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없고 형상이 없고는 법성을 일컬은 것이다. 삼라만상 어떤 우주의 자체로 그 성은 이름이나 형상을 가지고서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법이 그러하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모든 이치는 이름과 형상의 밖에 벗어나 있다. 우리들이 서로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이름을 붙이고 형상을 그려볼 뿐이다.
「잡아함경(繼阿含經)」 47. 25의 박카리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는 부처님이시며 부처님은 바로 법이라는 말씀이십니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교외 벨루바나 정시헤 계실때였습니다.
박카리라는 제자가 중병이 들어서 어느 용기장이 집에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어 죽기 전에 부처님을 한번 뵙기를 원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직접 옹기장이 집에 박카리를 찾아가서 만나셨습니다. 병든 박카리는 위대하신 부처님을 뵈옵게 되어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려고 일어나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박카리를 눕히면서 자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떠냐 박카리여 ! 병은 견딜 만하느냐. 얼마나 아프냐?”
“부처님이시여, 저는 회복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뵙고 발 밑에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몸으로는 도저히 벨루바나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박차리야! 나의 늙은 이 몸을 보고 예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대는 이렇게 알지 않으면 안된다. 법(진리 ·이법 ·이치)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이 말올 듣고 박카리는 깨달음을 얻었고 평안하게 목숨을 마쳤습니다.
진리를 보는 자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온갖 이름과 형상을 벗어난 진리는 아득하게만 여겨질 수도 있을 법합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의 “만약 형상이나 음성을 통하여 나를 보거나 나를 만났다고 한다면 그는 삿된 믿음을 가진 자이묘로 끝내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道 見如來]”라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갖 것이 끊이었다는 말로써 미칠 수 없고 마음으로도 혜아릴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言語道斷 心行處
사람이 가지는 감각기관을 오관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런 감각기관을 믿고 살아가고 있지요 그러나 다시 꼼꼼이 생각해 보면 이 기관이 완전한 것도 아니고 자주 변하고 바뀌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올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완전하지 못하며 자주 변하고 바뀌는 것은 주체성이 없이 떠돌게 됩니다. 이러한 떠돌이를 윤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며 부실한 것이지요. 우리의 육체를 이루고 었는 지수화풍 사대로 거짓으로 이름올 붙인 것이므로 가사대(假醒大)라고 불립니다. 진실은 이름이나 형상이거나 그 무엇으로도 불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름과 형상 퉁 온갖 것에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포함되어 었으면서도 어떤 하나에만 매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름과 형상을 떠남으로써 있고 없다는 유무(有無)를 벗어나지만 그 있고 없음에 통하고, 옛과 이제가 없으면서도 고금(古今)에 통하는 것이 법입니다. 있고 없다는 유무는 두 모양이고 움직임이며 이름과 형상이므로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법은 본래 경계를 초월했으나 법에 미혹하여 경계를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이 끊어졌을 때는 법이 되지만 경계에 미하게 되면 참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지혜로 알 일일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라고 한참 지혜는 막히고 걸림이 없습니다. 법의 성에는 본래 돗이 없지만 여 성품을 미하여 뜻이 생기고’ 뜻이 생기면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본체가 달라져서 만상의 경계를 이루게 되는 것업니다. 이로 말미암아 생사의 윤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대개 뜻과 생각이 깨끗하고 더러움과 좋고 싫어하는 차별을 일으키므로 선(善)과 악(惡)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깨끗함·좋음·선은 성인이 일어나는 원인이지만, 더러움·싫어함·악함은 범부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계를 이루는 뜻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범부와 성인이 모두 끊어지므로 경계 또 법의 성품이 둥달어서 두 모양이 본래 없고 모든 법이 동함 없이 본래부터 고요해라 이름 없고 형상 없고 온갖 것이 끊였으니 참 지혜로 알 일일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라고 한 것은 바른 법을 표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이 되는 것이요, 이것밖에는 표방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보살이 나와서 법문을 하고 부처님께서는 오직 묵연히 품명을 하시는 도리는 보살이 성품을 이미 깨달았으나 아직 생각과 뜻이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을 깨달은 범부(覺有情)라고 했으며 보살의 육도만행이 이로써 시작 되는 것입니다. 보살도 그러한데 다른 연각 생문의 이승들은 참된 법의 생을 알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둥글어서 지혜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고 깨끗함이 지극하여 뜻과 생각을 이미 다 끊었습니다. 그 때문에 부처님에게는 두 모양이 없고 통합이 없고 이름 없고 형상 없어 모든 경계를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 한 분 이외에는 모두가 미혹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 해가 떠 있으나 구름이 가리워져 있으면 땅이 어둡거나 그늘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은 하늘에서 생기지만 미혹을 벗어나면 참 지혜가 생기는 것은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맑고 밝은 햇볕의 크게 깨끗하고 눈부심이 나타나는 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과 뜻이 짧은 사람도 있고 두터운 사람도 있는 것은 마치 구름이 앓아 맑기도 하고 짙어지면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구름의 짙고 앓은 차별이 있지만 하늘에 빛을 가리는 것이 한가지이며 생각과 뜻의 짧고 두터움의 다름이 있지만 성품에는 온갖 짓이 끊어져서 다른 경계를 이1루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은 바랍이 불어 와서 푼 구름을 쓸어 내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불교를 믿는 이는 맑은 바람을 좋아하고, 맑은 바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미혹함이므로 크게 잘못됨을 알 것입니다.
무관스님은 월정사로 출가하여 해인강원을 나왔다. 대구 은적사 부설 룸비니 유치원장을 거쳐 강주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월간해인사의 편집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