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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물답게 찍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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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백종하 2001년 11월 237호
홍류동 계곡에는 항상 맑디맑은 물이 쉼없이 흐르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누가 먼저 가겠다고 다투지 않고 아래로만 흐를 것이다.
어둠의 끝이 남은 이른 아침, 홍류동 계곡 옆을 걷고 있으면 물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는 들린다. 분명 밤새도록 물이 쉬지 않고 흘렀을 것이다. 한 번의 끊김도 없이.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산 날씨에 미처 준비되지 않은 얇은 옷을 뚫고 새벽의 바람이 파고들어 눈 덮인 홍류동 계속의 모습이 찰나에 스쳐 지나간다.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아쉬운 가을의 기운이 가득한 이 곳의 약간은 비탈지지만, 너른 바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귀가 열리고 세상의 맑은 소리들이 들려 또 하나의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
물이 부딪혀 바위를 쓸어 내리는 소리, 공기가 움직여 바람을 만드는 소리, 이슬을 털어 내는 잠자리의 여린 소리, 가을꽃이 아침햇살을 맞이하려는 소리,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 물이 흐르듯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다. 시간이 멈추면 물도 흐름을 중단할 것이다.

사진은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나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고 남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고, 사회의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나를 통해 남을 나타내고, 남을 통해 사회를 나타내고, 사회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이 사진이다. 바람이 불면 청아한 소리를 내는 대적광전의 처마 밑에 있는 풍경風磬이 그 소리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사진도 그 곳에 찍혀져 있는 사물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연을 찍는다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배우는 과정 중의 일부인 것이며, 그것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무리를 가하지 않음으로써 저절로 되는 것이며, 자신의 목적에 맞추기 위해 힘들여 노력하지 않아도 일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은 결코 잘난 척하거나 꾸미거나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자연 그대로’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심으로 인해 자연의 질서를 해치고 무리無理를 가하게 되어 결국 뜻을 해치게 된다. 무리無理와 작위作爲가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인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추구하는 바를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고 집착에서 벗어나면 정신적인 절대자유에 도달하게 되는데, 노자老子는 이것을 ‘도道’라고 하였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자연인 것이다.

이른 새벽이라 길과 숲의 경계가 아직 선명하지는 않지만 결코 길 잃을 염려 없이 오솔길을 따라가며 일년 전 이맘때 가야산에서 본 가을에 피는 야생화들을 기억해 본다. 분명 이 자리에 하얗고 잎이 가는 구절초가 있었는데…… 저 소나무를 지나면 황금빛을 하고 있는 소국이 한아름 피어 있었는데…….
저기 있는 키 작은 들국화를 바라보며 아름다움과 자연의 신비로움과 그 질서를 느끼는 것은 덕 있는 마음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아름답기 때문에 꽃을 꺾어 내 방의 화병에 꽂아 향기를 맡아야지’하는 것은 욕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까닭이다.
스스로 찍히는 사진, 저절로 찍히는 사진, 사진 안에 내가 없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다. 풀 한 뿌리,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찍더라도 자연을 찍는 것이지 욕심을 찍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욕심이 나의 사진에는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장경각에 오른다.

봄비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으며 서 있는 붉은 진달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은 솔잎의 강한 초록과 햇 솔잎의 부드러운 녹색의 차이를 느낀 적이 있는지?아무리 아름답고 현란한 물감도 가을물이 든 하나의 감잎이 가지는 아름다운 색을 따라오지 못함을 느낀 적이 있는지? 가을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것은 느끼는 자가 주인인 것이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세상의 재물이 다 내 것이 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년도 못 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튼다 한들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고 한들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다”고 하였으니 욕심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야산의 진달래도 아름답게 느끼는 자의 것이며,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팔만대장경도 그 귀함을 아는 자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자연을 찍은 풍경사진은 화려하거나 장엄한 것보다는 단아하고 단정한 것이 보기에 좋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거나 열광시키기보다는 흥미를 끌고 향기가 있는 것이며, 지나치게 호기심을 유발하기보다는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 좁지만 평탄한 오솔길 양쪽으로 키 크고 잎이 넓은 나무숲 속에서 걷는 기분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그런 사진이 좋다.
물은 물답게 찍기를 원하고, 나무는 나무처럼, 하늘은 하늘같이 찍는다.
조선시대의 이름 모를 도공이 그 어떤 장식이나 고운 빛깔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 채 열기가 식지 않은 가마에서 그 희디흰 백자를 번쩍 들고 너털웃음을 지었을 그 도공의 백자처럼 그런 담백한 사진을 찍고 싶다.
선禪의 목적이 깨달음이며 순수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내가 사진하는 목적과 다를 바가 없다.

계곡에서 원당암을 보면서 종정 스님의 건강하심을, 장경각에서 장주 스님의 한결같으심을, 대적광전 옆을 지나며 방장 스님의 평안하심을 기원하고, 지족암을 보면서 돌아가신 일타 스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