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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곁에서, 불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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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재동 1991년 06월 112호
1. 나와 불교
“와따라, 눈까리가 사발이만 하데.” “내사마 무섭아서 똑 죽겠더라캐도.” 통도사를 수학여행 갔다온 국민학교 6학년이던 고모들이 사천왕상을 보고 와서 호롱불 아래서 하던 얘기다. 눈알이 사발만 하다니 ! 나는 상상만혜도 무서웠다. 절이란 그렇게 무서운 곳이구나. ?
“니 울며는 부체(부처)가 ‘이놈 ! ’ 한데이.”부처도 그렇게 무서운가 보다.
그러나 그런 철의 이미지도 나이가 들면서 때로는 한적하며 문학적인 것으로, 때로는 엄숙하고도 친근한 것으로 바뀌어 갔다. 대학교 때는 웬지 불교가 더욱 마옴에 뺑기어서 불교관계 책들을 읽기도 하고, 선을 한답시고 앉기도 하고, 통도사의 그 사천왕상 같은 금강역사를 그려보기도 하였다.
그때부터 내 생각의 근원은 불교가 되었다. 나는 다른 철학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불교식으로 생각한다는 사실로 친구들간에 나의 무지를 커버하고 있었고, 또 한편으론 불교가 가장 높은 사상이라는 궁지도 함께 갖고 있었다.
나는 바랍결에 흔들리는 수없는 나뭇잎새를 보고 존재의 근훤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였고, 끝없는 고독과 고행의 사막에 내 자신을 몰아 넣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한편 이따금 “이게 공(空) 인기 아, 이게 ‘색즉시공(色郞훌空)’이란 그 말인가!” 알 듯 모를 듯하면서도 그런 의문의 끈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늘 잡고 있었다.
졸업을 하자 기어이 집을 나서게 되었다. 어디든 가자, 아무데서나 자고, 무언가 얻어올 때까지.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나’를 찾아보자. 배닝에 슬리명백과 쌀 둥을 넣고 있으니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물으셨다.
“죽으면 어짤라고?” “죽으면 죽는 거지요” “뭐?” 그때는 죽음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돈을 넣어주셨다. 그 길로 가물어 비틀어진 들판과 산, 절과 마올과 바닷가를 돌아다녔다. 나는 심신이 젖은 솜처럼 말할 수 없이 지쳐 쓰러져 갔는데 한순간 거짓말처럽 개운해지면서 ‘서울로 가라’는 마음 속의 명령이 들려왔다. 그때 꽤나 여러 가닥의 생각이 정리되고 번뇌가 사라진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와 교편을 잡기도 했던 나는 또한 끝없이 번뇌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한번은 친구를 따라 부산에 계시는 해산스님이란 견성하신 노스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그 스님은 듣기에, 통도사 조실스님으로 계시다가 부산의 어느 보살 집에 계시며 넓은 방에서 관세음보살상파 탱화를 모시고 제자들올 지도하고 계셨다.
“깨닫고 보니 석가모니도 아미타불도 그 골찌기에 있더라”고 하셨다는 분이다. 또 깨달으시면서 ‘고기잡이 갔다가 고기는 못 잡고 빈 배에 달빛만 가득채워 오더라.’라는 뜻의 오도송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 당시 나는 몹시 교만해서 머리를 잘 숙이지 않았는데 그 스님 앞에 가자 나도 모르게 몸이 쭈그러져 절을 하고 말았다. 내가 그림 그린다고 하니까, ‘옛날 병풍그림을 주문했더니 백지만 었고 귀퉁이에 이름만 씌어 있는 병풍을 주길래 씌어진 그 이름을 부르니까 아륨다운 선녀가 악기를 플으며 마중올 나오더라’는 이야기를 하시며 그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하셨다. 또, “그림은 ‘진짜’를 그려야지 ‘그림자’를 그리면 안돼.
요즘 그림들은 그림자의 그림자도 안되더란 말이다. 저 탱화그림은 한획 한획에 세계가 있고·-----.” 그날은 그렇게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스님을 생각하니 스님의 모습이 온통 빛이었다. 눈·귀 ·코·입… 구멍이란 구멍으론 빛이 마구 새어나왔다. 그리고 스님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인생과 우주의 모든 수수께끼들은 스님을 마주대하자 마치 하루살이 벌레들이 해가 뜨자 순식간에 사라진 듯, 또는 빛을 보자 어둠이 사라진 듯 모두 녹아 사라져버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만 남게 되었다.
이틀날은 스님과 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스님이 앉으라고 부르신 것이다. 스님은 “그립을 그릴 때 무얼로 그리노? 붓이 그림을 그리나 손가락이 그림을 그리나?”고 물으셨다. 나는 빨리 머리를 굴렸다. ‘마음이요’하면 ‘마음이 어디 있노? 내놔라! 보자! ’ 할거고… 이럴 땐 차라리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자. 그래, “모르겠는데요” 했더니 “그것도 모르면서 그림 그리나!” 하셨다.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하고, 눈을 껍벅껍벅하는 이 놈을 알아야돼.” 그러면서 스님은 마음에 대해서 사회생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서 기둥을 붙잡고 울었다. ‘저 사람은 저렇게 견성을 해서 지금 저런데 나는 도대체 이꼴이 뭐란 말언가! ’ 그랬더니 뒤에서 “그래 ! 울어라 울어 !울어야 돼 !”하셨다.

