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타바루 바라문은 부처님께 상(想)이 생기고 상이 멸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유상(有想), 무상(無想), 구유무(俱有無), 비유비무(非有非無), 유변(有邊), 무변(無邊), 구유변(俱有邊), 비유변비무변(非有邊非無邊), 명신일이론(命身一異論), 여래종(如來終), 여래비종(如來非終) 등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이런 철학 문제는 정각이 아니요, 사문이 아니요, 열반이 아니기 때문에, 기(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었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는다. 그것은 범행(梵行)이 아니요, 무욕(無欲)이 아니며, 무위(無爲)가 아니요, 적멸(寂滅)이 아니며, 지식(止息)이 아니요, 정각이 아니며, 사문이 아니요, 열반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記)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이치에 맞고 법에 맞는 것인가.
고제(苦諦), 고집(苦集), 고멸(苦滅), 고출요제(苦出要諸)를 기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것은 뜻에 맞고 법에 맞으며 범행의 첫머리며 그것은 무욕, 무위, 적멸, 지식, 정각, 사문, 열반이기 때문에 나는 기한다.”
다시 부처님은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하는 법에는 결정기(決定記)와 불결정기(不決定記)가 있다. 어떤 것을 불결정기라 하는가 하면 “나와 세간 등은 유상하다든지 여래는 마침도 아니요 마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법에도 맞지 않으므로 불결정기라 한다.
어떤 것을 결정기라 하는가 하면, “나는 고제, 고집, 고멸, 고출요제를 기(記)라고 한다.”그것은 법에도 맞고 이치에도 맞기 때문에 결정기라 한다.
범지여,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한 곳에 살면서 한결같이 즐거운 세계(천상)만을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분명히 천상을 보고, 천상의 즐거움을 보았는가”하고 물었다. “그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함께 앉고 일어나며 서로 말하고 정진하여 정(定)을 닦는가. 또 저 천상에서 헝상 즐거워하는 자가 일찌기 너에게 와서 말한 일이 있는가 또 너는 능히 네 몸에서 생각을 일으켜 다른 사대(四大)의 몸을 화작(化作)하여 신체가 다 갖추어져서 모든 근(根)이 빠진 것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고 하니, “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성실하지 않고 법다운 것이 아니므로 허망한 것이다.
부처님은 포타바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말했다. “나의 몸에 사대와 육입(六入) 부모가 낳아 젖을 먹여 기르고 의복으로 꾸민 것으로서 무상하여 마멸한다. 이것을‘나’라 한다. 나는 이것을 염오(染汚)라 하고 청정이라 하며 지혜를 얻는 것이라 한다. 너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것이다. “염오의 법은 멸하고 다할 수 있고 청정의 법은 나게 할수 없어 항상 괴로움의 가운데 있다.”
그런 생각은 가지지 말라 왜냐하면 염오의 법은 멸하여 다할수 있고, 청정의 법은 나게 할 수 있으며 안락한 곳에 살면 환희하고 애락(愛藥)하며 전념하고 일심하여 지혜가 증광(增廣)하는 것이다.
이처럼 욕계, 색계천, 공처(空處), 식처(講處), 불용처(不用處),유상무상(有想無想)을 염오라 말하고 또한 청정을 말하고 또한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염오는 멸할수 있고 깨끗한 법은 생길 수 있다.
그 때 상수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욕계 사람의 몸인 사대가 제근(諸根)을 갖추어 있을 때 욕계천의 몸 또는 유상무상처의 몸도 동시에 있으며 아니면 유상무상처의 몸이 있을 때 욕계인의 몸의 사대의 제근과 그 이외의 하늘의 몸도 동시에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상수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욕계인의 몸의 시대의 모든 근이 있으면 그 때는 바로 욕계인의 사대의 모든 근이 있을 뿐이요 욕계천 또는 유상무상처의 몸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상무상처의 몸이 있을 때에는 바로 유상무상처의 몸이 있을 뿐이요, 욕계인의 몸 또는 무소유처의 몸은 있을 수 없다.
상수(象首)여, 비유하면 우유와 같다. 젖은 변하여 낙(酪)이 되고 낙은 생소(生醒)가 되고 생소는 숙소(熱 )가 되고 숙소는 제호(醒觸)가 된다. 제호를 제일이라 한다.
상수여, 이처럼 젖으로 있을 때는 다만 젖이라 이름하고 낙, 소 또는 제호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상수여, 네 뜻에는 어떠한가 누가 네게 묻기를,
만일 과거의 몸으로 있을 때 미래와 현재의 몸도 동시에
있느냐. 미래의 몸으로 있을 때 과거와 현재의 몸도 동시에
있느냐. 현재의 몸으로 있을 때 과거와 미래의 몸도 동시에
있느냐 한다면, 어찌 대답하려느냐.”
상수는 여쭈었다
“다만 과거에는 과거몸, 미래에는 미래몸, 현재의 몸이 있을 때는 다만 이 현재의 몸이 있을 뿐이요 과거나 미래의 몸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일찍 과거에 이미 멸했다, 없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마땅히 날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니다, 현재에 지금 있다, 없는것이 아니다라고 하겠습니다.”
새해 첫날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날이 되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마음은 들뜨게 됩니다. 섣달 그믐밤에는 언제나 뜬 눈으로 지샙니다. 한해를 보내고 또 한해를 맞이하는 시간은 사뭇 의미가 다릅니다. 꼭 같은 시간의 길이이지만 생각 속에 충분히 긴장을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부처님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와 현재라고 말씀하심을 보게 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당연히 올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금은 있는 것이다. 과거가 이미 지나갔지만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래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지금 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현실 속에서 상상력에 매달려 너무 멀리 띄워 놓고 실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현재를 망각한 채 과거나 미래에만 매달려 있지는 않은지, 현실과 동떨어진 하늘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신비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순결한 것이며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들의 삶이란 선택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 쪽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도저히 설명해 낼 수 없는 불가해한 현실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허약한 인간 같지만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며 하루의 생활을 건실하게 살아가는 착하고 정직한 삶에는 지신을 명백히 다스리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새해의 첫 날이 될 때면 느낌으로 와 닿는 것입니다.
째어있는 생각에는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