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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연극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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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김미미 1987년 07월 65호
중국계 문화권의 국가로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종주국이랄 수 있는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월남 동의 국가가 이에 속한다. 매우 독자적인 지역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건축, 복색, 풍속, 음악, 회화 등 문화면에서 이들은 상당한 연계성을 가지며 발전해 왔다.
무엇보다 이들을 묶는 커다란 구심점이 되었던 것은 유불선(儒佛仙) 삼가(三家)의 사상과, 동일한 문자인 한자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하나의 문자로 소통이 가능했던 고대 중국어나 한국, 일본같은 나라는 확실히 인도계의 여러 나라들과는 다른, 보다 독특한 문화적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에서 번역한 불경이 번거로운 절차없이 이들 국가에 그대로 직수입, 전파될 수 있었음도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였다.
위진(魏晋) 이후 불교가 민간에 깊숙히 퍼지면서 중국에서는 이에 맞추어 착실하고도 활발한 역경사업이 전개되어 갔다. 그러나 고대 중국 사회는 문화의 보급이 보편화되지 못하고 글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은데다 불교의 교의마저 심오하고 깊은 것이어서 문자를 통한 포교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점은 한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각국에서는 다양한 포교의 수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중국 및 한국, 일본의 불교 연극사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불교가 전래될 당시만 하여도 중국엔 이렇다 할 극적구성을 갖춘 연극이 없었다. 고작 연희성을 띤 재담류나, 재주를 넘고 환술을 보여 주던 곡예류가 전부였다. 이에 법사들은 다각도로 포교의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첫째로 염두해 둔 것은 그 표현이 통속적일 것이었다. 무지한 민중에게는 심오한 불교의 철학성을 설명하기보다 차라리 일상의 언어로 옛날 이야기하듯 재담과 노래를 진행하되 이는 반드시 재미가 있어야 했다.
이점에 있어 그들은 인도의 포교방식에서 많은 시사를 받게 되는데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에 ‘천축의 풍속에 부처님의 말씀을 노래하는 것을 패(唄)라 하는데 중국에 와서는 경을 음송하는 것을 전독(轉讀), 노래를 지어부르는 것을 범음(梵音)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남북조 시대에는 이처럼 경을 음송하고 노래를 지어부르며 불교의 교의를 전포하던 전문적인 포교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민간에서 그들을 가리켜 ‘경사(經師)’라 불렀다. 경사 외에도 당시엔 타령조의 장가(長歌)를 부르며 재담을 곁들여 포교하는 창도사(唱導師)가 있었는데 그들은 포교시 경사들처럼 경을 그대로 읽고 노래한 것이 아니라 연희화했다는 정이 크게 다르다. 그들은 경사들의 단순한 독경이 설명하기 어려운 무상(無常)이니 지옥(地獄), 인과(因果) 등의 내용을 보다 재미있고 실감나게 전달하여 관객을 웃기고 울리며 감회시켜 갔다.
창도사들이 노래와 이야기로 포교를 할 때는 두 가지의 방법이 었었다. 특별한 대본없이 즉석에서 지어내어 하는 것과 기승전결이 뚜렷한 완성된 대본에 의해 전개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가 바로 중국연극사의 일장을 장식하는 변문(變文)의 전신일 가능성이 크나 안타깝게도 오늘까지 전하는 대본이 없다.
