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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성보(聖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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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7년 07월 65호
천년 가람에 보물이 어찌 따로 있으리요, 거기 가야산에 해인사가 있음에 그것이 보물이요, 천년 세월 속에 빛 바랜한 조각 기와들이며 뜨락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에도 천년 역사의 숨결이 간직되어 있고 푸른 솔 우거진 골짜기와 변함없이 흐르는 구름이며 물소리가 오히려 큰 보배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이 가끔 어떤 역사적 유물을 보거나 보물을 볼 때 너무나 물량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나 잣대를 가지고 보려고 하는데 그런 시각과 가치관으로 보면 모든 역사적 사실은 다만 초라해 보일 뿐이다.
깨어진 그릇들이며 돌이며 빛 바랜 그림들을 현상적인 눈으로 볼 때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면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 정신성이나 때묻은 역사성일 것이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기술과 문명은 옛 문화재를 어렵지않게 재현해 내고 있으니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경주 박물관 잎에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모형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불국사 뜨락에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에서 느낄 수 있는 옛탑만이 지닌 그윽한 향기를 그것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모형 탑에서는 느낄 수 없으며, 요즈음 아무리 잘 빚은 항아리라도 조상들이 만든 청자와 백자와 분청사기의 맛에는 비견할 수 없음은 작품의 우수성이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역사성과 정신성이 소중한 까닭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듯이 역사의 때묻은 빛깔은 흉내내기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역사적인 가치를 물량적인 가치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현상적이요 물량적인 눈으로 역사의 유물을 파악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역사의 현장으로 올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현대 건물의 위용으로 가득찬 63빌딩으로 가서 현대 문명과 기술에 도취하며 하루를 즐기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천년 고찰 해인사에 와서 낡은 기와집 몇채와 나무판자에 글 새겨 놓은 것이나 보고 턱없이 커 보이는 불상이나 보고 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역사적인 현장(現場)에 와서 가시적(可視的)인 눈으로 사불을 확인하는 정도에 머문다면 아무 의미도 없으리라. 역사적인 유물은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물들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자에게만 때묻고 어줍잖은 낡은 기와 조각이라도 의미없이 구르는 돌맹이 하나라도 그 역사의 숨결과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보여 줄 것이다.
해인사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절인 만큼 많은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해인사 전체가 모두 보물이다. 그리고 가야산이 보물이다. 그러나, 이미 전 호(號)에서 해인사의 집과 가야산의 내력은 소개하였기에, 이제부터는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보물들과 더불어 탑이나 비와 같은 유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여 가겠다.

정중탑(庭中塔)
탑은 불교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조형예술이다. 불교의 유적은 수투파(Stupa) 곧 탑에서 그 기원을 찾는데, 탑은 불상(佛像)이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으니 최초의 불교의 예배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탑은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부처님의 유물 곧 사리를 모시는 조형물이었으므로 자연히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탑 자체가 부처님의 봄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탑문화가 형성되었다.
불교 미술사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산치대탑을 비롯한 근본 탑을 이룬 뒤에 수없이 많은 탑을 조성하였으며, 불상이 나타나 불교의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기 전까지는 탑이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었으며 그렇듯 중요한 탑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전래되었다. 당은 그 종류도 다양하여 진흙탑(泥塔), 전탑(塼塔), 석탑(石塔), 목탑(木塔), 칠보탑(七宝塔), 금동탑(金鋼塔) 등 다양한 재료를 써서 만들어져 왔다.
우리나라는 재료에 따라 다양한 탑의 종류 가운데 석탑이 가장 중심이 되어 우수한 탑 문화를 형성하였다.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에 탑이 기러기처럼 많았다 하는데, 대체로 오늘날에 와서 가람을 시대에 따라 구분할 때에 한 가람에 탑이 하나냐 둘이냐 하는 것은, 특히 신라 시대 가람의 경우, 통일 이전의 가람이냐 통일 이후의 가량이냐를 구분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대체로 삼국 시대 신라의 탑은 일가람일탑식(一伽藍一塔式)이며 통일신라 이후의 가람들은 일가람 이탑식(一伽藍二塔式)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탑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중국에서의 통례를 따랐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인사 뜨락의 삼층 석탑 곧 정중탑(庭中塔)은 대체로 그 양식을 갖춘 탑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신라 탑의 일반적인 특정을 잃었으며, 특히 1926년에 중수할 때 삼성기단(三成基壇)위에 삼중(三重)으로 선 이 탑의 기단 이층 이하를 근본적으로 고쳐 좀 무겁고 둔중하기는 하나 신라 탑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파괴하였다는 애석함을 떨쳐버릴 수 없다.
대체로 이 탑의 창건 연대는 창사(創寺) 연대와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하나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중수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 태조2년인 1393년에 중수하였고, 그 뒤 성종 19년 서기 1489년에 왕대비의 원력으로 학조(學祖)대사께서 이 탑을 개수했으며, 일제 때인 1926년에 장 길상(張吉相)씨의 원력으로 중수하였으나 너무 잘 고치려는 생각이 앞서, 앞에서 말했듯이, 기단 이층 이하를 고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다.
탑이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것에 비해 이탑은 아홉 분의 금불(金佛)을 모신 탑으로서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두 분,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리고 지장보살 두 분 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이 탑의 높이는 16.77척이며 초층(初層) 탑신의 넓이는 3.72척이며 상성기단(上成基壇)의 너비는 6.36척의 탑신을 가진 탑이다.

석등(石燈)
신라 석등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통도사, 범어사, 불국사, 청량사, 그리고 해인사의 석등이 있다. 해인사의 석등은 불국사 석등을 제외하고는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 가운데 남다른 아름다움과 우수함을 지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 탑을 중수할 때 다시 간석(竿石)을 바꿈으로써 신라 석등의 원형을 잃게 한 중대한 과오를 저질러 정중탑이 그 원형을 잃은 것만큼이나 애석함이 크다.
석등의 전체의 높이는 약 310cm이며 방형(方形) 대석에는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위에 여덟 잎의 복연(復蓮) 이었으며 연판면(蓮瓣面)에는 보상화문(宝相華紋)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앙연(仰蓮) 위에 위치한 화대석(火袋石)에는 4면에 각기 사천왕(四天王)상을 양각(陽刻)했으며 그 사이에 4개의 창을 내었다.
비록 지금은 석등이 그 지주(支柱)를 잃어 원형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석등의 수법으로 보아 그 의장(意匠)이 참신하며 경쾌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