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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이야기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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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蘭雪軒 - 김선우 2001년 11월 237호
첫번째 ― 당두 밭
추석에 강릉집에 갔다가 당두마을에 들렀습니다. 기억하나요? 파며 배추며 감자를 길러먹던 당두집 윗섶의 작은 자드락밭. 야트막한 산 아래 몇 채의 함석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마을에 지금은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녹지에 묶인 우리 밭은 아파트 단지 뒤편과 산자락에 걸쳐 있는 무성한 수풀림처럼 보이더군요. 몇 차례 이사를 하면서 거리가 생긴 그 밭을 돌볼 만한 기력이 없는 엄마는 밭이 다 망가져 버렸다며 한숨을 쉬셨습니다만, 저는 그 밭에 들어서면서 탄성을 질렀답니다.
밭이라고 하기엔 폐허에 가까운, 그 황폐한 작은 밭의 소리…. 그러나 그 밭의 소리는 내가 여태껏 보아온 어떤 밭보다도 풍성한 생동감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경작하고 가꾸어 규칙과 질서가 생긴 밭에서는 보통 윤기 있는 건반악기와 같은 소리들이 흘러 나옵니다. 이를테면 내가 청보리밭 가운데 눈을 감고 서서 보리밭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 밭의 소리는 나를 흐뭇하고 행복한 느낌에 젖게 합니다. 고적한 소읍의 간이역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 소읍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에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있지요. 그런데 당두마을 작은 밭의 소리는 느낌이 전혀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어떤 삐걱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나 할까요. 자유분방하고 영감에 가득 찬, 어딘지 불안한 듯 하면서도 죄를 모르는 꿈들과 비밀들이 잉큼거리는, 고요한 소요…인간의 관점으로 치자면 황폐하기 이를 데 없어진 그 밭에는 저마다 다른 빛깔을 입은 소리들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산자락에 면한 밭둑의 은빛 억새들과 연보랏빛 구절초, 노랑 마타리꽃,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아랫녘 가장자리의 감나무, 밤나무, 모과나무, 뽕나무의 잎새와 열매들이 ?
?罐?간섭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것인 소리들로 수런거립니다. 이름 모를 수풀들이 잔뜩 우거진 밭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자기 몸 하나만을 의지하여 야생의 것으로 해마다 거듭난 콩넝쿨과 녹두넝쿨이 칡넝쿨과 어울리며 저희들 좋은 곳에서 꼬투리를 마음껏 매달고 있었습니다. 가을 햇볕에 바싹 익은 녹두 꼬투리들이 저절로 탁, 탁, 터지며 작은 녹두알들을 오종종 쏟아내기도 합니다. 지난해 어느 날 엄마가 안쪽 밭둑가에 씨앗을 심어놓고 잊어먹었다는 호박넝쿨이 수풀 사이사이에 달집처럼 환한 약호박을 비밀스레 키우고 있었구요. 서쪽 수풀 속에는 붉게 익은 뱀딸기가 저희들만의 자그만 정원을 일궈놓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뱀이 그 곳을 지나간다면 그 고운 빛에 질투가 나서라도 한입 가득 따먹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고운 딸기밭. 보이는 대로 녹두 꼬투리를 따 바구니에 담으며 밭을 헤쳐가는 동안 나는 미지의 세계에 초대된 아이처럼 으쓱해지고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해 어쩔 줄 몰랐답니다. 그러다가 쉬잇! 북쪽 맨 가장자리에서 그 가시나무 덩굴을 발견하였습니다.
