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탑(庭中塔)
탑은 불교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조형예술이다. 불교의 유적은 수투파(Stupa) 곧 탑에서 그 기원을 찾는데, 탑은 불상(佛像)이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으니 최초의 불교의 예배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탑은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부처님의 유물 곧 사리를 모시는 조형물이었으므로 자연히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탑 자체가 부처님의 봄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탑문화가 형성되었다.
불교 미술사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산치대탑을 비롯한 근본 탑을 이룬 뒤에 수없이 많은 탑을 조성하였으며, 불상이 나타나 불교의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기 전까지는 탑이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었으며 그렇듯 중요한 탑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전래되었다. 당은 그 종류도 다양하여 진흙탑(泥塔), 전탑(塼塔), 석탑(石塔), 목탑(木塔), 칠보탑(七宝塔), 금동탑(金鋼塔) 등 다양한 재료를 써서 만들어져 왔다.
우리나라는 재료에 따라 다양한 탑의 종류 가운데 석탑이 가장 중심이 되어 우수한 탑 문화를 형성하였다.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에 탑이 기러기처럼 많았다 하는데, 대체로 오늘날에 와서 가람을 시대에 따라 구분할 때에 한 가람에 탑이 하나냐 둘이냐 하는 것은, 특히 신라 시대 가람의 경우, 통일 이전의 가람이냐 통일 이후의 가량이냐를 구분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대체로 삼국 시대 신라의 탑은 일가람일탑식(一伽藍一塔式)이며 통일신라 이후의 가람들은 일가람 이탑식(一伽藍二塔式)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탑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중국에서의 통례를 따랐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인사 뜨락의 삼층 석탑 곧 정중탑(庭中塔)은 대체로 그 양식을 갖춘 탑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신라 탑의 일반적인 특정을 잃었으며, 특히 1926년에 중수할 때 삼성기단(三成基壇)위에 삼중(三重)으로 선 이 탑의 기단 이층 이하를 근본적으로 고쳐 좀 무겁고 둔중하기는 하나 신라 탑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파괴하였다는 애석함을 떨쳐버릴 수 없다.
대체로 이 탑의 창건 연대는 창사(創寺) 연대와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하나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중수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 태조2년인 1393년에 중수하였고, 그 뒤 성종 19년 서기 1489년에 왕대비의 원력으로 학조(學祖)대사께서 이 탑을 개수했으며, 일제 때인 1926년에 장 길상(張吉相)씨의 원력으로 중수하였으나 너무 잘 고치려는 생각이 앞서, 앞에서 말했듯이, 기단 이층 이하를 고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다.
탑이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것에 비해 이탑은 아홉 분의 금불(金佛)을 모신 탑으로서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두 분,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리고 지장보살 두 분 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이 탑의 높이는 16.77척이며 초층(初層) 탑신의 넓이는 3.72척이며 상성기단(上成基壇)의 너비는 6.36척의 탑신을 가진 탑이다.
석등(石燈)
신라 석등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통도사, 범어사, 불국사, 청량사, 그리고 해인사의 석등이 있다. 해인사의 석등은 불국사 석등을 제외하고는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 가운데 남다른 아름다움과 우수함을 지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 탑을 중수할 때 다시 간석(竿石)을 바꿈으로써 신라 석등의 원형을 잃게 한 중대한 과오를 저질러 정중탑이 그 원형을 잃은 것만큼이나 애석함이 크다.
석등의 전체의 높이는 약 310cm이며 방형(方形) 대석에는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위에 여덟 잎의 복연(復蓮) 이었으며 연판면(蓮瓣面)에는 보상화문(宝相華紋)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앙연(仰蓮) 위에 위치한 화대석(火袋石)에는 4면에 각기 사천왕(四天王)상을 양각(陽刻)했으며 그 사이에 4개의 창을 내었다.
비록 지금은 석등이 그 지주(支柱)를 잃어 원형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석등의 수법으로 보아 그 의장(意匠)이 참신하며 경쾌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