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 가 없어도 맹세코 다 건지겠습니다.”
“번뇌가 다함이 없어도 맹세코 다 끊겠습니다.”
“법문이 한량 없어도 맹세코 다 배우겠습니다.”
“불도가 위 없어도 맹세코 다 이루겠습니다.”
이들은 스님네뿐만이 아니라 누구나가 다함께 가슴에 새겨 세세생생 실천 궁행해야 할 네 가지 서원이겠다. 특히 정월초 하루 새벽에 법당 마루바닥에 무릎 대고 찬 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처럼 새기고 새길 일이다.
2
“한집에서 스님이 한사람 나오면 구족이 승천한다.”
“중 되는 복은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많은 선업을 쌓아야 가능하다.”
머리 깎은 이면 한두번 들었을 터이고 또 들을 적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심 으쓱해 마지 않던 말이렷다. 또한 오탁악세인 세상사 이치를 갈라 잡아도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닐 성부르기도 하다. 그러나 이즈음 스님들 중 과연 몇이나 그 말 뜻을 결연히 감당할 배짱이 있을 것이며, 자긍의 염으로 떳떳이 어깨 펴고 올곧은 중노릇 하고 있을지. 행여, 가끔은 먹물옷을 입고 있다는 자체가 부끄럽고 죄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갓 머리 깍고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 때며 목청껏 천수경을 외는 행자를 지나칠 때마다 아득해지는 가슴은 나만의 주착스러운 심정에서일까.
그렇다. 사회의 통념은 담 밖에 두고서라도 절 집안에서마저 약으로 쓰려 해도 없는, 노스님들 입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것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개똥이 되어버린 말씀임에랴.
해마다, 정말 한해도 거르지 않고 온갖 창피와 수모와 지탄을 받을 때면 궁여지책으로 하는 말마따나, ‘총무원쪽으로 머리 두고 있는 스님들 모두가 제발 바지춤에 두손 꽂고 있어만 주어도 불교가 그런 대로 사회 속에서 제 위상을 세워나갈 수 있을 터인데’하는 말이 매번 자조적이나마 실감나곤 했다. 일찍이 그런 자들을 가리켜 옛스님들이 설파하신 바, 진승은 산에 숨고 가승이 저자바닥에 나와 먼지를 일으키며 부처를 팔아먹는다는 말은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알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의 권좌보다 더 수승한 복덕을 쌓아야 충이 될 수 있다는, 한치라도 과장되거나 허황된 말일 수 없는 그 의미가 오늘에 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전락했으며 개똥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한겨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삼자락 휘저으며 백담사로 우우 떼지어 가는 중진 스님들은, 알 것이다. 명리를 쫓아 이곳도 기웃, 저곳도 기웃하며 분주하게 설쳐대는 가승들은. 그래도 모르겠다면, 당신들이 애걸복걸하여 찾아간 사람과 악수하고 돌아서서 다시 뒤돌아보아라.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알아라. 충분히 알아라.
3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건다. 새해다.
첫눈이 와서 녹고 또 눈이 내렸다.
중이란 대나무일런지 모르겠다. 칠흑의 밤이면 수런수런 길을 떠나 굵은 마디를 맺는 청죽. 필요하면 죽창이 되어 무엇엔가도 박힐 수 있는…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서 눈 시리게 치어다보는 매화봉은 뜨거운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