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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과 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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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야 - 이상해 2001년 12월 238호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이란 이 세상이 이와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이치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인다. 해인사는 그런 ‘법’을 목판에 새겨 놓은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 부른다. 고려대장경은 해인사 법당인 대적광전 뒤에 자리잡은 판전板殿에 모셔져 있다.
판전에 봉안된 경판은 글자를 새긴 판과 경판이 뒤틀리고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덧대었고 마구리를 보호하기 위한 동판이 마구리 네 모퉁이에 부착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가로 길이가 약 70㎝(마구리 포함), 폭이 약 24㎝, 두께가 약 3㎝, 무게가 약 3.5㎏ 전후이다. 글자는 경판의 양면에 해서체로 양각되었는데, 글자를 새긴 한 면의 크기는 가로 약 51cm, 세로 약 22cm이고, 위아래에 경계선을 그었다. 글자 행수行數는 대개 23행이며, 매 행마다 새긴 글자 수는 14자 정도인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경판의 글씨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어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경판에 사용된 나무는 경북대학교의 박상진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가장 많고, 그 이외에 자작나무, 후박나무 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벌목된 나무는 우선 부패와 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통째로 약 삼년 동안 바닷물 속에 담갔다가 이것을 꺼내어 다시 소금물에 삶고, 이를 민물에서 소금기를 뺀 후 그늘에 말려 곱게 다듬은 후, 그 위에 경문을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장경을 판각한 동기, 사용한 나무의 종류, 제작 방법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경판을 판각한 장소, 판각의 과정, 필생筆生(쓴 사람)과 각수刻手(새긴 사람)의 확보와 훈련 및 숫자, 경판을 해인사로 옮긴 이유, 옮긴 시기, 옮긴 경로와 방법, 경판의 정확한 숫자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많다. 고려대장경이 언제 해인사로 옮겨져 봉안되었는가 하는 것은 고려말 설, 1398년 설(조선 태조 7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적어도 1399년(조선 정종 원년) 1월 이전에 해인사에 봉안된 것은 확실하다.
국보 제 52호로 지정된 판전 건물은 현재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판전은 대장경전, 대장경 판당, 장경각, 대장경 판고 등으로도 불린다. 이들 명칭 중에서 ‘판고’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인들이 ‘대장경판을 보관한 창고’라는 의미로 폄하하여 붙인 명칭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판고라고 적어 설명한 자료들이 발간되고 있다. 판전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초기인 1457년(세조 3) 어명으로 판전 마흔여 칸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 후 1488년(성종 19) 서른 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하고 보안당普眼堂으로 이름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판전이 현재 규모로 중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판전을 포함한 해인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의 전화를 면하였다. 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년 왜란 때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戰火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과 소백산 그리고 가야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인사가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과 의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왜군은 거창, 성주를 지나 북상하며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눈독을 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수차에 걸쳐 고려대장경을 요구한 기록(1399년, 1414년, 1415년, 1416년, 1417년, 1422년, 1423년, 1424년, 1425년, 1429년, 1431년, 1449년, 1450년 등)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기 때문이다. 해인사를 왜군의 전화로부터 지켜낸 것은 소암昭岩 대사가 이끈 해인사 승병과 거창, 합천 일대에서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이 이끈 의병이 가야산으로 접근하려는 왜군의 진로를 목숨 걸고 막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는 1695년(숙종 21)부터 1871년(고종 8)까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대장경이 봉안된 판전 건물에는 화마가 닿지 않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고려대장경이 위기를 맞은 것은 조선 후기 화재 때만이 아니었다. 고려대장경은 6·25전쟁 때도 또 한 번 잿더미로 변할 위기를 맞았으나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차단되어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어들자 이들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령부는 1951년 9월 18일 해인사에 공중 폭격을 단행하는 작전을 편다. 하지만, 당시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폭격 명령 지점인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 상공에서 기수를 돌린다. 그 날 저녁, 명령 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한 점,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으면서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 점 등을 들며,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고 답한다.
이렇게 많은 전란과 화재에서 화를 면한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판전 일곽은 50m가 넘는 동서로 길쭉한 마당과 그 사방 둘레에 배치된 네 동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쪽에 해당하는 대적광전 쪽에 위치한 긴 건물은 하전下殿인 수다라장修多羅藏이고, 뒤에 있는 안쪽의 긴 건물은 상전上殿인 법보전法寶殿이다. 이 두 건물의 동·서쪽 양끝 사이에 있는 작은 두 동의 건물은 각각 동사간전東寺刊殿, 서사간전西寺刊殿이라 한다. 법보전과 수다라장은 각각 정면 열다섯 칸, 측면 두 칸이고, 동·서사간전은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건물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에는 국보 제 32호로 지정된 고려대장경판이, 동·서사간전에는 국보 제 206호로 지정된 해인사 자체에서 새긴 판이 보존되어 있다.


수다라장 정면에는 가운데 칸에 둥그스름한 곡선으로 처리하여 뚫은 음전한 문틀이 달렸고, 이 곳을 통해 판전 일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나 있다. 수다라장 후면은 그냥 상하 인방과 문설주만으로 짠 직사각형 문틀이 달려 있고, 문은 달지 않았다. 법보전은 수다라장 뒤로 약 16m 떨어져 있고, 건물 중앙칸에는 벽을 쳐서 비로자나불을 중앙에 모시고 그 양쪽에 문수·보현 보살을 모셨다. 건물의 규모나 구조 형식은 기본적으로 수다라장과 같다. 박상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수다라장 건물 기둥에 사용된 나무는 잣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등이고, 법보전은 모두 느티나무이다.