남조 말년에 이르러 경사와 창도사는 점차 합류하여 보다 통속적인 발전의 길을 걷는다. 당(庸)대에는 이들을 가리켜 속강법사(俗講法師), 그들의 포교형태를 속강(俗講)이라 불렀다. 당시 장안(長安)에는 적지않은 수의 속강법사가 있었는데 그들이 속강을 하는 곳에는 언제나 구름같은 인파가 모여들어 시장이 설 정도였다. 속강에는 대본이 있었다. 바로 이 속강을 일러 변문이라고 하는데 최근 돈황의 석실에서 발견된 상당수의 변문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변문은 내용상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유마힐경강경문(維摩詰經講經文), 항마변문(降魔變文), 대목건연명간구모변문(大目乾連冥間救母變文) 등 불경의 소재를 연희하던 불교적인 것과, 그밖에 오자서변문(伍子胥變文), 왕소군변문(王昭君變文), 맹강녀변문(孟姜女變文) 등 민간에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설이나 민간 전설을 극화해 연희하던 것이다. 이중 불경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것은 모두 속강법사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민간의 전설이나 역사물 중에도 속강법사들의 작품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민중을 모으고 보시를 받기 위해 더러 불경 이야기 외에도 흥미를 끌 만한 속가의 이야기도 연희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변문은 대개 운문의 노래와 산문 해설의 교체 형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는 우리의 판소리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더불어 풍부한 상상과 생동감있는 묘사 복잡하고도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의 전개는, 당(唐) 및 오대(五代)에 걸쳐 민중의 사랑을 받는 속문학 예술 형태로 급격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송대(宋代)에 이르러 변문은 보다 속화되고 일반화되어 기타 제반 공연 형태에 결정적 영향을 주면서 스스로는 제2진으로 물러앉게 된다. 이제 변문은 더 이상 승려들의 독점물이 아니었으며 종래 사원을 무대로 하던 그들의 집회는 아예 시장으로 그 무대를 옮기기에 이르렀다. 즉 변문으로부터 형식을 취한 보다 본격화되고 셰련된 민간예술이 점차 그 위세를 더해가게 된것이다.
송(宋), 금(金), 원(元)을 거치며 원잡극(元雜劇)의 실제적 모체가 된 제궁조(諸宮調)의 탄생도 바로 운문과 산문을 섞어 공연하던 변문에서 비롯된 것임을 중국 연극사는 말하고 있다. 곡조가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음률로 이루어졌다하여 제궁조란 이름이 붙은 이 연희 형태는 비록 가호에 주가 되긴 하지만 노래 사이에 산문조의 해설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변문의 체제가 그대로 계승된 형식이다 여기서 제궁조 외에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송(宋) 말에서 청(淸) 말에 걸쳐 계속된 보권(宝卷)이라는 속문학 형식이다. 보권은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불교교의를 선양하는 주목적에까지 변문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가들은 이를 가리켜 변문의 적계 자손이라 부른다. 이러한 가창 중심의 연희 형태는 그후 명과 청대를 거치며, 연극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많은 무대 언어를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 전통극의 주류를 이루어 내려오게 된다. 그 한 예로 중국의 국극인 경극(京劇)을 영역할 때 Chinese Drama라 하지 않고 ChineseOpera라 하는 것만 보아도 노래가 차지하는 우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우기 이러한 전통은 중국에 불교의 보급과 더불어 발달한 공연 예술 형태라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크다.
중국의 연극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어도 표두 불교와 연관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작품의 내용에 관계없이 그들의 연극은 승려, 사원, 보살, 나한, 염라, 지옥, 귀혼, 보응 등의 불교 용어로 윤색되어 있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가장 오랜 역사의 극장 역시 사원에 있는 희대(戱台)다. 지금도 중국의 많은 사찰엔 대웅전의 바로 맞은편 종루모양의 누각엔 언제라도 연극을 할 수 있는 상설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특히 도시의 문물을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농촌 사람들에겐 사교와 축제를 겸한 훌륭한 민간 극장의 구실까지 했다. 그리고 공연형태도 다양해 전통무대극에서부터 인형극, 그림자극 등 굳이 불교적 내용이 아니더라도 민간의 설화나 삼국지, 수호전 등의 다양한 레파토리를 가진다.
