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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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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산책 - 재연 2001년 11월 237호
근본주의자들은 세계와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투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독단과 편견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주의는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세계의 전쟁\'을 공언하는 미국의 극우 매파와 그들을 지지하는 우방들과 똑같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하겠다.
도처에 널린 근본주의자들

요즘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는 몇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간단히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보면, 첫째, 근본주의자는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 전적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본래의 전통적인 신앙과 실천을 에누리없이 고수하려는 사람이다. 둘째로, 자기 종교 혹은 자기가 속한 파派의 견해 이외에는 어떤 신앙과 전통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위의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즉, 계율을 목숨보다 중하게 생각하는 율사律師들과 철저한 무소유를 주장하는 불교 수행자들, 그리고 기독교 반전론자反戰論者들은 첫 번째 부류에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통째로 부정하거나 폄하貶下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종교에나 근본주의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다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네 것이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삿된 것이요 악이니, 뿌리째 뽑아 아예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와중에 희생되는 사람을 순교자로 찬양하고,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의의 이름으로 벌이는 또 다른 폭력이 횡행할 때, 이 세상은 다름 아닌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근본주의는 불교의 어느 구석에도 발붙일 틈이 없다. 우선 연기緣起의 원리를 그 사상과 수행·실천체계의 핵으로 삼는 불교에서 ‘절대’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절대라는 말을 써서 불교의 입장을 말하라면 고작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숫따니빠따》의 Cu-l.aviyu-ha-sutta, 884번 게송偈頌에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혹자는 말한다.)
‘진리는 오직 하나요 두 번째는 없노라!’고
유식한 자들은 제각각 그 말을 가지고 다툰다.
그들은 각각 자기 주장을 고집한다.
따라서, 사문은(진리가 오직)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경은 이어서, 오로지 자기 주장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게 만드는 게 사실은 인간의 정신 작용 가운데 하나인 상想(sau~u~a-)의 결과, 즉 상想(개념) 놀음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리니, 유일이니, 절대니 하는 것들은 그 근본에 있어서 개개인의 기호와 편견이 개입된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리나 절대 유일의 의미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이것을 아는 불교도는, 따라서, 역사와 환경의 산물에 불과한 종교·정치·사회 사상이나 주의가 그것 자체로 완전 무결하며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수긍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시원과 종말, 아라한의 사후 세계, 혹은 진리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장부 니까야 Pa-sa-dika-sutta(DN. III), 한역 장아함 제17 《청정경淸淨經》에도 같은 문제가 나오는데, 거기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단호하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오직 이것만이 참이요, 나머지는 말도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주장을 수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에 대해 수많은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각각 자기 주장만 절대적으로 옳고 나머지는 틀렸다고 우길 때, 결과적으로는 모두 다 틀린 것이 되고 만다. 나름대로 지혜를 뽐내며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고집한 결과 끝내 함께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 문제를 개인과 자기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점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일체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우리는 성자(muni)라고 부른다. “성자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다. 기울지 않으므로 억지로 해야될 일도 없다.” (Sn. 780) 그는 이미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때로는 악의를 갖고 말하기도 하며, 때로는 호의로 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악의와 마찬가지로 호의라는 것도 사실은 편견의 일종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세계와 사회를 한 발자국 물러나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투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독단과 편견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주의는 비단 이슬람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세기의 전쟁을 공언하는 미국의 극우 매파와 그들을 지지하는 우방들도 똑같은 근본주의자들이다. 따지자면 이슬람 근본주의 발생과 창궐을 조장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기회주의적 외교·경제 정책이었다.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미국과 파키스탄의 보호막 속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과격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잉태된 것처럼, 이란의 좌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슬람 교직자들에게 힘이 주어졌고, 팔레스타인의 PLO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하마스를 지원했던 것이다. 미국은 “감히 우리에게!”라고 말하기 전에 “왜 우리일까?”라고 물어야 한다.
미국은 단 한 번도 요즘 벌어지는 온갖 북새통과 난장판의 근본 원인은 싼값에 기름을 가져오겠다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런 속셈을 전혀 모른다는 듯, 미국 언론은 기름의 ‘기’자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곁가지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그렇게 대중을 오도誤導하고 동시에 자기 기만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우리 사회에도 도처에 깔려 있다. 우선, 제 생각과 조금만 다른 이야기를 하면 얼른 물감을 뒤집어 씌우고 난리를 벌이는 정치인들이나 공연한 일로 적색 히스테리 현상을 보이는 언론이 그렇다. 가까이는 이 경전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는 사람들로부터, 지하철역에서 차표를 사고 있는 나에게 회개하고 천당에 가라고 소리친 그 갸륵한 전도 일꾼은 두말할 나위 없는 근본주의자다. 그리고, 느긋하게 웃어 주지 못하고 미간을 있는 대로 다 찌푸렸던 나도 근본주의자일까?

성자는 선입견을 지웠다.
세계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도
이미 망상과 교만을 버렸다.
무엇이 그를 붙잡을 수 있으랴? (Sn. 7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