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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타카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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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고은 1987년 07월 65호
지난번 초파일 기념 강연을 해달라는 정토구현 승가회 회장 청화스님의 부탁을 받고 아무리 바빠도 구멍을 뚫어 그 강연은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거기에 응했다. 그 강연은 후원하는 기관이 총무원이라 하니, 허허, 나 같은 사람의 강연도 그런 후원을 받는가 싶어 의아한 바도 없지 않았다. 강연 제목은 그쪽에서 정해 준 것으로 불교문학의 이념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초파일 불공을 드리는 심정으로 조계사 대웅전에서 강연을 했다. 여느 때 같으면 으례 강연 직전에 소주 반병쯤으로 목을 축이고 나가는데, 그날 저녁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법당 안이 청중으로 가득하게 메워졌다. 나는 말했다.
몇 차례의 경전 결집을 거쳐 그것이 고대문자로 번역, 전파된 이래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이미 불교문학이 크게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불교문학이 필요치 않은 ‘문학의 포화 상태’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불교문학은 석가 한 사람으로서 충분하다는 극단적인 발언조차 있을 법하다. 8만4천 법문이 더 무엇으로 나아가겠는가. 그러나 세상이란 그렇지 않다. 불교의 발생 이래 삼장의 오랜 계승과 발전으로 말미암아 다른 데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대량이 되었다.
대강 이같이 전제한 뒤에 나는 불교 경전의 분류 체계로서의 12분경(12부경)을 설명했다. 곧, 제1 수드라(經), 제2게야(重頌), 제3 비야카라나(授記), 제4 가타(偈經), 제 5우다나(無問自說), 제6니다나(因緣), 제7아바다나(譬喩), 제8 이티육타가(本事), 제9지아타카(本生), 제10바이풀랴(方廣), 제11 아드부타다르마(未曾有), 제12 우파데사(論議)로 니뉘는, 불교 경전을 그 성질 빛 형식으로 구분한 체계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문학 일반론을 통해 재배치하여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그때의 강연 요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때 내가 유난히 강조한 부분의 하나가 자아타가(本生)이기도했거니와, 불교문학 가운데에서 바로 이 자아타카 문학 곧 본생담 문학이야말로 세계문학의 시각에서 보아 가장 진부한 찬사로 말해, 금자탑이라는 사실이다.
불교문학에서 우리는 진작부터 최고봉의 문학을 가지고 있다. 대시인 마명보살은 불소행찬이라는 석가 일대기에 관한 대서사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 유려한 시문의 무한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당할 수 없는 영역이 그 앞에 있다. 그것이 바로 자아타카인 것이다.
본생이란 석가부처님이 전생 다생에 살아 온6도 행업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경전의 곳곳에 삽화로 끼어 있는 것이 그것이겠는데, 그것들만을 한 책으로 만든 것도 적지 않으니 생경, 백연경, 현우경, 잡보장경, 육도집경, 보살본연경,보살본생만론, 보살본행경 둥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다한 것은 아니다. 팔리어의 삼장에서는 소부(小部) 니카야 가운데 자아타카라는 1부가 있다. 거기에는 550종의 부처님 본생담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이미 오래 전에 유럽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번역되어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같은 자아타카 문학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학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는 불교의 3세 전생의 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3세도 어디 3세로서의 막연한 과거세, 현세, 미래세뿐인가. 전생다겁으로서의 과거일 것이고 미래제로서의 무한 전생일 터이다. 유교는 사람이 죽어 천제에게 돌아간다 하고, 기독교와 회교는 내세 천당에 갈 뿐이다. 그 이상은 없다. 더우기 교조의 과거 인행에 대해서는 그 출생 이후의 전기 외에는 다른 것이 전제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전생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타카 문학은 고대 인도의 전생시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크게 진작시킨 독보적인 산물이다.
과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류가 낳은 위대한 사람이다. 서구의 개념으로 말하는 신에 비하여 하나도 열등할 바가 없을 만큼 초인간적이기도 한, 진리의 창출자이다. 그가 선포한 불교의 진리는 고대 세계의 추축권의 어느 진리보다 높고 깊고 크며 멀다. 그리하여 불교는 단순히 신앙만으로도 안 되고 단순히 철학만으로도 안 되는 불가사량의 진리이다. 이같은 광대무변의 진리를 한두 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그것은 해탈-해방이요 자비-, 사랑과 창조일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의 원시인민위원회 수장(首長)의 이들로 태어나서, 그의 나라를 일으키는 일보다는, 청년기의 타락과 세속적 영달을 깨부수고 집을 떠났다. 29세의 출가란, 거기에는 그가 보낸 청춘의 종언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29세에서 35세 사이의 고행 6년의 결과로 그는 한 혁명적인 구도자로부터 깨달은 자가된 것이다. 선가에서는 입정 3일 만에 한 소식 깨우쳤다 해서 3일암이라는 데도 있지만, 3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3개월이나 3년이라도 또 6년의 시간일지라도 부처를 이루는 시간으로는 너무 짧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니, 그분이 6년이 아니라 평생을 다하여 공부한 끝에 숨이 딸깍! 하는 임종에 활연히 개오한다 해도 그 한 평생이 성불의 시간으로서는 짧을 뿐이다.
