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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巨人)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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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성목 1987년 07월 65호
어느날 교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나라에 큰 일이 터질 적마다 자신은 수퍼맨이 되고 싶노라고. 그래서 통쾌히 악을 쳐부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우리는 교수님의 그 어린애 같은 엉뚱한 꿈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특히나 불교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봤을 때 더욱 수퍼맨이 되고 싶노라는 다음 말씀에 그만 강의실 안은 숙연해지고 말았다. 얼마나 잡초처럼 짓이겨지는 이 땅의 불교이기에 그 같이 허황된 꿈이라도 꿀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일까.

한 예로 십년 숙원사업인 경승제가 해마다 묵살되어 오다 9.7 해인사 승려대회를 기점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불교 자주화 운동이 퍼지려 하자 놀란 정권은 아첨하듯 서둘러 경승제를 실시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안간힘 쓰듯 소리 높여 외치는 불교 천육백년이란 역사는 미이라처럼 옛 영화의 화려한 표본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리라.
오백년 억불정책에서 해방됐는가 싶자 곧바로 일제의 간악한 침략에 묶인 채로 이승만 독재, 유신독재에 이어 현 군부독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악법에 교묘히 뒤얽혀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두 다리가 성해도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파도에 온몸이 시퍼렇게 멍든 채 숨죽여 살아가는, 우리가 아니던가.
6.25 동족상쟁으로 그 엄청난 양의 피가 아직도 국토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마당에 다시금 권력을 지키기 위해 동족간에 피를 흘리고 만 처참한 광주학살, 노동자의 잇단 분신투쟁, 부천 성고문 사건, 목동 상계동의 살인철거, 물고문 살인, 하늘도 고개 저을 그 고문살인의 조작 등. 우리는 신음하는 그들에게 눈물조차 제대로 흘려보지 못했으며 크게울어 주지도 못했다. 몸짓마저 크게 내보이지를 못했다. 호국불교의 장엄한 깃발 뒤에 웅크려 기침 한 번 제대로 해보이지를 못했다.
시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기엔 자신의 아픔에도 아파할 겨를이 없는 한갖 뒷방 늙은이처럼 사회의 뒷전에 처지고만 불교. 중생의 고통에 적극적인 구원을 펴보이는 타종교인의 열성적인 모습이 신문을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 박 종철 군 고문살인의 조작을 파헤친 정의구현사제단의 승리를 세상이 함께 박수치고 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불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통탄하는 불자의 울분에 우리는 그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마저 부끄러워해야 했다.
유치장에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전도하는 교인과 전도사를 봤을 때도 그랬었다. 비록 신자가 아니라도 정성껏 찬송가를 따라부르는 어두운 얼굴에 가득 어려있는 근심들을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덜어주지 못했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한갖 관념적인 구원관으로 머물고 있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걸치고 있는 옷마저도 부끄러했다. 호헌철폐를 앞장서 주장하는 신부·목사들의 삭발, 단식이 전국적으로 민주의 불을 당겼을 때 호헌을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낸 불교의 비굴하고 주름진 모습을 대했을 땐 눈물도 부끄러워 흘리질 못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종교를 대표하듯한 타종교 지도자의 입김센 말씀 한 마디에 차기의 최고 권력자는 아부의 미소를 듬북 갖고 제 스스로 방문하는데 일개 장관과의 면담도 구결해야만 함을 젊은 승가인들 앞에 호소하던 우리네 지도자를 더는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도 됨이 오히려 역겨움은 왜인가. 4.13 호헌에 즉각적인 반박성명을 낸 그 종교 지도자가 ‘마음을 비울 줄 알았는데…’ 라고 태연히 금강경의 공사상을 도용하고 있음도 역겨웠다. 하지만 단식을 하면서 이미 마음을 비웠노라던 야당의 모 당수님 말씀을 대하고도, 죽음조차도 신의 섭리로 치장하는 그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빼앗겨도, 그저 묵묵히 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였다.