판전은 건물이 자리잡을 입지와 건물 자체의 과학적,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경판을 잘 봉안할 수 있도록 우수하게 처리한 점으로 건축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판전 건물의 입지를 보면, 판전은 높이가 1,430m인 가야산의 중턱에 해당되는 해발 약 655m 되는 높이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다. 서남향은 해인사 뒤쪽의 가야산 주봉主峰이나, 앞쪽의 남산 제일봉 중 그 어느 봉우리와도 일직선의 축을 형성하지 않는 좌향이다. 오히려 판전이 자리잡은 좌향은 바람의 흐름과 크게 관련된다. 해인사 주변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주방향인 동남향과 달리 서남향으로 좌향을 하여 건물을 앉힘으로써 사찰 아래에서 동남풍으로 불어 올라오는 습기가 많은 바람이 판전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판전을 타고 돌아 퓜?옆으로 비스듬히 스쳐 지나게 한 것이다. 특히 습기가 많은 여름 동남풍은 판전을 타고 돌아 옆으로 흘러 나간다.
판전이 서 있는 해발 약 655m가 되는 지점은 계곡에서 올라온 공기의 습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고, 산봉우리에서 흘러내려 온 공기는 습도가 올라가는 고도이기도 하다. 이는 곧 건물 내부의 적절한 습도 유지와 직결된다. 판전은 이와 같이 습도조절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상적 조건을 갖춘 가야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서남향을 한 판전 건물의 좌향은 일조日照와도 관련된다. 건물 주변 어느 곳에도 영구 음영陰影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판전의 일조환경 조절에 중요한데, 이에 알맞은 좌향이 바로 서남향이다. 일년 내내 건물 주위 지면에 햇볕이 비치는 데 유리한 좌향이 서남향이기 때문이다.
지형조건의 이용뿐 아니라 판전 건물 자체를 보면, 수다라장과 법보전 두 건물의 각 벽면에는 아래와 위로 두 열로 살창을 내어 아래 창과 윗 창의 크기를 서로 다르게 하였다. 두 건물 모두 앞 벽면의 창은 윗 것이 작고 아랫 것이 크며, 뒷 벽면의 창은 아랫 것이 작고 윗 것이 크다. 이는 건물 뒤쪽의 산에서 내려오는 건조한 공기가 위의 큰 창을 통해 건물 내부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반면, 앞쪽에는 큰 창을 아래에 둠으로써 골짜기에서 불어 올라오는 습한 공기를 어느 정도 차단함과 동시에 건물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실내를 한 바퀴 돌아 고루 퍼진 후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처리한 것이다.
경판의 변형이 적게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온도, 습도, 통풍 등 실내기후 조절이 중요하다. 건물 내부 통풍은 원활하여야 하고, 계절과 낮밤에 따른 습도와 온도의 변화는 적어야 하며, 또 실내에는 항상 일정한 공기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판전의 창은 인공이 아닌 자연기후 조절로 해결하고 있다.
경판을 보관한 판가板架 역시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배열돼 있다. 원래 판전 내부에는 다섯 단으로 된 판가가 건물 길이를 따라 가운데와 뒤쪽에만 벽면과 평행을 이루며 두 줄로 길게 서 있었다. 벽면을 따라 비워 둔 앞쪽의 실내공간은 인경印經 작업을 위한 곳이다. 건물 앞 벽면의 아래 창이 큰 것은 통풍뿐 아니라 인경 작업을 하는데 충분한 채광採光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해결 방안이다.
경판 양 끝에는 마구리를 붙였는데, 손잡이 역할을 하는 이 마구리 부분보다 글씨를 새긴 경판 부분이 조금 얇은 것은 경판과 경판이 쌓이면서 서로 부딪히며 손상을 주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기도 하지만 경판의 보존과도 상관된다. 경판은 판가 각 단에 두 줄로 길게 세워 쌓았다. 이렇게 쌓을 경우 마구리 부분은 서로 닿지만, 마구리 부분보다 얇은 경판과 경판 사이에는 자연적으로 공간이 생겨 공기가 아래에서 위로 자연스럽게 유통할 수 있는 굴뚝 같은 통로가 생긴다. 모든 경판이 공기에 접하도록 되어 있는 셈이다. 창을 통해 들어온 공기가 건물 내부에서 앞뒤로 흐르고, 또 판가에서 경판과 경판 사이를 통해 아래위로 흐르기 때문에 판전 내부의 온도와 습도는 자연히 고르게 유지된다. 이처럼 외부의 풍향이나 온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판전 안에서는 공기의 유동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또 판가 상부와 하부 사이의 온도 차이가 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경판의 변형을 줄이는 비결이다.
이외에도, 판전 내부 바닥은 흙바닥인데, 그 속에는 숯과 횟가루와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었다. 이는 실내에 습기가 많을 때는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습기를 내보내면서 숨을 쉬어 자연적으로 습도조절을 하게 되어 경판의 변형을 줄이고, 또 해충의 침입도 막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인 처리는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온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러한 처리야말로 자연을 이용한 하이테크에 속한 것임을 알게 한다. 판전 건물의 외관 및 배치 방식에 깔린 독특한 구성미와 아름다움은 이러한 과학성과 합리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져 있다.
고려대장경은 이와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고려대장경을 봉안하는 판전 건물과 함께 1995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