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지난 백 년의 한국불교를 되돌아 본다. 질곡의 일제 강점기, 해방 뒤의 혼란기, 비구·대처로 양분된 정화시기, 현대화를 향한 몸부림, 그리고 끝없는 종권 다툼 들이 불행한 과거 불교의 이지러진 모습들이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한국불교는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추진되었던 불교현대화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도심의 포교당이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사실 내가 처음 불교 공부를 시작한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불교하면 울긋불긋한 채색단청과 알아듣지 못할 염불 정도가 연상되곤 했다. 그에 견주어 80년대 불교현대화의 기치를 든 이래로 많은 지식인이 불교에 대한 지적知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조계종단의 불화는 불교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치명적인 먹칠을 하였다. 성철스님이 벌어 놓은 재산을 몽땅 까먹어 버린 격이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곧 지금까지 조계종단의 해결사는 사부대중의 몫이 아니라 국가의 개입이었다는 사실이다. 악법이라고 폐지를 주창해 온 불교재산관리법이 없어진 것도 관에서 한 일이었다. 재산손실을 걱정한 불고계의 여론때문에 전통사찰보존법을 만든 것도 관료들의 판단이었다. 또 총무원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어느 한쪽 손을 들어 준 것도 법원의 결정 사항이다. 이제 “세속을 계도해야 한다”라는 표어는 텅 빈 푸념이 되고 말았다. 승가가 세속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가치의 전도願倒 현상이 불교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물론 반정부투쟁을 하고, 시시콜콜한 세속의 연무緣務 간섭하는 것이 종교의 민주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행태는 너무 심했다는 지적은 피할 길이 없다.
이 무거운 업장을 지고 우리는 지금 21세기라는 미지의 세계로 달려나가고 있다. 지난 세기까지의 인류는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 당해 왔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동서냉전의 기류를 형성시켰다. 동구권이 몰락한 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탄생되었으며 변함없이 그 밑 바닥을 관통하는 것은 ‘힘’이다. 총칼이 돈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미국의 힘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조심스럽게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전망한다. 대결과 투쟁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일류만을 지향하는 만용에서 조화와 원융의 시대로 대전환이 이루어지리라고 본다. 싸우다 지치면 쉬고, 쉬는 것도 지겨우면 또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 아니던가 이제 진력날 만큼 싸웠으니 잠시 소강상태가 있지 않겠느냐는 전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 문화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바로 특성화, 개성화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가진 투명한자기만의 색깔이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생존전략이 되는 셈이다. 여러 종교가 각축을 벌이고 살아야 하는 것은 새 시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불교의 목소리, 옷차림 그리고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의 조계종단이 스스로의 색깔을 갖고 있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계종은 선종이다. 선교 융합을 표방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 중심적 융합일 따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조계종 안에 정토사상이 들어오고, 기도의례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타력 위주의 신행형태는 방편. 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곤 한다. 이에 대한 결정적이고 합법적인 표어가 바로 ‘통불교’이다. 본디 이 말은 회통불교會通佛敎, 곧 선과 교를 모두 융섭하는 수행 자세에 대한 언급이다. 말은 쉽지만, 얼마나 거창한 주장인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모두 통달하기보다도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닌가. 따라서 회통불교는 자칫 두루뭉실이 불교로 전락할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통불교라고 하다 보니, 온통 오방잡신이 모두 불교 안에 활개친다는 뜻이 되어 버리고 만다. 힌두교에는 신이 많다. 정확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이다. 인도 학자에게 이 점을 물어 본 적이 있다. 그 친구의 대답이 걸작이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므로, 신의 수효도 무량하다.” 중생의 근기는 천차만별이다. 그들의 욕구에 대해서 불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응답’해야 한다. 겉으로의 포장이야 순결해 보이지만, 중생의 내심은 온통 시커멓다. 꼭 대학에 붙어야겠고, 죽어도 돈을 벌어야 한다. 높은 지리도 올라가야 하고, 무지무지하게 오래 살고도 싶다. 그래서 영험 있는 부처님께 기도 드리고 싶고, 소원 성취를 위해 삼천배도 서슴지 않는다. 그 중생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원래 세상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조계종이 해야 할 일은 그 중생심에 부화뇌동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을 보살핌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의 가르침은 너무 높고도 멀다. 그러나 견성성불見性成佛은 궁극적인 목표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은 지금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있다. 활발한 사상논쟁도 없고, 푹 익은 교리 연구도 없다. 기껏해야 종조宗祖 타령이요, 대작불사 놀음 뿐이다. 이제 조계종은 선풍진작의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이다. 선의 고전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 남종선 일색의 선풍에서 탈피하는 일, 한국 선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밝히는 일 들에 연구자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바이다. 그래야 수행승이 설 자리가 마련되며, 우리 불교의 세계화가 이룩된다.
다음으로는 재가불자들의 역할이다. 지금처럼 이름만 사부중의 일원인 체계는 불식되어야 한다. 생활 불교, 지성 불교의 기반을 닦으려면, 재가의 윤리 헌장이 준수되어야 한다. 나는 전통적인 오계 가운데 앞의 네 가지를 윤색했으면 한다. 지금과 같이 아무런 윤리적인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 재가자들의 승단 비판은 무의미하다. 왜 스님만 오계를 지켜야 하는가?
앞으로 한국불교에서 재가자들의 위상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산문 밖에서 서성이는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사회는 갈수록 다변화되어 간다. 이익에 따른 소집단의 이기주의는 더욱 첨예화할 전망어다. 따라서 그 삶의 현장에 뿌리 박은 불교가 되어야만 한다. 재가불자들은 바로 그 몫을 담당해 주어야만 한다. 과거에도 이판승이니, 사판승이니 하는 논의들이 있어 왔지만, 이제는 이판으로서의 스님네들, 사판으로서의 재가불자라는 자신의 고유영역이 확립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지난해 불교 인구가 기독교에 견주어 인구대비 1.7퍼센트 떨어졌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접한바 있다. 물론 숫자가 많다는 것이 반드시 자랑거리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종교, 제일의 교세를 가진 종교라는 자부심을 가진 불자들에게는 그리 유쾌한 소식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격차가 다시 뒤집힐 희망적인 근거가 별로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 불교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오늘의 문제를 불교적으로 조명하고, 풀어 보려는 원행願行을 지녀야 한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아무리 그럴듯한 불교적 포장일지라도, 이미 그것은 정법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