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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분배 - 1.초기교단의 불타 정신을 되살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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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소허 1987년 07월 65호
스님, 문안드립니다. 몸 건강하시고, 마음 편안하시고, 공부 열심히 하시고, 그리고 뭐야… 좌우지간 잘 계시는 것이 눈에 빤히 보입니다.
돈 많고, 물건 많고, 사람 많고, 인심 많고, 책 많은 곳에서 그야말로 금세기의 최대의 물질적 ·정신적 풍요를 누리시리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슬픕니다. 웬고하니, 우리늘 어쩔 수 없이 한반 도인임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삶을 타고났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렇게 남의 나라에 가 계시는 스님같은 분을 생각할 땐 더욱 그렇단 말입니다. 부의 혜택이나 정신과 문화의 혜택이 어느 특정 개인이나 소수에게서 독점 ·독식으로 누려질 때에 편재 현상으로서의 착취와 수탈은 자동적으로 따르며, 그것은 곧 그렇지 못한 이웃의 희생과 슬픔을 낳습니다. 그러한 부의 편재, 문화의 편재를 누리는 것을 호도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기득 계급의 민중 착취 술어인 “복(福)이 많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고, 우리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니, 진작부터 우리는 지배자의 논리에 놀아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모르는 우리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럽고, 부끄럽고, 슬프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명명백백합니다. 대명천지에 숨길 것이 하나도 없읍니다. 기존의 정신 문화의 패턴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암적 존재로서 지배자의 논리에 그 충실한 시녀 노릇을 해왔던 것입니다.
분단조국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저들 이윤 집단의 이기심으로 우리는 더더욱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있읍니다. 그 곳 왜놈 땅에서는 더욱 이 일이 객관화되어 잘보이리라 생각되지만, 그러나 이 일은 객관화해서 풀릴 일이 아님은 천하가 다 압니다.
부디 불타 정신의 시대적 되살림으로 한반도, 그나마 반쪼가리 땅을 양쪽 철책에서 나누어 지킴으로 식민지적 질곡에서 신음하는 우리 공동 운명체에 새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소서. 이러한 관전에서 원시 불교-스님의 전공?-의 시대적 사명은, 그것이 만약 그러한 것을 가졌다면, 무엇일까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 하는 사람들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처한 분단 현실로서의 한반도 인식과 그러한 한반도인(人)의식(意識)이 결여된 제반 학문적 ·실천적 구현은 위선이요 독선이기 쉬운 것이 우리의 한반도적 특수 상황입니다.
할 말은 태산 같으나 이만 쓸랍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누구 있어 행복하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 시대에 행복은 죄악이다.
그래서 많이 가졌다거나 행복하다는 것은 그대로 죄악이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이라도 헐벗고 굶주린 억압받는 이웃이 있다면, 우리들의 행복은 최악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다 함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슬프거나 기쁘지 않다면 죄악이다.
우리의 기쁨이 이웃의 슬픔을 대가로 하여 얻어진 것이라면, 그 기쁨은 죄악이다.
우리의 행복이 이웃의 불행을 대가로 하여 얻어진 것이라면, 그 행복은 죄악이다.
홀로 떨어진 행복이나 슬픔은 있을 수 없다. 더불어 함께살아가는 세상에 서로서로 얽히고 설킨 공동 운명체로서 누구 하나에게라도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내가 그만큼 많이 가짐은 이웃이 그만큼 덜 가지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은 말하자면 착취요, 수탈이요, 횡령이요, 억압이요, 고문이요, 겁탈이요, 유린이요, 한마디로 ‘죽임’이다. 이웃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부의 편재, 권력의 편재, 문화의 편재는, 그러므로 죄악이다.
문제는 이웃의 희생이 없이 이루어진 그 어떤 부의 편재도, 권력의 편재도, 문화의 편재도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에 누구는 힘있고 약삭빠르고 권모술수가 있다 하여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고, 더 잘 먹고 더 잘 산단 말인가.
마땅히 함께 골고루, 똑같이 나누어 갖고, 나누어 먹고, 나누어 살고, 보태어 살고, 엉켜 살고, 섞여 살고, 서로서로 뒹굴어 살고,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인 것처럼, 둘인 것처럼, 여렷인 것처럼, 전체인 것처럼, 하나도 둘도 전체도 뭣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무애자재하게, 호호탕탕하게, 애지중지하게, 동체대비로,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듯, 자비무적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안아보고, 더듬어 보고, 냄새 맡아보고, 들여다보고, 자기 살인 것처럼, 자기 냄새인 것처럼, 제 삶을 확인하듯 확인하여, 하나도 걸리거나 막히거나 갑갑한 데가 없는 광명 천지의 은빛 햇살 너울거림으로 구만리 중천을 넘나드는 열림이요, 자유요, 해방 그 자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당체 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 생각, 한 물건도 열림, 자유, 해방 아난 것이 없어라.”