이상으로 살펴본 중국의 불교연극은 오늘까지 사찰에서 지속적으로 연희되어지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다양하고 풍부한 민간연희의 형태 속에 음으로 양으로 무르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奈良)시대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지속적인 왕실의 비호아래 성장한 일본불교는 토속신앙과의 조화를 이루며 점차 정통신앙으로서의 위치를 굳혀갔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백제인 미마지가 전했다는 가면극 계통의 기악(伎樂)이 민간에 성행하고 또한 때를 같이해 형성기에 있던 노오(能)는 불교의 영향을 받으며 보다 내용면에서 풍부해질 수 있었다. 이는 후일 노오예술의 상징적 표현현 선(禪)의 세계에 접목시켜 오늘날의 정형화된 노오를 있게 한 세아미(世阿彌)의 작품 및 이론 속에서 화려하게 꽃피우게 된다. 곧잘 학자들이 불교와 일본의 노오를 대비시켜 선(禪)의 예술이라 즐겨부르게 된 것은 세아미의 깊은 불교에 대한 성찰에 노오라는 공연예술형태로 표출된 점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오가 애당초 불교연극으로 출발하진 않았어도 일본의 불교연극을 논함에 있어 노오와 불교 그리고 세아미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세아미는 14세기 중엽 배우이자 많은 대본과 노오예술을 개혁한 관아미(觀阿彌)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부친 관아미는 종래대로 우스운 흉내를 내는 원악(猿樂)풍이 남아있던 노오에 일대 혁신을 가해 우아하고 이름다운 춤과 노래를 곁들인 보다 품격높은 예술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부친의 가업을 그대로 물려받은 세아미는 우아한 품격뿐 아니라 선(禪)에서 영향받은 절제된 동작과 효율적인 침묵의 사용으로 노오를 일본의 연희예술 중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세아미의 이론은 실로 선의 세계를 그대로 추구하고 있는데 예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깨달음의 경지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많은 시사를 해준다. 그는 ‘극장임을 잊고 노오를 보아라. 노오를 잊고 배우를 보라. 배우를 잊고 그 사고를 헤아리라. 사고를 잊으면 노오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며 노오의 절대적 경지가 선가(禪家)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경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주장했다. 그래서 세아미 이후 노오의 무대에는 많은 승려와 구도자, 그리고 참회하여 성불하는 죄인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노오 외에 대표적 일본의 전통극 형식으로 가부키(歌舞伎)와 인형극(人形淨瑠璃)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형극이다. 일본에서는 옛부터 이른바 ‘카타리모노’ 라 하여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에 가락을 붙이고 반주를 넣어 낭독하는 예능적 전통이 있었다. 불경의 낭독을 업으로 삼던 비파법사의 이야기도 바로 이 카타리모노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부채로 손 등을 쳐 박자를 맞추거나 혹은 비파의 반주에 맞추어 불보살의 연기를 이야기하는 등 설경을 폈다. 중국의 경사가 이야기와 노래로 불경을 설한 것이나 신라의 원효대사가 조롱박을 두드리며 화엄사상을 이야기와 노래로 민간에 전하고 다니던 것을 연상케 하는 연희 형태이다. 중국의 경사나 창도사가 후일 속강법사로, 다시 그들의 대본인 변문이 중국 전통극의 모태가 되어 발전해 간 것처럼 일본 역시 비파스님의 정유리(淨瑠璃) 곡조를 계승해 인형극의 기본곡조를 이루며 불사와 결합한 많은 인형극을 낳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원효스님이 지어 불렀다는 무애가의 곡조와 연희 형태가 후세의 불교 연극이나 민속극과 뚜렷한 연계를 가지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이상으로 미흡하나마 아시아 속에서 불교 문화 특히 불교연극이 걸어온 자취와 양상을 통해 서로의 연관성을 비교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갔나를 살펴보았다. 각국의 다양한 불교 연극의 흐름을 통해 한국 불교문화를 연극의 입장에서 어떻게 용축하는가를 시사받을 수 있는 참고의 장이 되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