불교의 시간이야 삼계를 집어삼키는 한 찰라에서 무량겁을 볼 수 있으니, 6년이 현겁일 수도 또 한 순간의 번개일 수도 있다. 허나 공부란 착실하고 우직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 수행에서 말하는 바 돈오론은 자칫 잘못하면 크나큰 거짓이 되고 만다.
부처님의 위대함은 그가 6년 고행을 지나서 깨달은 자가 되었다는 데에 있지 않고, 그가 깨달은 진리의 내용에 있다. 곧, 불교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불교의 진리를 깨달아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고 불교 교단을 창설하여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진리가 살아 있게 하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 힘을 자아타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부처님은 전생 다생의 보살 행업을 통해서 그 유구한 역사의 초역사적인 삶과 죽음으로 하여금 끝내는 이 세상의 6년이라는 눈꼽만한 기간을 매달아 부처를 이룩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타카에서 말하는 전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을 신화 속에 잠기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살아 있는 모습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객관적인 현실이자 당위를 뜻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란 현생 성불의 대사업에 이르는 필연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란 보살행의 연속으로만 충당되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부처에 이르는 정당성을 획득한다. 말하자면 이같은 부처님의 역사적인 과정 없이는 부처를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6년 수행 따위로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선정, 정려 등의 수행방식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상투적인 생각은 크게 잘못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즉 성불의 조건은 보살행이다. 자기자신을 고요한 경지의 내적인 안전성에 의존하여 깊은 삼매에 든다는 것은 진리를 체득하려는 자에게는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불한다는 것은 고대인도 및 중국 선종의 부분적인 오산이다.
성불하려거든 자기자신을 세상을 위하여 던져야 한다! 몽땅 바쳐버려야 한다! 단 한번이 아니라 수백번 바치고 바쳐야 한다! 세상과 진리를 위한 철저한 자기 희생이야말로 부처로 가는 길이다.
금강명경의 사신품(捨身品)은 굶주린 호랑이에게 제 몸을 던져 먹힘으로써 호랑이를 살려 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죽여 남과 이웃과 세상을 살려내는 희생 즉 보살행의 한 전형이다. 이같은 보살행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애를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행의 역사에 채워야 하는 것이다. 자아타카는 바로 그것을 숙연히 가르치고 있다. 이 점에서 보자면, 과연 우리 불교계의 출세간주의와 선의 독점 체계로 인한 산중주의가 무엇인가를 한번 가차없이 따져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자아타카는 부처 이전의 보살상이다. 그 보살의 역사없이는 불교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처님의 과거 인행을 통해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나는 권위주의의 신수에게 법을 전하지 않고 중도 아닌 비천한 혜능에게 전하여 망명을 시켰던 5조 홍인의 멋진 이단 행위를 늘 자랑하고 있거니와, 오늘의 불교계를 비과학적이며 반역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산중 권위주의로서의 ‘죽은 선’이 하루빨리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83년에 내가 감옥에서 나온 직후 실천불교가 창간되어 진관으로부터 그 권두언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의 내 건강 상태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실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불은을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해도, 다만 몇 마디나마 써 주었다. 그 한 대목을 여기에 뽑아 옮겨본다.

부처를 심산유곡에서 이룬다고? 그런 망상으로 몇천년의 꿈을 허송한 잘못이 너나할 것없이 우리 몸과 뜻에 들어 있읍니다. 부처란 주린 범에게 제 몸을 밥으로 바친 값으로 받은 이슬방울입니다. 부처란 아픈 중생, 눌린 중생을 풀어주려고 몸바친 끝에 겨우 얻은 어느 첫여름 아침의 풀잎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딱 한번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게아니라, 몸을 밥으로 바친 역사를 세세생생 쌓아야 겨우 이룰까 말까한 것이 부처입니다.
부처 되려는 사람들! 다른 공부 버리고 먼저 몸 바치는 공부에 뛰어들도록 합시다. 억만 중생의 아픔과 괴로움들이 뭉치고 뭉쳐서, 뭇 중생들의 즐거움이 맺히고 맺혀서 한 일꾼을 만들 것입니다. 그 일꾼이 곧 부처입니다… 부처는 6년 수행으로 성취되는 게 아닙니다. 수행으로 부처된다고 믿는 사람은 부처의 길 세세생생을 딱 잘라버리고 끝만 보고 있읍니다. 부처란 아픔과 괴로움의 중생으로 몸을 바쳐서 얻은 또하나의 종생의 역사입니다…

나는 이같은 보살의 역사가 시작된 오늘의 젊은 불교인들을 지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