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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큰스님을 회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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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큰스님을 회고하면서 - 변밀운 1987년 07월 65호
지금까지 조실 큰스님을 모시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제 나름대로 말씀드리니, 스님을 아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며 혹여 잘못 말씀드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널리 이해하시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조실 큰스님은 통도사 주 청담(朱 淸潭)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뒤 줄곧 통도사에 계시다가 뒤에 불영사 주지로 취임하셨는데, 스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곳은 바로 불영사라고 합니다.
조실 스님께서 경상도 천축산에 있는 불영사를 좋아하시게 된 연유는 스님의 법사 스님께서 절을 복원하다시피 한 큰 불사를 이루셨기 때문이랍니다. 그 즈음 불영사는 사찰 운영이 몹시 어려워 거의 폐사의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법사 스님은 그러한 불영사를 복원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배로 엽전을 가득 싣고 울진에 와서 그 돈으로 절을 복원하심은 물론 여러 가지의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정리하셨답니다.
조실 스님께서 불영사 주지로 계실 때 청담 스님은 그곳의 조실로 계셨고, 자운(慈雲) 스님을 비롯한 근대 선지식 스님네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3년 결사를 작정하고 용맹정진하셨답니다. 자꾸만 쇠퇴해 가는 우리 불교를 한번 일깨워 보자는 이념 아래 여러 스님들이 모였지만, 날이 갈수록 한 사람 두 사람 자꾸만 포기하고 그곳을 떠나갔다고합니다. 맨 나중에는 오로지 한 분 자운 스님만이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조실 스님께서 장에 갔다오니 그 스님마저 보이지 않았읍니다. 부랴부랴 뛰어나와 여기저기를 찾아 헤맸으나 찾을길이 막연하여 산으로 뛰어올라가며 그 스님의 이름을 불렀읍니다. 그러던 끝에 산마루에서 쉬고 계시던 자운 스님을 간신히 만났답니다. 조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냥 돌아서 왔답니다.
“스님, 애초의 약속과는 틀리지 않소. 진정 가시고 싶으면 가시오.”
자운 스님께서는 스님을 따라 불영사로 돌아오셨는데 그 인연으로 두 스님은 일생의 뜻을 같이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원한 도반이 되셨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가시는 곳은 꼭 조실 스님이 가셔서 일을 도와주셨고, 비단 사찰 업무뿐 아니라 모든 일에 협조자가 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l960년, 불기 2504년에 큰스님께서 해인사 주지로 가실 때만 해도 해인사는 재정적으로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데,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조실 스님은 그 스님의 뒤를 따라 그곳 총무를 맡으셨읍니다. 60년대에 해인사는 말이 사찰이지 사찰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아 있었습니다. 기와가 좋지 못해 곳곳마다 비가 스며들고 서까래도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읍니다. 지금은 해인사라하면 팔만대장경부터 생각하지만, 그때는 불교 신자들마저 그것이 국보인지조차 모르고 있었읍니다.
조실 스님은 해인사를 좀더 잘 지키고 팔만대장경을 오래도록 잘 보존할 묘책을 강구하였읍니다. 일념으로 기도에만 몰두하며 손수 공양을 지어 장경각에 올리며 칠일 동안 정진하셨읍니다.
