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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상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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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1년 12월 238호
딱 15년 전의 일이다. 상덕 스님과 지형 스님이 16명의 학인 스님들과 함께 청암사에 발을 내디딘 것이. 공부할 장소를 애타게 찾던 스님들에게 청암사는 화장세계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맞이한 것은 수려한 소나무 숲에 잔뜩 웅크리고 숨어지내던 낡고 쇠락한 고찰이었다. 불기운이 사라진 지 오래된 아궁이, 기울 대로 기울어 곧 쓰러질 것만 같은 건물들, 덩치만 컸지 곳곳이 비가 새는 상태였다. 해인사 수말사로 300년 전통의 불교강원이었다는 영화의 흔적은 건물의 몸체에서나 찾아질까. 그래서 더욱 썰렁했다.
땅에도 집에도 주인은 따로 있다던가. 18명의 스님들은 이 곳에 기꺼운 마음으로 짐을 풀었고, 비구니 강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어쩌면 절 역시 이 때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거슬러 올라가면 청암사에는 교학도량 맥이 흐르고 있다.
“300년 전인가요.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0) 스님 맥을 이은 회암 정혜晦庵 定慧(1685~1741) 스님이 강원을 했지요. 그 분은 청암사에서 나이 57세 법랍 48년으로 입적했습니다. 면 소재지 쌍계사터에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스님들 영정이 22분 모셔져 있는데 그 가운데 강사 스님이 많다는 점에서도 증명되지요.”70년대 초반쯤에는 고봉高峰 (1901~1969) 스님을 모시고 우룡, 고산, 덕민, 보광 스님 등이 이 곳에서 공부를 하셨다고 하나 이후로는 강맥이 완전 끊어졌다. 그래도 공부 터는 공부 터였던지 고시생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러다 導7년 지형, 상덕 스님이 강원을 열면서 교학도량으로서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초기 학인들은 단순히 공부만 하는 학인들일 수 없었다.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고된 노동과 정진이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그 때 청암사에 와 보았던 주위 사람들은 한결같이 분명 1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열악한 조건이었다.
지금의 청암사를 방문한 이들이 폐사나 다름없었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16명의 학인으로 시작된 청암사 강원은 이제 120명이 넘는 학인들이 운집한 명실 상부한 비구니 강원이 되었다. 비구니 스님들이 사는 공간이 대체로 그러하듯 잘 정돈된 경내는 정갈하고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

가능하면 고치고 꼭 필요하면
몇 년 벼르다 하나 짓고
불사가 뜸해진 것이 한 5년 됐단다. 10년간 몸에 너무 무리를 가했는지 관절에 이상이 왔다. 그래서 지금은 너무 ‘서두르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있다고 상덕 스님은 말한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것은 너무 많다. 끝난 것 같으면 또 해야 하고, 하고 나면 해야 할 부분이 또 보이고 그런다. 내년에는 빨래터를 만들 생각이다.
지금까지 청암사 스님들은 공부할 조건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며 공부를 해왔다. 10년간 공부하며 쉼없이 해온 불사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눈치를 채지 못한다. 뭔가 달라지긴 한 것 같은데 그대로인 것도 같고.
그것은 스님들에게 나름대로 불사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기존의 것을 파괴하지 않는 방향에서 가능하면 고쳐 살고, 정말 꼭 필요할 때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에도 땜질 자국이 곳곳에 나있다.
“지금 사용하는 화장실도 다 쓰러져가는 것을 잡아당겨 못을 박고, 100만원 들여 기와만 얹은 거예요. 목수들은 천만원만 들이면 근사하게 하나 짓는데 그걸 왜 힘들여 고치느냐고 불만인데, 100만원만 들이면 될 것을 왜 천만원을 들여요.” 극락전 앞에 옛날 비구 스님들이 살 때 쓰던 소변간이 있는데 그것도 그대로 놔두고 있다. 물론 지금은 쓰지 않아 빗자루를 넣어두고 있지만 옛날에 쓰던 것을 굳이 없애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의외의 귀찮은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각 방송사와 사진작가들, 광고제작사까지 찾아와 촬영하자고 하는 통에 그거 거절하느라 일년에 서너 차례는 진을 뺀다.
