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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이야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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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蘭雪軒 - 김선우 2001년 12월 238호
두 번째- 봄날은 간다
소포 잘 받았습니다. 당신이 보내온 조그만 종이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옹글당글거리며 튀어올라 거실 가득 들어차는 소리들. 종알종알거리면서, 소근거리면서, 거실 귀퉁이와 소파 위와 창틀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뭐라고 저희들끼리 한참을 지지배배거립니다. 상자 속에 갇혀 먼길을 오느라 제법 심심해진 밤톨과 대추알들이 반짝거리며 뿜어내는 잘 여문 갈빛과 고운 다홍빛의 소리들. 당신이 아침 저녁 산보길에 다람쥐들의 눈치를 보며 한 움큼씩 주워 모았을 열매들이 뿜어내는 빛과 소리의 잔치에 소슬한 내 거처의 저물녁이 일순 왁자해집니다.
장난끼 많은 몇몇은 더러 내 어깨에 올라타고 깨금발을 뛰며 귓불에 대고 뭐라고 소근거립니다. 나는 ‘응, 응’ 하면서 건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였지만 개중 고운 낯빛의 소리 하나가 베란다 난간에 훌쩍 올라앉아 지는 해 쪽으로 하염없이 몸 굽혀 갈 때, 고독하고 아름다운 이명 한 줄기가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곳으로부터 스며나와 나를 흔들었습니다. 나는 풀잎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내 속에서 울려오는 이명에 귀 기울였지요. 난간에 앉아 하염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던 고운 낯빛의 그 소리가 흘긋,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먼 하늘로 가볍게 몸을 던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태양이 만들어 내는 매일매일의 폐허 속으로. 허공 가득 뭉개지며 흘러가는 붉디붉은 일몰의 구름, 그 환하고 적요한 폐사지 속으로.
나는 그를 잡을 수도, 무슨 말을 건넬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쉿! 폐허를 향해 비상한 고운 낯빛의 그가 난간 위에 남겨 놓은 나지막한 뒤척임에 귀 기울였을 뿐. 그 뒤척임은 내 귀를 이끌어 먼 산의 나무들이 옷 벗는 소리를 듣게 하였습니다. 인간으로부터 이름을 얻은 나무나 그렇지 않은 나무나 우듬지에서 키우던 마지막 잎새를 마저 떨구어 자기의 발치에 고요히 모시고 있는 풍경. 그 풍경의 안쪽으로 고요한 뒤척임이 그림자 없이 스며드는 이토록 이윽한 늦가을에 이르러서야 나는 문득 중얼거려 보는 것입니다.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라고.
이상하지요. 언제나 두어발짝 느린 나는 계절이 몇 번의 잉걸을 품고 난 후에야 불씨가 옮겨붙던 순간을 간신히 기억해내곤 합니다. 깊은 늦가을, 노랗게 물든 싸리잎들이 눈보라처럼 흩어지고 붉게 물든 단풍잎들이 꽃잎처럼 떨어질 때, 모든 계절이 다른 모든 계절의 이름으로 적멸을 향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봄이 가을의 이름으로, 여름이 겨울의 이름으로 자신의 폐허를 완성해내고 있음을. 그리하여 내가 폐허… 라고 말할 때, 그 폐허의 이미지는 봄과 여름에 가장 강렬해집니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날 어느 오후에 문득 가슴이 뻐끈하게 아파오는 이유를, 진초록으로 이글거리는 여름 숲의 어느 순간이 그토록 서늘해지는 이유를. 봄날이 갔구나! 라고 다 늦은 가을날 문득 중얼거리다가 나는 문득 그녀를 떠올립니다.
언제였던가요. 벌써 오륙년은 더 된 듯한데 화인처럼 기억에 선명한 그 걸인 여자. 단 한 번 스쳐간 어떤 얼굴이 그 단 한 번에 내 존재를 낱낱이 보아버린 듯한 느낌. 스스로 상처라고 믿은 것들 속에서 엄살 떨고 있을 때, 그 얼굴은 갑자기 내게로 와 내 상처들을 들여다보았고 내가 상처라고 믿은 것들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음을 느닷없이 깨닫게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얼굴, 그렇게 그녀는 생애 단 한 번 나와 스쳐가게 운명지워졌던 것 같습니다.
2호선 순환 전철이었지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건너 칸에서 막 건너온 한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도심의 전철에서 구걸을 하는 걸인들이 으레 부르곤하는 찬송가가 아닌, 맙소사,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걸어오고 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앉은뱅이 시늉도 장님 시늉도 하지 않고 타박타박 발소리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온 그녀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씩 갈라지는 새된 음색을 하고 있었지만 이상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눈물의 냄새를 알고 있는, 슬플 때만이 아니라 노여움에도, 생이 허락한 자잘한 행복과 기쁨에도 눈물 흘려 본 이라야 가질 수 있을 법한 목소리였지요. 언뜻언뜻 졸고 있던 내 귀에 감겨드는 그녀의 노랫소리는 한없이 느려지기도 하고 간혹 노래부르는 것을 갑자기 잊은 듯이 뚝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천천히 다가오면서 나는 몹시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망설이며 내가 고개를 든,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 찰나, ‘독한 슬픔’이라는 말이 허락될 수 있다면 저런 얼굴일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지요. 그 때 나는 알 것 같았습니다. 슬픔이 오롯이 슬픔으로만 깊어질 수 있다면 !
슬픔의 뿌리에 평화가 깃들 수도 있음을. 완전한 폐허에 깃드는 자유를.
입성은 남루했지만 그녀는 가벼워 보였습니다. 긴 목이 드러난 앙상한 얼굴이었지만 기이하게 눈빛이 살아 있는 그녀가 흔한 바구니 하나 없이 불쑥 누군가의 앞에 멈추어 서서 손을 내밀 때, 사람들은 이 기이한 구걸의 양식에 적이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손이 내 앞에 멈추었을 때 나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까요. 하마터면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설 뻔 했습니다. 손가락을 곧게 펴고 내밀어진 그 손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손은 내게 말하고 있었지요.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지 않니? 그것을 버리렴. 네가 얻고자 하는 것들이 실은 네가 버려야 할 것들인지도 모른단다.
그녀의 눈. 그 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텅 비어 있으므로 가득 차 있는 눈이었다고 할까요. 그 눈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슬픔이면서 동시에 나의 슬픔이었으며 이미 슬픔 아닌 것에 가 닿아있는 눈이었습니다. 그 눈은 아픈 눈이었으며 아픔마저 사랑하게 된 눈이었습니다. 내 어머니가 시시로 몸져 누울 때마다 병이 동무하잔다, 심상하게 말씀하시며 익숙하고도 독하게 병과 놀아주던 깊은 저녁을 닮아 있는 눈. 그 눈은 찰나의 순간에 내가 지닌 속된 욕망의 정글을 낱낱이 궤뚫고 지나가며 무수한 질문들을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버려 버린 폐허 속에서, 그녀는 세상의 틈바구니에 뿌리 내리고자 안간힘 쓰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지요. 나는 그녀의 눈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 속의 내 슬픔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내 존재의 비밀들, 헐겁고 뜨거운 영혼의 거처를.
고운 낯빛의 소리 한 줄기가 몸을 던지던 구름의 폐사지, 그 속으로 그믐달이 흘러갑니다. 달의 영혼이 구름의 몸 속에서 텅 빈 나를 봅니다. 나는 조용히, 그토록 가득한, 폐허를 영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