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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위한 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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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재영 1990년 01월 95호
욱면비(郁面婢) 성불사건
경덕왕(景德王 : 8세기) 때 강주(康州 : 지금의 진주)의 남자 신도 수십명이 뜻을 서방(극락정토)에 두고 주(州) 경계에 미타사(彌陀寺)를 세워 만일(萬日)을 기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 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郁面)이라는 여자종〔婢〕이 있어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 가운데 서서 스님을 따라 염불하였다. 주인 귀진이 그 종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매번 곡식 두섬을 주어 하루 저녁에 다 찧게 하였다. 그런데도 그 종은 놀랍게도 초저녁에 곡식을 다 찧고 곧바로 절에 가서 염불하는데,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날 욱면은 절 마당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가운데를 뚫고 노끈을 꿰어 말뚝에 잡아매고서는 두손을 합장한 채 좌우로 흔들며 스스로 격려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욱면 아기씨는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시오.”
절의 대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권하여 법당에 들어와 예법에 따라 정진하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하늘 음악이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욱면은 몸을 솟구쳐 대들보를 뚫고 나갔다. 서쪽으로 가다가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부처의 진신(眞身)으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대광명을 발하면서 천천히 나아가는데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법당에는 그때 뚫어진 구멍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 제5권 욱면비 염불서숭(念佛西昇)

한국불교의 정신적 원형
한국불교의 발전사를 논구함에 있어서 정토신앙을 그 저변의 한 주류로 인식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정토신앙은 민중불교의 실체일 뿐만 아니라, 원효대사가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등의 정토계 논술을 통하여 십념(十念)에 현료문(顯了門)과 은밀문(隱密門)의 이문(二門)을 설시하고 “정토신앙은 본래 범부 중생을 위한 것이고 아울러 성인(聖人)을 위한 것이다”라고 설함으로써 이 정토신앙은 하층 서민과 상층 귀족들을 모두 포괄하는 국민신앙, 민족신앙으로 도도히 전개되게 된 것이다.
물론 한국불교는 정토교 일색은 아니다.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 제파(敎宗諸派)·선종(禪宗)·밀교(密敎) ·율종(律宗) 등 한국불교의 내면구조는 실로 다기다양(多岐多樣)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종제파의 교설이 그 실천적 신앙면에 있어서는 거의 예외없이 정토신앙으로 회통(會通)되고 있음도 또한 확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 선종의 중흥조인 보조국사도 「염불요문(念佛要門)」을 통하여 십종염불(十種念佛}을 배열하고 선(禪)과 염불이 궁극적으로 둘이 아님을 설파하였고, 조선조의 선장(禪匠) 서산대사 휴정(休靜)도 사종염불(西種念佛)을 논하고 선정병수(禪定幷修)를 제창하였다. 서산대사는 아미타불 앞에 분향 정례하고 이렇게 발원하였다.
“원하옵나니, 제가 임종시에 죄장(罪障)을 멸하고 서방 아미타불께 나아가 금색광명 중에 수기(授記)를 받아지이다. 미래세가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하올 제 허공이 다할지라도 이 원은 다함이 없으리니 시방 제불이 증명하여 주소서.”
정토신앙은 이와 같이 민족신앙의 주류로서 이천여년 한국인의 정신사를 주도하여 왔거니와, 여기서 명백히 인식되어야 할 점은 정토신앙이 한국불교의 정신적 원형과 접목됨으로써 그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불교의 정신적 원형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면 그 원형의 실체는 무엇인가?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 인용된 아도본비에 의하면, 아도는 위나라 사람 아굴마(我堀摩)와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衆) 사이의 소생인데, 아도스님이 19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에게 신라 전법을 당부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나라{신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나, 이후 삼천여 월(月)이 되면 계림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성 안에 일곱 가람터〔七處伽藍墟〕가 있으니,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 지금의 흥륜사), 둘째는 삼천기(三川妹 : 지금의 영흥사), 셋째는 용궁(龍官 : 지금의 황용사),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 다섯째는 사천(沙川 : 지금의 영묘사),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 : 지금의 천왕사), 일곱째는 서청전( 請田 : 지금의 담암사)이니 우두 전불시(前佛時)의 가람터요 불법이 길이 유행하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불교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七處伽藍之墟가 皆前佛伽藍之城 法水長流之也’라는 귀절이다. 전불(前佛)이 누구인가?
곧 가섭불(過葉佛:Kasyapa-Buddha)이다. 석기모니불의 바로 앞의 부처님이 가섭불이고 바로 뒤의 부처님이 미륵불이란 것은 널리 알려진 다불설(多佛說)이 아닌자 고도령 부인에 의하면 이 나라에는 가섭불 때부터 이미 많은 절이 세워졌고 불교가 오래 번창하였다 이 전불가람설(前佛伽藍說)은 가섭불전법설(伽葉佛傳法說)로 진일보하였다. “가섭불께서 이 땅에 주석하시면서 법을 강연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또 부촉하셨다”라고 그들은 믿었고, 가섭불이 좌선 설법하던 연좌석(宴坐石)까지 황룡사 경내에 설정하였다.
이 땅 이 백성들은 가섭불 때부터 이미 부처님과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 초전 당시부터 이 땅의 백성들은 이렇게 믿어 왔으니, 이러한 믿음을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이라 일컬는다.
이 사상은 더욱 심화되어 석가모니불께서 이 땅에서 설법하셨고 석가모니불의 진신(眞身)이 지금도 이 나라에 주(住)하여 공양을 받으시며 관음, 문수 등 불보살이 나라에 진신상주(眞身常住)하신다는 한국진불국토사상(韓國眞佛國土思愚)으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석가모니불의 육신은 인도에서 생멸하였지만 석가모니불의 진신과 법신은 이 땅에 상주하고 계신다. 이 나라야말로 정토의현장이고 연화장(運花藏世界)의실토(實土)이다.”
이것이 진불국토사상의 핵심이고 이 사장이 한국 정토신앙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정신적 원형이다. 따라서 우리 선대들은 인도를‘서천축(西天竺)’이라고 부르는 것에 견주어 한국을 ‘동천축(東天竺)’ 곧 ‘동방의 볼국토’로 불러서 한국 한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 선양하였다.
진불국토사상을 통하여 우리는 불교를 수용 발전시켜 가는 한국언의 주체적 수용 동기를 발견하고, 민족의식을 불교적으로 성숙시켜 가는 불교민족주의의 모태를 자각하게 된다. 우리 선대들의 탁월한 종교적 천재성과 역사의식은 불교와 민족의 근원적 일치를 실현시키고 이 국토를 불국정토의 현장으로, 이 민족을 정토실현의 당당한 주체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초전 성공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주체적 불교의식올 바탕으로 이 땅의 불자들은 타력의 신앙에서 궐기하여 스스로 보살이 되어 스스로 성불의 행로를 개척하여 갔다. 이렇게 하여 이 강토에서 불교 3천여년 사에서 미증유의 장엄한 성불의 역사가 꽃피어났다. 이 몸 이대로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되는 즉신성불(郞身成佛)의 신비한 기적들이 들꽃처럼 피어났다.
욱면랑도 이러한 들꽃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염불, 노동, 깨달음.
성불의 계기는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힘에 의하여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었는가?

