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 : 관능적인 욕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저는 가끔저 자신이 성적인 욕망의 노예처럼 여겨집니다.
답 : 그런 욕망이 일 때는 이 몸이란 부정(不淨)하고 집착할 것이 못된다고 관(觀)함으로써 평정을 얻어야 한다.
성적 욕망이 일어날 때, 이 몸뚱아리는 단지 피와 살과 배설물 등으로 되어 있을 뿐이라고 보면 그런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물음 : 화는 어떻습니까? 화가 날 땐 어찌 해야 합니까?
답 : 자애심을 일으키도록하라. 일상생활 중에 화가 나면 자비심을 내서 조화를 찾도록 하라. 설사 어떤 사람이 옳지 못한 일을 하고 화를 내더라도 그대는 화를 내지 마라. 같이 화를 낸다면 그들보다 더 무지한 사람이 될 뿐이다. 현명하게 자비심을 가지고 사랑스런 형제처럼 그들을 대하라. 마치 참선을 하듯 그대의 자비심에 집중해서 이 세상 모든 중생에게까지 퍼지도록 하라. 오직 자비심만이 증오심을 극복 할 수 있다.
그대는 가끔 다른 승려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보고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필요치 않으며 올바른 공부법도 아니다. 그대는 가끔 “저 사람은 나만큼 계율을 잘 지키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우리만큼 참선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저 승려들은 좋은 수행자가 못 된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그대 자신의 순수치 못한 부분이다. 비교하거나 구별하지 마라. 그대의 이런 생각들을 놓아버리고 그대 자신을, 그대의 생각들을 주시하라. 이것이 우리들의 올바른 공부법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대처럼 행동하길 바라고 그대처럼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런 바램은 단지 그대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이것은 우리 수행자들의 일반적인 단점이며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으로는 참지혜를 개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마땅히 알라. 그처 단순히 그대 자신을, 그대의 느낌을 시험하라.
물음 : 저는 잠이 많습니다. 이것이 저의 참선공부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답 : 잠을 극복하는 데는 많은 길이 있다. 어두운 곳에 앉아있다면 밝은 곳으로 장소를 옮기고 눈을 뜨거나 혹은 일어서거나, 얼굴을 씻거나 목욕을 하라. 자세를 바꾸거나 많이 걷는 것도 좋다. 또, 뒤로 걷기를 하는 것도 뭔가에 부딪칠까싶어 잠을 깨게 할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가만히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밝은 햇빛이 꽉 차 있음을 상상하라. 혹은 높은 절벽 끝이라든지 깊은 우물 가에 앉아 있으면 잠이 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방법들이 통하지 않거든 그때는 자도록 하라. 천천히 누우면서 완전히 잠드는 순간까지를 주시하고 잠에서 깨면 바로 일어나 시계를 보지도 말고 깨어난 그 순간부터 공부하도록 하라.
만약 그대가 본시 짐이 많다고 생각되면 음식을 적게 먹도록 하라. 다섯 숟가락 정도를 덜 먹는 대신 물을 먹도록 하고 그대의 잠과 배고픔을 관찰해 보라. 그대는 반드시 음식조절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하다보면 정진에 더욱 힘이 나고 덜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을 자기에게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음 : 여기서는 절을 많이 하는데 왜 그래야 합니까?
답 : 절은 수행의 일부인 외형적인 형식이긴 하나 아주 중요하다. 절을 할 때 올바르게 해야 한다. 머리를 마루에까지 닿게 하고 팔꿈치를 무릎 가까이 하라. 그리고 손 사이를 8센티 정도 띄우라. 그대의 몸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하도록 하라. 절은 우리의 아만심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다. 우리는 절을 자주 해야 한다. 우리가 정성스레 삼배를 할 때, 순수하고 빛나고 평화스런 삼보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절하는 것이 비록 외형적이긴 하나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방편으로 삼아 몸과 마음의 조회를 이루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절하는지를 살펴볼 필요는 없다. 설사 어린 사미승들의 서투른 모습이나 나이든 승려들의 산만한 모습을 대할지라도 그대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훈련이란 본시 어려운 것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빠르게 배우는 이도 있고 느리게 배우는 이도 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대의 아만심만을 높이는 것이다. 남을 관찰하는 대신에 그대 자신을 관찰하라. 자주 절을 하고 그대의 아만심을 제거하도록 하라. 그러나 참으로 진리와 조화를 이룬 사람은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게 된다. 그들은 무엇을 하거나 절 아님이 없다. 걸으면서 절을 하고 먹으면서도 절을 하고 변을 보면서도 절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물음 : 새로운 제자들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거리는 무엇입니까?
답 : 모든 것에 대한 견해나 생각 즉 그들 자신과 수행,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견해나 생각들이다.
여기에 오는 많은 사람들이 현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부유한 기업인이라든지 대학생, 교수, 정부 관리인 등이다. 그들은 그들 마음 속에 모든 것들에 대한 그들대로의 의견이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너무 영리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컵 속의 물과 같아서, 만약 컵 속이 더럽고 상한 물로 차 있다면 이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런 더러운 물을 쏟아버린 후에야 컵은 쓸모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 마음 속의 모든 의견들을 비워 버려라. 그래야 그대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수행은 영리함이나 어리석음을 초월해 있다. 만약 그대가 “나는 영리하다. 나는 부자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불교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무아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 ‘나’, ‘나의 것’이란 아상에 잡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열반이란 비고 비어 절대공(空)이다.
물음 : 욕심내고 화내는 등의 오염된 마음은 단순환 환영입니까, 아니면 실제입니까?
답 : 둘 다이다. 갈망, 욕심, 성냄, 미혹 등은 단순한 외형적인 이름이고 모습일 뿐이다. 우리가 바루를 크다 작다 예쁘다 등으로 부르는 것처럼,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구로부터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큰 바루를 원할 때 우리는 눈 앞의 것을 작다고 한다. 갈망이 분별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란 그저 있는 그대로이다.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당신은 남자인가?” 하고 물으면 그대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물의 외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대의 본모습은 서로 변화하는 요소들이 모인 집합체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대자유를 얻는다면 모든 분별심은 없어진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너와 내가 없다. 아무 것도 없고 무아일 뿐이다. 더 깊은 진리를 말한다면 실로 아(我)로 무아(無我)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음 : 공부중에 어떤 신비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필요한지요?
답 : 그런 것은 필요치 않다. 평안한 마음과 한 곳에 집중하는 것으혹로그대 자신을 시험하라. 특별히 필요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공부중에 특별한 경계가 나타나면 그대로 두라.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그것에 집착해서 매달려 버린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에 대해 분명한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대가 현명하다면, 아여와 어른의 한계를 알듯이 경계의 한계와 용도를 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