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다. 찾고 보니 그리도 가깝고 쉬웠던 부처님인데 그렇게 여러 번 허탕을 치고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지금도 그쪽을 지나노라면 그 때의 기억이 새롭다.
온양지역은 충무공의 현충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서산지방을 중심한 서해안의 백제시대 유적을 조사하노라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곳이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온양 읍내 온천장에서 하루쯤 쉬고 오는 그런 지역이다.
1967년도 겨울방학 때의 일로 기억된다. 당시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봉직하며 박물관 일을 맡고 있을 때 학생들을 데리고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사지를 답사하게 되었다. 마을 주막에서 며칠을 지내며 성주사지와 부여의 무량사까지 조사하여 지표에서 많은 기와조각들을 수습하고 각자 사진 촬영도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무량사 골짜기와 성주사지 산곡의 바람이 강하여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이러한 강풍 속에서 체감온도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친 김에 홍성군의 신경리마애불과 홍성 읍내의 당간지주, 그리고 홍주성까지 두루 살피고 나니 모두 온 몸이 얼어버린 것 같았다. 걸음을 재촉하여 온양온천에서 몸을 녹였다. 대체로 답사 중에 하는 말을 실천에 옮긴 적은 드물지만 이 때만은 하도 추워 ‘온천에서 쉬자’는 약속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목욕 후 늦은 밤이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허름한 국밥 집에서 막걸리 한잔씩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있는데 그 곳의 주민인 듯한 노인 몇 분이 들어와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노인 한 분이 우리 일행에게 “어디서 왔느냐” “보아하니 학생과 선생님 같은데…”라며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언제나 시골 답사시에 하던 대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이 곳을 찾은 이유와 이 곳 주변에 옛날 절터나 유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왜 없어” “저 고개 너머 옛날 절터에 가면 향교도 있고 돌부처도 있고 뭐가 많지”하시는 것이었다. 이 때 돌부처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어 그 곳의 위치가 구읍(옛날 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현지를 찾으니 온양읍에서 10리길에 불과했다.
구읍이라는 곳은 읍내리邑內里로서 옛날 향교가 있었는데 본래 이곳이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길가에서 쉽게 고려시대의 당간지주 1기를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석불도 당연히 손쉽게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노인들이 말하던 서 있는 돌부처는 위치조차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뜻하지 않게 조사한 당간지주 1기는 큰 수확이었지만 정작 찾고자 하던 돌부처는 찾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 후 온양읍을 거쳐 다시 구읍을 찾았다. 먼저 번에 들렀던 주막에서 하는 말이 “장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그날 와서 한번 물어보라”고 하면서 사흘 후에 장이 선다고 가르쳐 주었다. 사흘이 되기를 기다려 아침 일찍 온양에 갔으나 웬일인지 장터가 조용하기만 하였다. 이제 단골이 되어 버린 주막에 들러 이유를 물은즉 무척 미안해 하면서 “우선 시원한 막걸리나 한잔, 목을 추기고 이야기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날짜를 잘못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즉 장날은 어제였고 요즈음 장은 반나절 정도면 끝나니까 다음 장날에는 아침 일찍 내려오라고 하였다. 온양 읍내로 돌아오는 길에 몇 사람에게 물어서 다음 장날을 몇 번이고 확인하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장날이 나흘 후에 돌아왔다. 새벽 기차를 타고 온양역에서 내려 구읍의 단골주막을 찾았다. 주인이 반가워하며 맞아 주는 식당 내에는 이미 몇 분의 노인들이 계셨다. 필자의 신분을 밝히고 인사를 하자 벌써 주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고 있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돌부처는 여기에 없고 좀 떨어진 마을에 있다’는 것이었다. 저 앞쪽의 과수원 옆길을 지나 5리쯤 가면 마을이 있고, 그 뒤편에 돌부처가 서 있는데 그 곳은 구읍이 아니라 행정구역으로는 송악면 평촌리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부터 구읍이 가까워 구읍내에 있는 것으로 알기 쉽다고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돌부처를 찾아가고 싶었으나 노인 분들의 친절이 고마워서 막걸리 몇 되와 돼지고기 안주를 대접하면서 필자까지도 얼근하게 취한 후에야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온양 구읍인 읍내리에서 유구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과수원 옆길로 들어가면 평촌리坪村里 마을이 있다. 석불은 이 마을 북쪽의 낮은 산중턱 아늑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예로부터 절터로 알려지고 있는데 석불의 위치는 원위치이다. 현재 용담사龍潭寺라는 작은 절이 있어 공양을 올리고 있다.
양쪽 팔이나 무릎 부분에서 의문이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어 곧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수인은 양쪽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약합藥盒을 받들고 있으므로 존명尊名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손 모양과 손가락의 표현이 생동적이어서 흥미를 끈다.
대좌를 특별히 마련한 것은 아니나 널찍한 평판적인 대석이 있어 그 상면에 양쪽 발을 별도로 조각해 놓았다. 5m가 넘는 거대한 몸집에 비하면 노출된 발의 크기가 좀 작아 보인다.
뒷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고 앞면과 옆면에만 가득하다. 이렇듯 거창한 불상을 화강암 1석으로 조각했는데도 어색하지 않은 원숙한 조각솜씨를 보이고 있어 역작力作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주변의 상황이나 석불 자체로 보아도 광배는 없었던 것 같다. 근엄하면서 자애로운 신비의 미소가 감도는 이 약사여래입상은 정성들여 조각한 상호와 흙에 묻혔던 하반신의 독특한 옷주름의 표현 등이 인상적이다. 즉 하체부분이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까닭에 화강암 본래의 흰색이 완연하며 그 부분의 조각들이 새롭게 다듬은 것처럼 보인다.
이 석불입상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호와 목의 삼도, 양쪽 손으로 받든 약합 등 상체의 각부 조각이 정제된 것에 비하면 하부의 조각들은 다소 형식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차례 헛수고를 거듭하였으나 결국은 귀중한 석불입상을 발견 조사할 수 있었다. 그 이후 5.45m의 이 석불은 아산평촌리석조약사여래입상牙山坪村里石造藥師如來立像이란 명칭으로 보물 제536호로 지정되었으며 당간지주는 아산읍내리당간지주牙山邑內里幢竿支柱란 명칭으로 보물 제537호로 지정·보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