“청암사가 사진발을 잘 받는데요. 지난번에는 SBS에서 화장실 문화를 촬영한다고 왔는데 너무 찍을 데가 많아 환장하겠다는 거예요. 카메라를 대기만 하면 다 찍을 데라고. 아마 청암사를 그대로 고수한 덕인가 봐요.”그러나 촬영의뢰는 대부분 거절당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찰은 많이 알려서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려는 곳도 있지만 상덕 스님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일부 사람들은 수도암에 보물급이 있으니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면 입장료를 받을 수 있다고 귀띔을 해 주기도 하는데, 이 역시 외면하고 있다. 청암사는 관광사찰이 아니라 수행도량으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돈을 받으면 우리가 제재할 수가 없잖아요. 지금은 저 밑에 차단기까지만 차가 들어올 수 있고, 계곡에도 못 들어오게 하죠. 그러나 입장료를 받으면 주권행사를 할 수 없잖아요.”


사찰경제는 무대책이 대책
그러면 사찰경제가 풍부한가 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청암사의 경제는 대책이 없다. 어느 해 겨울에는 당장 연료를 사야 하는데 사중에 100만원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스님은 무사태평이다. “그래도 다 살게 되더라. 부처님 힘으로 사는 것이지 어디 사람의 힘이더냐.” 이것이 바로 스님의 대책이다. 지속적으로 해온 불사지만 그 동안 신도들에게 권선문 한번 돌린 적이 없다.
“저 불사를 해야 하는데 하고 한 1∼2년 생각하고 있으면 꼭 하게 되더라구요. 극락전에 비가 새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관에서 보조가 나와 할 수 있었고 식당불사는 어느 눈 오는 날 지나던 보살님의 밥을 해 줄 수가 없어 돌려보냈더니 한달 후에 불사금을 가져와서 했고, 종각은 어떤 처사님이 하였고….”언론·방송사는 매번 퇴짜를 놓았지만 지난해 KBS에서 방영된 환경스페셜은 특별한 케이스였다. 사찰이 오히려 환경오염을 시킨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와중에 들어온 제의라 흔쾌히 받아들여 청암사의 오수처리시설이 공개되는 바람에 일약 환경사찰이 돼 버렸다. 덕분에 모든 사찰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있어 성공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청암사에서는 8년 전부터 트랜치공법으로 오수처리를 하고 있다. 트랜치공법이란 토양오수처리라고 해서 트랜치로 물이 빠져나가면서 자연 정화가 되는 것이다. 95% 정화되기 때문에 그 물로 빨래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단점이라면 넓은 땅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위에는 나무도 심을 수가 없다.
이런 방법을 일찌감치 도입했던 것은 대중이 많아지다 보니 오수량이 많아지고, 꼭대기에 사는 입장에서 그 물이 그냥 내려가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갖고, 완벽한 오수처리시설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이 공법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도 10명 정도만 살아도 안했을 거예요. 대중이 워낙 많으니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도 오수처리시설을 하지 않은 시절이었죠. 우리를 오히려 이상하게 보더라구요.”청암사는 흔치 않게 상식이 통하는 곳이다.

지형 스님과 상덕 스님의 오랜 인연
청암사의 오늘은 지형 스님과 상덕 스님, 두 분의 어른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호계삼소의 취재대상은 상덕 스님이지만(지형 스님은 몇 해 전에 취재한 바 있다.) 청암사를 이야기하면서, 상덕 스님을 말하면서 지형 스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지형 스님은 청암사 주지 겸 강원 학장이고 상덕 스님은 강원 강사 겸 재무 일을 보며 청암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넉넉한 상덕 스님과 칼칼한 지형 스님은 동학사 강원에서 윗반 아랫반으로 만나 오늘까지 25년을 한도량에서 생활하고 있다니 분명 보통 인연이 아님에 분명하다.
