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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숨을 쉬었던 시절 -도우 / 도선사 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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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1년 11월 237호
마흔 해 전쯤
해인사 퇴설당에 모여 살 때다.
지금 백양사에 계신 서옹 스님, 오래 전에 열반하신 지월 스님 등을 모시고 정진하던 시절이었는데, 점심 공양이 끝나고 나면 늘 까마귀가 공양하는 것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점심 공양을 할 때면 으레 대중들이 헌식돌에 놓을 밥을 조금씩 덜어내곤 했다. 그러면 언제나 지월 스님께서 다섯 숟가락쯤 되는 밥을 헌식돌에 놓고 염불을 하셨는데, 신기하게도 까마귀는 스님의 염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음식을 쪼아 먹는 것이었다.
어미 까마귀가 새끼에게 밥알을 낱낱이 물어 넣어 주곤 했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면 입장이 바뀌어 이미 털빛이 바랜 어미 까마귀에게 새끼가 밥을 넣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어미가 늙어 자식의 봉양을 받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정 때 잠시 중국에 머물면서, 압록강 강가에 까마귀가 드글드글한 것을 보았는데,나쁜 소식을 가져다 준다 하여까마귀를 멀리하는 우리와는 달리, 그 곳 사람들이 까마귀를 ‘부모의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새’ 라 하여 귀히 여기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해인사에 살면서 까마귀가 제 어미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상식으론, 새끼가 성장해서 어미 곁을 훌쩍 떠나지 않고 어미에게 봉양을 하며 은혜를 갚는 새는 까마귀뿐인 것으로 안다.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요즘은 자식이 부모를 구타하고 나아가 죽이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인간이 까마귀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의 은혜를 모르고 살면 짐승보다 못한 것이다.
‘효孝 즉 도道’ 라 하지 않았던가.
자식이 제 부모를 치고, 또 나라 밖에선 전쟁이다 뭐다 하도 세상이 뒤숭숭해서 예전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라 회상해 보았다.

상주 남장사에서 중이 되었다. 그 해가 갑술년이었으니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남장사에서 행자를 모집한다 하여 그리로 들어가 같은 또래 열 명과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제 산문에 들어온 지가 어느덧 예순여덟 해가 흘렀다. 당시 남장사엔 내 은사 스님이었던 제응 스님이 주지로 계셨고, 혜봉 스님께서 강사 스님 겸 조실 스님으로 계셨다. 일정 때였으니, 대처 스님과 비구 스님들이 함께 살았고, 주지는 총독부에서 임명하고 말사 주지는 도지사가 임명하던 때여서, 주지가 장가를 가지 않으면 주지임명장을 주지않던 시절이었다.
삼직 스님, 노전 스님, 원주 스님, 노스님 등 열다섯 분이 그 곳에 주석하면서 참선 정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남장사는 5백석, 나중에 내가 경전공부를 했던 김용사는 1천석 농사를 짓고 있어 살림이 넉넉했다.
늘 쌀밥을 먹을 수 있었고, 공양주가 따로 있어 부엌살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재를 지내거나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공양주를 도와 적을 굽거나 떡 만드는 것을 거들면 그만이었다. 아침으로 조실 스님께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는데, 그날 배운 내용은 다음날 아침까지 외워 큰방 조실 스님 앞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어제 배운 것 외워봐라.”
조실 스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열 명의 행자는 하나씩 돌아가며 복습한 내용을 꺼내 놓아야 했다.
은사 스님들까지 참석해 자기 상좌가 잘 외우나 살펴보고 있었으므로 행자들에겐 몹시 긴장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한 행자는 조실 스님께 회초리를 맞곤 했다. 조실 스님께 회초리를 맞은 행자는 또 다시 은사 스님께 불려가, ‘너, 어제 뭐하다가 글도 못 읽었느냐.’ 하시는 꾸지람과 함께 은사 스님의 회초리를 맞아야 했으니, 재주 없는 놈은 이래저래 늘 맞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불법을 익히고 중물을 들이던 행자도반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 환속하고 나와 또 한 도반만 남고 말았다. 한 해 가량 보냈던 행자시절을 끝내고 나중에 김용사 강원에서 경전을 익혔는데, 그 때 같이 공부하던 쉰 명 가량 되던 도반들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리고 종정을 지낸 서암 스님과 나만 남아 중노릇을 하고 있으니, 한평생 부처님 법을 익히고 수행하며 살기가 수월한 일은 아닌가 보다. 세속에 나가도 왜놈들 등살에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사방에 순사가 칼을 번뜩이며 나다녔고 친일파가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던, 그래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시절,비로소 산에 들어와 숨을 쉬고 자유로움을 맛보며 행자시절을 보냈다. 배우고 싶은 것 배우고, 따뜻한 밥 먹고, 노스님들의 언행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을 비로소 보았던 시절이었다.
저 행자 때와 강원 시절의 도반들이 거의 속가로 내려갔으나, 내가 이렇게 산문에 남아 중노릇을 착실히 하게 된 데에는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인연 때문으로 생각한다. 청담 스님께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으려면 청정승淸淨僧으로 살아가야 한다’ 는 가르침을 내려 주신 것이 나로 하여금 평생 독신승으로 살게 했다. 그리고 성철 스님은 ‘깨친다’는 것, 불조의 혜명을 잇는다는 의미, 역대 조사 스님들은 어떻게 깨쳤는가, 이런 것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침을 주셨다. 항간엔 성철 스님께서 무섭고 괴팍하셨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나, 그건 스님의 자상한 면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가르침을 주실 때의 그 자상함과 따뜻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이제 내 나이 여든.
나는 요즘 조석으로 극락세계 발원을 염불하면서 ‘도우는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리 기도한다. 내 은사 스님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처님께서 거짓말하겠는가’ 하시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 정진을 세 해 꼬박 하시고는, 당신 부고를 손수 써서 부치고 육신의 옷을 벗으셨다.
〈선정쌍수집요禪定雙修集要〉라는 책에 보면 육조 혜능 스님이 하신 말씀이 이렇게 적혀 있다.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 염하는 것이 만세의 티끌 번뇌를 뛰어넘는 묘한 길이요,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정당한 원인元因이요, 삼계의 천상·인간의 눈이요, 마음을 밝히고 제 성품을 보는 지혜등불이요, 지옥을 파하는 맹장猛將이요,……
대장경의 골수요, 팔만다라니의 중요한 문이요…….”

원願을 세우지 아니한 사람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한다. 지극한 발원을 지니고 세상을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