그날은 나도 같이 아침공양올 했다. 밥올 받아 정좌하고 스님의 원력 앞에 앉으니 이대로 그냥 출가해 버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맙고 든든환 스숭의 품과 도닦는 자리,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랬더니 내 앞에 금강역사가 양쪽에 딱 보위하고 서는 것이었다. 이대로 여기서… 그러다가 아니지, 결혼도 해야 되겠고 다른 할일도 생각나고…. 그러는데 스님이 갑자기 “불퇴전 !”하고 한 제
자의 법명올 불렀다. “예”하니까 “불퇴전의 뭇이 무엇고?” “불전에 나아 간다는…” 그러자 스님은 크게 꾸짖어 말씀하셨다. “그게 아니고, 다시는 뒤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란 말이다!”
바로 나보고 하신 말씀이었다. ‘불퇴전 ! ’ 바로 그 자리에서 돌아서지 말아야 하는데…나는 알량한 생각으로 천겁을 놓친 것이었다.
그 후로도 향상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여러 가지 화두들을 생각하면서 생활했다. 풀린 듯하다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특히 매력있는 것이 스님의 화두 ‘눈올 껌뻑껌뻑하는 이놈’이었다. 스님이 필시 이것을 풀고 견성했으리라. 이것 하나만 풀면 이 인생에 보}l 한 건하는 것인데 !
나는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눈을 껌뻑껌뻑하고 앉아 있는 수많은 아이들올 보면 이렇게 묻곤했다.
“이 눈을 껌벅껌뻑하는 아이들아 너그들은 어디서 와서 이렇게 앉아 있냐. 이 주인공들아! 응?” 그러면 아이들은 그저 눈만 껌뻑껌뻑하고 쳐보았다. 그리고 틈틈이 경전들을 들여다 보았다. 그 말씀들이 너무나 삶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성경도 원고 교회도 가보았다.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봄을 기다리던 학교생활이 끝나고 나는 회사에 취직했다가 한겨레신문사에서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나의 닦은 작은 재주가 사회를 위해서 쓸 수 었다는것이 매우 보람스러웠다. 그래서 그림 덕분에 여러 스님들도 알게 되었다. 명진, 보천, 일선, 오성… 스님들과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맑기 때문이다. 이미 욕망의 길을 버리고 도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마음 든든하고 존경스렵다.
그림을 그리다보니까 별것 아닌 사랍도 좋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그림 때문에 만난 일선이란 젊은 스님에게서 다시 그 ‘눈을 껌뻑껌뻑 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그 나, 그 자리’ 에 대해 이야길 들었다. 그때 그것이 풀리는 것 같았다. 매우 기했다. 바로 그건데 말이다! 스님이 가고나자 나중앤 다시 혼돈스러워지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소중한 인식이었다.
나같이 생활 속에서 이따금 불경의 말씀을 생각해 보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삶의 주제를 놓치지 않고, 어제보다 나아지는 오늘을 보는 것이 즐겁다. 하물며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들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나는 가끔 스님네들이 ‘한소식’한다는 말을 들었다. 마치 광맥을 찾는 사람들이 노다지를 캔 것을 얘기하듯. 그러나 그것은 전문가만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야 하는, 그런 소식이 아닐까. 불교로 보면 그 한소식이란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과 네 가지 진리와 여닮 가지 바른 길, 우주의 성품이 본래 평등원만함, 그리고 내가 우주를 경영하고 완성해가는 주인공 바로 그 자라는 사실이 아닐까.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만큼의 소식이다.

2 소귀에 경읽기
나는 아마추어이지만 불교를 사랑한다. 그러면서 늘 아쉬운 것이 있다.
몇 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다. 상가집은 대개 그렇듯 염불 녹음을 틀어놓았다. 그런데 거의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그냥 제례에 쓰이는 음악 처럼, 또는 내용을 모르는 팝송을 듣듯이 듣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 귀에 경읽지였다. 공덕중에 가장 큰 공덕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공덕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나 알아들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산중절에서도 때로 큰 소리로 녹음된 염불소리를 튼다. 확실히 염불은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효고}는 있다. 그러나 아는사랍은 알아듣는지 몰라도 우리 귀엔 외국말이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셰 계실 때------.” 그러면 얼마나 쉽고 좋올까. 회심곡 같은 것이 와 닿지 않은가.
그리고 절 기둥에 붙어 있는 한문글귀도 마찬가지다. 틀림없이 우리들에게 깨달음의 실마리론 줄 수 있는 귀중한 말씀들일텐데 대개는 알 수가 없다. 그건 결코 오늘월 사는 대중이 무식해서가 아니다. 만약 쉬운 한글로 풀어 적혀 있다면 절에 오가는 일반대중들이, 아이나 어른이나, 그 글귀를 보고 한번씩 되뇌어보며 의미를 새겨볼 것이다. 그리고 언챈가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그것이 불교가 대중화되는 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아마도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렇게 내려오니까 그렇게 계속 쓰는것이 아닐까.
또 한가지는 스님들이 한문올 통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한문올 써야 그 ‘맛’이 온다는 것인데 그건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원래 불법이 인도 말로 되었을텐데 그러면 인도말이라야 그 맛이 제대로 올 것이 아닌가.
한글로 옮기기 어려운 것은 그대로 두더라도 가능한 한 전리가 단절되고 특권화되지 않게 하는 노력이 있었으면 한다. 아마도 젊은 스님들 중에는 그런 의식을 가진 분이 많으리라.
다 알고 있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기대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