초기 불교 교단의 의식주 생활은 엄격히 규제된 오직 수행만을 위한 모든 배려로서 지극히 검소한 청빈(淸貧)의 생활, 무소유·무집착의 생활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경제적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일이 없이 고작 하루 한끼 정도를 걸식(탁발)으로 때우고, 밥풀 한일이라도 다음 때를 위하여 비축해 두거나 하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었다-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리의 일각이며 부의 편재적 극대화의 일각인 범양 사건의 비자금이라든가, 뭇 삶의 신앙의 귀의처(절, 교회, 기도원 따위)가 몇천, 몇억원대로 거래된다든가, 명색이 수행자라는 사람이 몇천만 몇억원을 개인 재산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실로 어이없는 허탈감과 함께 인간으로 태어난 사실에 통한(痛恨)을 갖는다.
초기 불교 교단의 수행자들은 소유물이랄 것도 없는, 고작 밥그릇 하나와 조각조각 기운 누더기 한 벌이 소지품의 전부일 수 있었다. 생활 필수품일지라도 내일을 위해 비축해 두는 따위가 있을 수 없어서 꼼 필요할 때에 최소한의 것으로 때우고 말았으니, “소욕으로 족한 줄을 일라. (小欲知足)”는 바로 이를 두고 한말이다.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사시다 길에서 가신 부처님의 행적을 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변에 있느냐를 알아차려야 한다. 한 나무 아래에서 삼일 이상을 지내지 말라는 말씀은 수행자가 가고저 하는 무소유·무집착의 길을 인도하고저 함이다.
부처님 당시의 교단은 일체의 경제적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을 뿐더러 정신적 생산활동으로 경제의 그것을 대신함으로써 자연히 분담 역할 소임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 경제적 생산활동을 금하는 이면에는 올바르지 않은 경제적 생산활동에 따르는 반(反)무소유·무집착적 삶의 필연적 귀결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의 열림, 자유, 해방을 얻고자 하는 뜻도 있다고 본다. 곧, 존재의 실상인 무아(無我), 무상(無常), 열림, 자유, 해방의 실현은 물질과 정신의 검소한 생활인 무소유·무집착을 꾀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일체의 경제적 생산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사회에 기생적 손해를 끼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부처님 항시에도 있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리에 대한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요, 지혜는 내가 밭을 가는 괭이이며, 매일 몸과 마음에서 악업을 제어하니 이는 곧 김을 매는 것이로다. 내가 모는 소는 정진(精進)이니 곧 물러섬 없이 오롯이 나아감으로써 마침내 열림, 자유, 해방의 경지로 나아가는도다. 이처럼 밭 갈고 씨 뿌려 열림, 자유, 해방(감로,甘露)의 열매를 거두노라.”(相應部經典, 7.11. 耕田)
사람이 물질만 가지고 살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밭(心田)을 갈아 정신을 생산하는 것이 경제적 생산 활동으로서의 물질적 생산 이상으로 중요함을 설파하셨다. 사실 물질적 생산의 올바름도 정신의 올바름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저 무턱대고 어리석고 탐욕스러울 뿐이니, 물질의 덕을 보려다가 오히려 해를 입고 마는 결과를 초래함은 우리의 살림살이에서 흔히 체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초기 불교 교단의 정신적 생산은 재가신도의 물질적 생산과 어울려 원만한 합일로서 사람다운 삶의 생활에 그 윤기를 더하지 않았겠나 생각된다. 부처님께서 정신과 물질에 있어서의 무소유·무집착을 설파하심은, 무엇보다도 그대로우리 삶의 열림, 자유, 해방의 길로서 그 어떤 고정된 실체성(實体性 ; 진실로 그것이 있음)을 고집하는 주체도 대상도, 주인도 노예도, 천민도 귀족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높은놈도 낮은놈도 단연코 인정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계급의 모순, 빈부의 모순, 인종의 모순, 분배의 모순 등등의 현실적 고통을 혁파하시고저 길에서 길로 길로 다니시며 한 생각, 한 물건에도 주저앉지 않으신 것이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오셔서 빈손·빈마음으로 가신 빈이치(眞空妙有, 般若)의 당체(딱 그 자리), 그것이었다. 그리고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땅히 한 생각도 붙들린 바 없는 열림, 자유, 해방의 마음으로 살라. (應無所住 而生其心)”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은 그 치유를 불가능케 하는 저 옹골찬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똘똘 뭉쳐 한세상을 망치과 의도하고, 유도하고, 음모하고, 권모술수 · 포석 · 카드 · 원격조정 · 부화뇌동 · 사꾸라 · 들러리 등등온갖 비책과 비리를 불사하고, 갖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이것은 단연코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이제까지 온 인류가 쏟아놓은 배설물을 몽땅 끌어다 한데 보태어본다 해도 이보다는 덜 추하고 냄새가 덜할 것이다.
“실로 욕되고 욕되고 욕되도다.”
초기 불교 교단의 불타 정신을 이 시대에 되살려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무소유 · 무집착의 삶으로서의 더불어 살아감, 나누어 줌, 이른바 보시(布施)를 전제로 하지 않은 물질적 ·정신적 생산은 그대로 착취요, 수탈이요, 겁탈이요, 유린이요, 그러므로 ‘죽임’이다.
더 말해 무엇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