이나 수행은 그 어떤 것에 물든 의식의 지향하는 바입니다 그것이 인식적 차원의 얽매임이든, 존재적 차원의 얽매임이든, 두 영역이 어우러진 형태의 것이든 관계없이 실재의식의 사로잡힘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다스려서 순수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재의식 위에 건립된 것인 이상 실재의식을 떠난 공의 세계와는 논리적으로 무관한 것이 됩니다. 아무리 인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노력이 깊이 진행되었더라도 존재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아무리 존재로부터 해방되려는 노력을 하여도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될 수 없읍니다. 따라서 ‘진리에 들어서는 문은 없다”는 표현은 공의 세계를 깨닫기 이전의 사유와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축적되고 정리된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세계와는 본질적 연관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깨달음’ 이 깨달음 이전의 사고와 행위의 축적된 결과가 아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것이라는 점은 논리학의 말을 벌자면 “깨달음이란 귀납법적인 결론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귀납법적 인식 방법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근대에 와선 서구의 철학적 사조에서도 일반화된 경향인데, 이를테면 고전 인과성을 부정하면서 “낱개의 관찰에 의한 진술 문장을 아무리 많이 모은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제한적인 일반적 진술 문장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흄의 태도나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나 법칙은 귀납적 인식 방법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는 방법적 논리란 없다. 모든 발견은 ‘비합리적 요소’ 혹은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창조적 직관’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포퍼). “순수 연역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모습을 추출해 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법칙을 탐색했지만 그런 법칙에 이르는 논리적 법칙은 없다. ‘이론은 관찰의 결과로부터 조작될 수 없고, 그것은 오직 창안될 수 있을 뿐이다”(아인슈타인)라고 말하는 과학철학자들의 이야기는 불교수행자에게도 많은 느낌을 줍니다.
깨달음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보면, 어떤 견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까지도 그것이 공을 깨닫기 이전의 상태라면 그 상태는 아직 어떤 실재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어서 열린 공의 세계와는 무관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수행 자체가 무의미하다거나 포기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논리적으로 볼 땐 인과적인 결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한 노력이 깨달음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통해서건 일상적인 생활 체험에서건 경전 귀절의 관조나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통찰 등으로 인해 문득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러한 일들이 인과적인 입장에서 깨달음의 필연적인 선행요건은 아니지만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혜개스님도 ‘대도무문’이라는 명제에 이어 ‘천차유로(千差有路 ; 어디에도 길은 있다)’라는 두번째 명제를 잇달아 제시했던 것입니다. 실로 선종사(禪宗史)에서 보듯 많은 선사들의 깨달음은 다양하지만 모두 독특한 각자의 체험이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 유의할 때 특히 선적인 수행에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의 오류를 지양하면서 깨달음에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오류란 첫째가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생각에서 빚는 갖가지 행위와 사유’ (산란)이며 또 하나는 ‘어떠한 행위나 생각 그리고 노력까지도 부정하여 없애려고 하는 일종의 허무의식’(혼침)입니다.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체도 ‘진리’ 라든지 ‘깨달음’이라는 것에 구애된 실재관념의 소산이므로 지양되어야 하며, 한편 의식이 지향점을 잃어 아무 목적도 없이 그 의식작용마저 없애려고 하는 행위도 결국 무기력과 끝없는 어둠으로 흐를 뿐이란 점에서 배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유형의 폐단을 극복하면서 긴장과 맑음을 잃지 않는 조화로운 수행을 ‘성적등지(惺寂等持 ; 깨어 있는 긴장과, 실재의식에서 해방된 상태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일)’의 수행법이라 하여, 고래로 선사들이 늘상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러한 ‘성적등지’의 수행을 통해 경험주의가 낳는 천박성과 편협성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며 또 회의주의가 낳는 비역사성 또는 반역사성으로부터도 보호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제님이 아직도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 미심쩍어한다면 지난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십우도(十牛圖)이야기를 상기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열 가지 단계의 소 찾는 그림으로 구성된 이 우화는 ‘통상적으로 점진적인 수행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매우 잘못된 해석이지요. 이 우화는 소를 찾아 길들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소가 소 아닌줄 깨닫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인데, 이 우화의 여덟째 단계인 ‘사람과 소가 다 없어짐(人牛俱亡)’의 상태야말로 돈오, 즉 혁명적 깨달음의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가 사라짐은 실재화된 대상으로서의 존재개념이 사라짐이며, 사람이 사라짐은 실재화된 인식주관이 철폐됩입니다. 따라서 ‘사람과 소가 모두 없어짐’은 인식으로부터의 해방과 존재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적으로 성취한 ‘혁명적 깨달음’의 양상이며, 인식적 공과 존재적 공의 이중 구조의 공의 세계에 뛰어듦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비로소 미망의 역사에서 깨달음의 장으로 무대가 일전되는 것입니다. 몇 이러한 상황은 선후 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짐이 아닌 혁명적 상황을 통한 깨달음의 장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상태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차원이 됩니다.
소를 자유자재로 훈련하여 사람과 소가 혼연일치가 되는 일곱번째까지의 노력 및 성취와, 소와 사람이 실재가 아님을 알아채는 여덟번째 단계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을 갖지못하며, 거기엔 깊은 논리적 틈이 있읍니다. 이 말은 사람과 소가 한꺼번에 동시에 사라지기 이전의 즉 깨달음 이전의 상태에서의 노력이나 행위가 깨달음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미망의 상태에서의 행위나 노력의 축적이 깨달음에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기왕의 노력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 이전의 노력과 깨달음 사이의 논리적 틈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이 점이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리하여 깨달음이란 그를 추구하는 시간과 노력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익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황벽스님의 말씀은 이러한 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신시켜 주고 있읍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한순간에 무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수행하더라도 도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도를 이루겠다는 그 의지와 노력에 구속당하기 때문에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심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는 사람마다 그 기간이 길고 짧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곧장 무심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과정에서(十信, 十住, 十廻向) 무심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과 정신의 영역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열 가지 단계의 성인의 경지(十地)를 거쳐서 비로소 무심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마다 수행하는 과정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지만, 무심의 경지가 되어야만 도를 이루는 것이지 수행하는 과정의 노력그 자체는 도와 본질적 연관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무심의 정지란 어떤 내용을 이해하거나 얻는다는 것을 뜻함이 아니다. 다만 어떤 고정된 입장이나 관점을 취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 건강함으로 작용하는 진실된 시각이다. 이러한 무심의 경지는 한순간에 도달했거나 한없이 오랜 세월의 노력을 통해 도달했거나 관계없이 깨달음의 시각에 있어 그 능력이 차이나는 것은 아니다.’ -전심법요 중에서(전등록 9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