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 지혜란 무엇이며, 자비로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물음을 함께 아우르면서 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기법을 끄집어내게 된다. 연기법을 제대로 보는 것이 바른 지견이며, 제대로 알았다면 응당 실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연기법이야말로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명확한 차이점이며, 인간 지성이 이루어낸 최고의 정점이라고 믿는다.
지금껏 인류가 이룬 문명의 기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꼽는다면 과학과 종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 속에서 머리와 가슴을 따로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불교 속에서 종교성과 학문성을 분명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다. 연기법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는 애초부터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도 심각한 이단 논쟁이나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벌이는 종교 전쟁에 휩싸이지 않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상의 깨달음이 지혜(明)와 자비(行)를 온전히 갖추는(足) 것, 그래서 부처님을 명행족明行足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럼에도 종종 지극히 분석적이고 경험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띄고 있는 경전들을 대하게 되는데, 아래 인용한 《일체경》과 같은 종류의 경전이다. 이 경은 붓다께서 존재하는 바 만물, 즉 세계에 관해 설하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일체一切란 무엇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거기에 상응하는 정신현상(法)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소위 일체니라. 누군가 ‘이것들을 제외하고 〈다른 일체一切〉를 세우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낱 실없는 소리일 뿐이다.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 그는 자신의 허풍을 드러내고, 궁지에 빠진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비구들이여, ‘우리네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SN 4. 15. sabba-sutta, 잡아함, 一切經)
이렇게 붓다께서는 경험과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 ‘지금, 이 자리’를 강조한다. 즉, 인간의 감각과 그 대상을 일체 모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육근六根의 경험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희론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붓다께서는 어떤 절대자 혹은 영원무궁 불변하는 영혼을 이야기할 것도 없이, 다만 세계를 바로 봄으로써 인간이 처한 모든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고, 그렇게 제시된 길이 곧 불교인 것이다. 이처럼 ‘나’와 ‘나 아닌 것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태도, 즉, 제대로 된 세계관을 가질 것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철학적인 종교라고 일컬어졌다. 그리고 올바른 세계관이란 곧 불교식으로 말하면 정견正見(samma--dit.t.hi)이다. 말 그대로 ‘바로 보기’가 되는데, 보기처럼 그리 간단치 않았던 모양이다. 십대 제자 가운데 논의 제일이라는 까짜야나(迦延) 존자가 붓다께 물었다.
“반테! 사람들이 종종 정견正見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정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까짜야나,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견해는 대개 영원불변의 존재(有) 혹은 완전한 무(無)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정견을 가진 자는 생성 변화하는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무에 집착하지 않으며, 변화하고 소멸하는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유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에 횡행하는 독단에 기울고 집착하여 거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독단에 기울거나 거기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자아가 영원한 실체라거나, 자아를 완전한 무無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생성과 소멸, 재생 따위의 모든 변화가 곧 고苦(dukkha)라고 알 뿐이다. 지혜가 그의 것이니, 이게 곧 정견正見이다.”(SN 2. 16. Kacca-yanagotta-sutta, 잡아함, 가전연경迦延經)
여기서도 붓다께서는 존재의 절대 영원성(常見)과 절멸(斷見)을 지양하고,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고 조건의 변화에 따라 소멸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있는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사물과 현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말이다. 존재의 생성되는 쪽 단면에 코를 박고 보면 상견에 떨어진다. 반대로 소멸하는 측면만 볼 때 허무에 빠진다. 그러나, 생성이나 소멸은 변화의 한 양태일 뿐이다. ‘있는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세계를 한 순간의 고정 상태로 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위에 인용한 경전은 훗날 용수(Na-garjuna)의 위대한 저작 《중론中論》의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론》에서 거듭 말한다 : “모든 존재는 조건적으로 생성되고 소멸된다(緣起生滅).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非 自存). 이것을 공空(s、u-n~ya)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空’은 순전히 아무 것도 없다거나 마구잡이식 부정이 아니라, 연기緣起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연기법이 곧 중도中道요, 정견正見이다. 연기법은 ‘나’ 혹은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이 마음과 육체가 분리 독립될 수 없는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나 아닌 것들’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만 ‘내가 나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연기법은 관계의 법칙이자 원리다. 모든 악과 고뇌의 씨앗인 무명無明이란 다름 아닌 인연법에 대한 무지이자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소멸하는 사물의 원리에 대한 무지이며, ‘나’와 이 나를 나이게 하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 설정에서 생긴 오류를 말한다.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즉 정견은 그러한 오류를 수정하고, 나와 나 아닌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즉,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집착을 버림으로써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가전연경》은 이런 소식을 “무명을 완전히 씻어버림으로써 생사, 우비憂悲·고뇌가 사라진다”고 전한다.
“일찍이 세존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연기법을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법을 본다’라고 하셨다.”라고 사리불 존자가 증언한 바 있다(MN 1. Maha-hatthipadopama-sutta, 중아함 상적유경象跡喩經). 또 병든 제자 와깔리(Vakkali)의 처소를 찾은 붓따께서 말씀하셨다.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 (SN 3. Vakkali-sutta. 잡아함, 발가려경跋迦黎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