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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얻은 기쁨-곡성 태안사 대발 발견조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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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1년 11월 237호
1966년 1월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때마침 모 신문사 문화부에서 고고미술考古美術 연구에 정열을 쏟고 있었던 이종석李宗碩씨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열차편으로 남원으로 갔고 오후 늦게 인근 곡성읍에 도착하였다. 낯선 곳이었으나 쉽게 여관을 찾아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낮에 답사하였던 남원 시내의 여러 유적·유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거리를 누볐다. 즐겁게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밤 장터에서 신파극이 열린다는 선전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문득 어릴 때 고향인 강원도 시골 장터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던 서커스단의 난쟁이와 어린 원숭이들의 재주가 생각나 함께 관람하게 되었다.
나팔소리와 함께 막이 올라 외줄타기, 공중그네타기, 어깨 위에 장대세우기 등의 아슬아슬한 묘기를 신나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치면서 ‘잠깐 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하였더니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순찰 경찰인데 낯선 사람이 보인다’는 신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짐을 여관방에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선 터이라 신분증은 여관에 있다고 말했으나 무조건 연행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한두 번의 실랑이 끝에 이종석씨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모 신문사 기자요. 여관에 신분증이 있다는데, 왜 여관으로 가지 않고 무조건 경찰서로 연행하려고 하는 거요. 그렇다면 당신 상관에게 갑시다.”하고 말했다. 순간 경찰은 움찔하더니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자라고 말하지 그랬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욱더 화가 난 이종석씨가 “그럼, 기자면 괜찮고 일반 서민이면 막 잡아가는 거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랬더니 ‘여관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순찰 중이므로 바쁘다’고 하며 그냥 가려고 하는 경찰을 오히려 우리가 연행하다시피 억지로 끌고 여!
관까지 갔었다.
신분증을 보였더니, 사실은 요즈음 치안관계상 외지인들을 심문한다고 하며 미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끈한 차 한 잔씩을 마시며 오해가 풀렸다. 그리고 내일 가려고 하는 태안사 지역의 치안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 곳은 염려없다는 대답이었다. 이기자와 나는 첫날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태안사행을 중지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왕에 여기까지 왔고 또 치안상태도 좋다고 하니 계획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열차편으로 압록역에서 내려 서쪽 지방도로를 따라 삼거리 합수머리에 이르러 주막에서 쉬면서 이 곳 일대의 지리를 묻는데 주모가 하는 말이 ‘여기의 은어가 천하일미인데 맛보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술과 꾸덕꾸덕 말린 은어를 먹으니 과연 별미였다. 여기에 점심까지 곁들여 먹고 나서 오후에 길을 나섰는데 얼큰한 취기 때문인지 시골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이십여 리를 걸어 강을 건너 다시 십여 리, 태안사 마을에 이르니 해는 벌써 지고 있었다. 어두워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계곡을 따라 태안사에 올라가니 한밤중이었다.
절은 조용하고 스님은 한 분도 계시지 않고 처사 한 사람뿐이었다. 저녁을 처사에게 부탁하였으나 저녁거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감(연시) 몇 개를 주는 것이었다. 감과 물로 배를 채우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방바닥이 차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처사와 함께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나서야 하룻밤을 겨우 지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셋이서 먹은 죽은 나물이 밥알보다 더 많았으나 꿀맛이었다. 우리는 첫날부터 기분을 잡쳤고 또 부처님을 뵈오려 오는 도중에 압록에서 생선을 먹고 왔으니 제대로 풀릴 리가 있겠느냐고 하며 벌을 받는 것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던 일이 지금까지 기억에 선명하다.
많은 유적유물을 검토한 후 처사가 일러준 창고 안의 유물들을 마지막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금구, 동종, 운판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거대한 대발大鉢이 눈에 띄어 깜짝 놀랐다.

놋쇠로 주조된 한쌍의 대발인데 직경이 92㎝나 되는 큰 작품인 점과 양쪽 표면에 각기 백여 자의 점선 명문이 있어 뚜렷한 연대와 제작 경위를 알 수 있어 특히 주목되었다. 형태는 통형通型(악기의 일종인 침발)인데 양쪽면 중심부에 원형의 돌기가 있고 그 가운데 작은 원형의 공기구멍(空氣孔)이 있었다. 주연까지의 간지間地에는 두 군데 2조條의 원권圓圈이 있다. 대형이고 중량인지라 수시로 들 수가 없기 때문에 고정시켜 타종하기 위하여 매달아 놓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었다. 명문은 표면 주연에 1행이 음각되어 있는데 내용은 양쪽이 같으나 글자수와 문구가 조금 다른 데가 있다. 양쪽의 명문을 판독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桐裏山泰安寺大鉢正統十二年丁卯八月日造成大功德主孝寧君施主安城李氏革?末?純?化主持○○○○○○○景泰五年甲戌三月日改造大功德主孝寧大君高?惠?夫人安城夫人李氏○寺?大釋?師尙珠大化主○○○○○敏이며 다른 또 하나의 면에는 주연 이외에 중앙부에 1행의 음각명문이 첨가되어 있다.
② 桐裏山泰安寺大鉢正統十二年丁卯八月日造成孝寧大君施主安城夫人李氏化主···? 景泰五年甲戌三月日改造大功德主孝寧大君高?惠?夫人李氏○寺?大釋?師尙珠大化主○○○○○敏(이상은 주연부의 명문임)王上殿下壽萬歲王妃殿下壽春年世子低下壽4秋孝寧大君·?·?·?(중앙부의 명문임)이 대발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탓으로 얕게 음각한 부분의 명문을 판독하기는 곤란하나 충분한 시간을 갖고 판독하면 완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대발은 효령대군의 공덕에 의하여 정통 12년(세종29년, 1447)에 조성되었다가 경태 5년(단종2년, 1454)에 개조된 것이다. 대군은 원각사圓覺寺의 창건을 감독한 일이라던가 평소에 승도僧徒를 모아 불경을 강독하는 등 불교를 크게 숭상하였으므로 비록 배불숭유를 국시로 내세웠던 조선왕조의 왕자였으나 이러한 불구佛具의 공덕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대발大鉢’이란 명칭은 새로운 예例이며 이백여 자의 명문은 조선시대 초기 금석문金石文의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이 대발은 한참 후인 1988년도에 ‘태안사 대바라大’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956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조사 후 보물지정을 건의하였으나 이러한 유례가 없어 보류되었던 것이다. ‘고생끝의 낙樂’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