이제 이 물음은 우리 시대 우리들 자신의 문제로서 절실히 제기되어 었다. 왜 ? 이 나라는 여전히 진불국토이고 우리는 변함없이 깨달음을 구하며 성불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욱면랑 성불사건을 주목하게 된다. 욱면비 성불의 계기는 염불수행이다. 욱면은 주인을 따라 미타사에 가서 일념으로 “나무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미타사의 여타 대중들도 동일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욱면 홀로 즉신성불함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그 원인을 염불의 질적 차이에서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욱면비의 염불은 일반 대중의 염불과는 스스로 그 질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욱면은 노비의 노역을 감당하면서 염불하였다.
더욱이 곡식 두 섬을 하루 저녁에 찧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염불하였다 그는 전심전력으로 절구를 찧으면서 염불하였다. 그에게는 절박하면서도 고통스런 노동 그 자체가 염불이었다. 노동과 염불 그에게 이 둘은 이미 몇개의 행위가 아니었다. 노동이 곧 염불이고 염불이
곧 노동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염불이 노동요(勞動謠)로 바뀌는 염불의 질적 전환을 발견하게 된다. 염불의 노동화, 이 전환이야말로 욱면 성불의 결정적인 동기이고 염불의 민중적 확산을 가능케 한 계기이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이 땅의 서민 대중들은 농촌에서 장터에서 거리와 마을에서 이렇게 염불하며 노동했고, 노동하면서 염불하였다.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불타의 명호를 알게되고 모두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할줄 알았다”는 원효전
(元曉傳)의 기록은 바로 노동요로서의 ‘나무 아미타불’이 서민 대중사회에 일상화되었다는 상황 증거 아닌가?
염불은 상류충의 유한자적(有閑自適)한 관념적 유희가 아니라, 서민 대중들의 절박하고 긴장된 삶의 언어, 노동의 율동 그 자체이다. 그런 까닭에 욱면비는 손바닥을 꿰뚫어 말뚝에 잡아매고 합장 염불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염불은 이미 전 생명력올 투입하는 깨달음의 노동인 것이다. 미
타사 천청에 뚫려 있는 저 구멍은 손바닥을 꿰뚫고 온몸을 던져 노동할 수 있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고 성불할 수 있음을 깨우쳐 주는 욱면불(都面佛)의 시중직지 (示聚直指)가 아닌가.

귀 기울여 들어 보아도 염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염불소리는 차고 넘치는데, 손바닥을 꿰뚫는 아픈 깨달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정작‘나무 아미타불’을 불러야 할 노동 대중들은 어찌하여 염불올 잊어버리고 말았는가. 내로라 하는 원효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길래, 저 공장 작업장에서는 분노와 투쟁의 함성만 울려오는가. 저들이 다시 ‘나무 아미타불’을 부르게 할 길은 없는가 수 많은 욱면불이 출연케 할 길은 정녕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