그래도 근본적인 묘책이 나오지 않자 마루방에서 칠일 동안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하시면서 침식을 전폐하고 정에 드는 순간 머리 속에서 “네가 배운 대로 하라”는 답이 떠올랐읍니다. 배운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과 염불, 목탁뿐이었읍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이 계시는 팔만대장경을 수호하기 위한 정대법회를 가치게 되었읍니다. 조실 스님의 공덕으로 정대법회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드는 신도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여기에서 나온 보시금으로 해인사 자체 내의 어려운 재정 문제를 해결했음은 물론, 해인대학에 관한 문제도 깨끗이 정리하셨고 넘어간 논 900여 마지기와 산 6,600여 정보도 되찾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실 스님의 가장 큰 업적을 들자면 ‘농지 소송 문제’ 의 해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재판 상황은 누가 봐도 사찰측이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였읍니다. 진주 지방법원에서 패소하였고 대구 고등법원에서도 패소하여,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기대를 대법원에 걸고 있었읍니다. 조실 스님은 오로지 기도에만 몰두하셨읍니다. 옆에서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많은 시간과 많은 날들을 기도로 보내셨읍니다. 장경각에서 간곡히 기도하던 어느 날, 꿈에 말이 먹구름올 헤치고 동이트는 밝은 동쪽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고, 재판에 대한 밝은 전망을 확신하고 판결 날을 기다리셨읍니다. 그 농지 소송 문제는 각계각층의 큰 관심을 모았던 문제였읍니다. 판결 날이 임박했으나, 조실 스님은 조금도 초조함이나 조급함없이 오직 기도에만 일념 정진하셨읍니다. 결국 예상올 뒤엎고 승소 판결이 났읍니다. 한 마디로 조실 스님의 신섬(信心)의 승리였읍니다. 그 뒤로 대흥사를 비롯하여 각 사찰의 농지 소송 사건은 모두 해인사 사건의 판례를 들어 승소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큰 업적입니까! 그 사건이 승소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판도가 어떻게 변모해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조실 스님은 어떤 절이나 암자에서든 또 어떤 손님이든 법문을 청하면 쾌히 승낙하시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리 험악한 첩첩산중의 산사라도, 서슴없이 가셔서 법문을 하셨읍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은 다른 스님들의 법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이한 데가 있읍니다. 구수한 경상도의 특유한 사투리에 언제나 다양한 화술과 유머로 우리 실생활과 직결되는 법문을 하시기에, 법문 때는 언제나 많은 신도들이 법당을 가득 메우곤 했읍니다.
조실 스님께서 봉은사로 오실 때만 해도 봉은사는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으니, 열개 회사와 국영기업체의 명의로 넘어간 상태였읍니다. 조실 스님은, 절 땅을 되찾으려고, 그 열개 회사 및 국영기업체의 이사들과 상공부에서 무려 스물한 차례나 회의를 가져 해결책을 찾기에 이르렀읍니다. 그리하여 무려 칠년이란 세월이 걸려 절 땅을 되찾았읍니다. 그런 뒤 대웅전을 확장하고 탑과 석등을 세우고 경판이 산화변질된 화엄경 44장을 보각하는 등 많은 불사를 하셨기에 오늘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밖에도,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에는 모든 행정을 체계화시켜, 재무 교육 문제, 일반 행정 지침, 사무 처리 방침 등모든 행정 업무를 혁신하셨읍니다. 그리고 그 체계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읍니다. 또,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계실 때에는 동국관을 건립하고, 동국대학교 경주 분교를 설립하였으며, 역경원장으로 계시면서 동국대학교의 부속기관이던 역경원을 독립 재단으로 만들기도 하였읍니다.
수행의 길을 걷기에만도 숱한 역경과 고난이 수반되는데, 그토록 어려운 업적을 남기실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조실 스님께서는 늘 9시가 되면 주무실 준비를 하여 10시가 되면 잠자리에 드시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오직 기도와 염불만 하셨읍니다. 그렇게 연로하신데도 일과 중에는 단 한번도 눕거나 다른 것을 하신 적이 없었읍니다. 조실 큰스님은 그 신심을 비할 데가 없는 대수행자이며 또한 대행정가이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들면 그 무엇이든지 끝내 해내고,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무리 작은 실수라도 그 자리에서 지적해 주시고, 그 잘못이 시정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번거롭고 귀찮을 정도로 말씀해주셨읍니다. 그런 한편 잘못을 고치면 늘 칭찬을 아끼지 않는 자상함도 지니셨읍니다.
십이년 동안을 늘 가까이 모시고 법음(法音)을 들어오다가, 세수 81세(법랍64세)로 홀연히 시적(示寂)하시니, 모시는 데에 정성이 부족하여 그리 되시지나 않았나 죄스럽기만 합니다. 자상하게 느껴 오던 그 은덕(隱德)이 더욱 크게 돋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