속가에서도 동업은 오래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스님들이 서로 호흡을 맞춘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두 스님이 서로의 힘을 모아 폐사에 이른 고찰을 일으켜 세우고, 새로이 비구니 강원을 세웠으니 그 여린 몸 속에 감추어진 강인함과 원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어떻게 그리 오래 일을 같이 도모하느냐고. 갈등은 없느냐고요. 물론 의견충돌이 없을 수는 없지만 서로 이야기해서 풀었지 그 이상 진전된 적은 없어요. 아마 그런 정도의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서로 바쁘게 살았으니까.”물론 그 동안 청암사를 거쳐간 학인들의 고생을 어찌 말로 다할까. 지금도 그러하지만 청암사는 절 소임을 학인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따라서 절 사정에 누구보다 밝게 되고 주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절의 모든 체제는 학인들 공부에 맞춰져 있다.
주지가 학장을 겸하는, 절과 강원의 일원체제도 학인들 공부하는데는 호조건이라 할 수 있다. 비구스님들 강원이 학장을 주지가 임명함으로써 종속적 관계가 될 위험이 있는 데 반해, 주지가 학장을 겸함으로써 최대한 학인의 공부를 도와 주는 위치라는 점은 비구 스님들도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요즘 비구·비구니 모두 출가 연령과 학력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에서 상덕 스님이 걱정하는 점이 있다.
“알음알이가 많아서인지 오롯하게 집중하는 의식은 결여돼 있어 경전이 마음에 뿌리내리기가 무척이나 힘들어요.”또 하나의 공통점은 일을 못한다는 점. 예전 학인들은 하루나 이틀 걸릴 것을 사흘이 지나도 할까말까. 대신 컴퓨터와 같은 현대적 감각을 요하는 것은 뛰어나고 의식이 개방적이다.
청암사 강원이 이제 정상궤도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강원을 새로이 만들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는 스님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그저 웃을 뿐이다. 강원을 만들고 학인들이 운집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과연 노하우라는 것이 있었던가.
상덕 스님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그저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고만 말한다.
“뭘 하든 일단은 미쳐야지요. 처음에는 세월이 가는 것도 모르겠더라구요. 한 3년 되니까 그제서야 계절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봄이구나, 여름이구나 하구요. 한 10년간 공부와 불사가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어요.”


학인들의 어머니 같은 스님
어떤 사진기자가 청암사는 카메라를 대기만 하면 찍을 곳이라고 했듯이 기자가 보기에는 청암사는 곳곳이 이야깃거리다. 그래서 욕심을 부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니(아직 절반도 못했지만) 정작 상덕 스님에 대한 개인적 이야기가 빠진 듯하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니 청암사의 모든 이야기가 바로 상덕 스님의 이야기이다. 청암사를 제외하고 상덕 스님 이야기가 따로이 없고 또한 상덕 스님을 제외하고 청암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결론은 상덕 스님과 청암사는 둘이 아니었다는 것. 혹 스님의 개인적인 고민이라든지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들려달라고 하자, 재미없게 그런 것은 없었단다. 다만 수마가 많아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는데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 놓으신다.
“지금까지보다는 앞으로가 문제라고 봐요. 이만큼 만들어 놓았다고 교만이 늘어 자기 주장만 세우는 일을 경계하려고 해요. 늙어서도 작은 방 한칸으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겠지요.”상덕 스님은 그런 분이었다. 너그럽고 늘 자신을 낮추는. 청암사 모든 것 속에 녹아 있기에 정작 그 자신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 마치 우리네 어머니같은 스님. 그래서 학인들은 졸업 후에도 마치 친정을 그리워하듯 상덕 스님을 그리워하고 청암사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