내가 보아온 가시 달린 어떤 식물과도 닮지 않은 가시덩굴. 그 덩굴 식물의 온몸에 빼곡하게 들어찬 은청빛 가시들은 ‘가시’라는 말이 파생시킬 수 있는 가장 완강한 슬픔을 지닌, 음산하고도 고혹적인 이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밭 가득 자글거리며 피어나던 온갖 소리들도 그 주변에 이르러서는 고요해지고 있었지요. 나는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 가시나무 덩굴에게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욕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단지 그토록 완강한 은청빛 가시덩굴로 지켜야만 할 어떤 비밀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어림잡아 보기 시작했지요. 오래 전 우리가 살았던 집들은 자취가 이미 없고 산으로 연결되던 작은 길도 수풀에 덮여 버렸지만 당두 밭을 중심으로 셈하여 보았을 때 가시덩굴이 덮고 있는 바로 그 자리는 덕삼이 할머니네의 우물 자리였습니다.
그녀를 기억합니다. 당두마을 맨 윗집, 산자락 바로 아래 비끄러매져 있던 토굴 같은 작은 집에서 홀로 살던 그녀를. 아들이 하나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의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어린 날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녀의 영상은, 군불을 지필 마른 솔가지를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던 바싹 야윈 뒷모습이나 노랑 꾀꼬리버섯을 따기 위해 버들고리를 옆에 끼고 산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자그마한 실루엣입니다. 가끔 그녀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노래를 구음으로 흥얼거리기도 하였는데, 산에서 놀다가 그녀의 뒷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할라치면 혼비백산 도망을 치곤 했지요. 어린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좀 과장된 무섬증을 동원하면서 말입니다.
그 덕삼이 할머니네의 우물. 내성적이고 혼자 놀기 좋아하던 나에게 그 우물은 내가 간직했던 몇몇 비밀스런 놀이터 중의 하나였지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맑은 물이 찰방거리던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왠지 좀 무섭기도 했지만 우물 속에 대고 말을 걸면 우물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내 말을 받아주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깨꽃!’ 하고 우물에 대고 소리를 치면 우물은 ‘깨꽃’이라는 말을 받아안고 저 혼자 웅웅거리다가 내게 ‘고깔’이라는 말을 돌려 줍니다. 나는 ‘고깔’의 끝말을 받아 ‘깔때기!’ 이렇게 소리를 지르지요. 그러면 우물은 ‘깔때기’라는 말을 받아안고 또 저 혼자 웅웅거리다가 어떤 말을 내게 되돌려 줍니다. 우물과 나의 ‘끝말 이어가기’ 놀이는 우물의 기분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단어들을 내게 가르쳐 주었고 나는 우물이 저 혼자 웅웅거릴 때, 그 이명耳鳴과도 같은 아득한 발성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지요. 우물이 들려주는 말은 으레 ‘끝말 이어가기’의 규칙과는 상관없이 진행되곤 했지만 어린 내가 알고 있던 단어들 역시 부족하기 짝이 없었으니 우리는 피차 규칙을 위반하면서 우물과 나만 아는 ?
輧諍湧?만들며 놀았던 셈입니다.
도톰한 솔이끼들이 우물 가장자리에 빼곡히 들어차고 노랗고 작은 꽃을 매단 돗나물이 촘촘히 돋아나곤 했던 그 우물 근처의 물앵두나무도 기억합니다. 탐스럽게 열린 물앵두를 두 손 가득 따 담다가 둔덕 위에 서 있던 덕삼이 할머니와 눈길이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멀리서나마 그녀와 눈길을 마주했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요. 앵두 서리를 하다가 들킨 셈이니 나는 심장이 멎어버릴 만큼 긴장하여 얼어붙어 있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더니 그냥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나는 종종 그 우물가에 놀러가곤 했지만, 내가 앵두를 따거나 조금 더 위쪽의 꽤나무에서 꽤를 따거나 할 때 그녀와 마주친 적은 없습니다. 마을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는 그녀가 나의 인기척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한 데도 말이지요.
그녀가 언제, 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마을을 떠나온 지 아주 오랜 후 그녀가 죽었다는 얘기를 우연히 엄마에게서 들었을 뿐. 밭의 소리들이 다시 달그락거리기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