사자를 죽일 수 있는 동물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만 몸 속에서 나온 아주 보잘것 없는 벌레에게 백수의 왕은 죽음을 당한다. 치문에 있는 말이다. 불교가 이 땅에서 중생을 이끌지 못함은, 위정자의 권력 남용에 의한 것도, 외세 종교의 불같은 힘에 의한 것도 아니며,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 그 허물이 있다 하겠다. 불재법의 개정을 스스로 포기하는가 하면 작은 밥그릇을 놓치기 싫어 큰 밥그릇을 줘버리는 어리석음을 보이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한쪽에선 호헌 지지, 한쪽에선 호현 철폐를 지지하는 등서로 다른 색깔로 한 집안을 치장하니 그 집안이 바르게 보일 리가 없는 것 아닐까. 아무리 승려가 천민으로 전락해 도성 출입을 못한 이조의 비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도 다시 없을 10.27 법난이 아직까지 정부의 한 마디 해명도 없이 국민들에게 은폐된 사실 역시 결국은 주인의 어리석음 탓이었다. 그 어리석음을 노골적으로 비웃듯 5월 18일 광주 원각사 법당에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한 사건은 그들을 뭐라하기 앞서 우리에게 내려진 모진 채찍으로 여겨 한 번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란 약하기가 풀잎같은가 하면 경우에 따라선 독버섯보다 더 독할 수 있는 존재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살생을 해 왔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보더라도 살생은 역사의 시작부터 있어 왔다. 그네들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배타적인 면도 어찌보면 살인자의 후손으로 역사의 시작을 열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첫번째로 금하셨다. 보이지않는 미물까지도 사랑하셨으며 풀 한 포기도 지중히 여기셨다. 그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자. 나라마다 전쟁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본래대로 평화로이 살아갈 수가 있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부처님의 불살생은 인간 회복의 산가르침임을 느낀다. 한 손엔 코란 또 한 손엔 칼을 든 회교나 성지 탈환을 위해 끊임없이 종교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단 한 번의 종교 전쟁도 알으키지 않았다. 그것은 큰 장점이 될 수 있는 반면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명령 한 마디에 무감각적으로 잔인해질 수 있는 현실에서 그것은 더욱 큰 약점인 것이다.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도 명령을 받아든 그들에게는 하나의 사격 목표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요 구천을 헤매는 수천의 고혼을 위해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기원하는 법당에 독한 최루탄을 난사하여 탱화를 찢고, 부처님을 상하게 하고, 스님이 있는 방안을 군화발로 짓밟고, 포 다시 최루탄을 던지는 행위만 보아도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생김 그대로 아이들 만화에 나오는 ‘로봇’인 것이었다.
정말 괴물같은 모습으로 방독 마스크를 쓴 전경대들이 철통같이 앞을 가로막은 교문 앞에서 원각사 폭력경찰 규탄대회를 가졌을 때 어느 비구니 스님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젊은 승가의 한결같은 눈물이었다. 겨울 커튼이 무겁게 드리운 학사법당에서 단식투쟁하는 스님들의 나날이 여위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우리의 가슴에 눈물이 흘렀다. 팔당 수륙제의 그 엉뚱한 기원법회를 들었을 때 눈물은 피로 엉켰다. 어쩌면 그리도 철저히 미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원각사의 수모가 천겁의 능욕처럼 우리의 사지를 찢어놓고 있는 이 판에 하필 88올림픽 성공 기원법회를 하다니. 호헌을 적극 지지한다는 추태보다 더한 추태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능욕된 몸뚱이를 내놓고 마구잡이로 굴리는 처사와 다를 바 없었다. 순교의 흰 피가 시방을 온통 하얗게 칠한다 해도 뒤늦은 한으로 남아 있을 이 땅에 말이다.
모자에까지 큼직히 써놓은 88올림픽 성공의 문구를 뒤늦게 보고는 너무너무 부끄러워 급히 쓰레기통에 모자를 버리고 말았다는 어느 비구니 스님의 한숨이 귀촉도보다도 서럽게 들렸다.
비구니의 허물은 벗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눈뜬 장님만은 벗어나야 옳지 않을까. 먹물옷을 보고도 미친개처럼 예수를 믿으라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나무랄 게 무엇이며 때때로 일어나는 승가대 승니들의 젊은 방황을 못마땅하게 여길 게 무언가. 더욱 가관인 것은 비구니회관 건립기금을 모금하는 수륙제의 본래 목적이, 물고문을 당했는지 아예 비치지도 않고, 텔레비전 뉴스에 88 올림픽 성공 기원법회로 둔갑해 버린 일이다. 역시 짐승의 짓일 수 밖에 없는…
임진왜란 때 원군온 명나라 장군 이 여송은 승군을 이끌고 온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께 평소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스님들이 무기를 들고 살생을 해도 괜찮은가고. 서산대사께서는 결연히 말씀하셨다.
“산돼지가 사람을 물었다고 합시다. 이 짐승을 찌르고 사람을 살려야 할까요, 아니면 살생이 두려워 보고만 있어야할까요. 지금 풍신수걸의 몸에서는 사람의 혼이 빠져나가고 짐승의 혼이 들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바다를 건너와서 사람을 물고 찢고 돌아가는데 중이라고 목탁이나 두드리고 앉아서야 쓰겠소이까?”
오늘날 윗자리에 미쳐 사람 혼이 나가버린 이 나라. 민주화를 열망하는 6.10 대회는 최루탄에 갇혀 간신히 숨어나 쉬고 있다. 또 하나의 젊음이 살인 최루탄에 사위어가고 버스에 던져진 최루탄에 내 아기를 살려달라는 젊은 엄마의 울부짖음이 거리에 피칠을 하고 있다. 이 거리 저 거리에 쫓기고 쫓는 꽃다운 두 젊음-전경과 대학생-들이 버티고 선 비극의 시간을 향해 우리의 눈은 황소처럼 떠져야 하리라. 오늘 뜨겁게 흘리는 우리의 눈물이 언젠가는 이 모진 겨울 땅에 찬란한 연꽃으로 피어나게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