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실 스님의 가장 큰 업적을 들자면 ‘농지 소송 문제’ 의 해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재판 상황은 누가 봐도 사찰측이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였읍니다. 진주 지방법원에서 패소하였고 대구 고등법원에서도 패소하여,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기대를 대법원에 걸고 있었읍니다. 조실 스님은 오로지 기도에만 몰두하셨읍니다. 옆에서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많은 시간과 많은 날들을 기도로 보내셨읍니다. 장경각에서 간곡히 기도하던 어느 날, 꿈에 말이 먹구름올 헤치고 동이트는 밝은 동쪽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고, 재판에 대한 밝은 전망을 확신하고 판결 날을 기다리셨읍니다. 그 농지 소송 문제는 각계각층의 큰 관심을 모았던 문제였읍니다. 판결 날이 임박했으나, 조실 스님은 조금도 초조함이나 조급함없이 오직 기도에만 일념 정진하셨읍니다. 결국 예상올 뒤엎고 승소 판결이 났읍니다. 한 마디로 조실 스님의 신섬(信心)의 승리였읍니다. 그 뒤로 대흥사를 비롯하여 각 사찰의 농지 소송 사건은 모두 해인사 사건의 판례를 들어 승소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큰 업적입니까! 그 사건이 승소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판도가 어떻게 변모해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조실 스님은 어떤 절이나 암자에서든 또 어떤 손님이든 법문을 청하면 쾌히 승낙하시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리 험악한 첩첩산중의 산사라도, 서슴없이 가셔서 법문을 하셨읍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은 다른 스님들의 법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이한 데가 있읍니다. 구수한 경상도의 특유한 사투리에 언제나 다양한 화술과 유머로 우리 실생활과 직결되는 법문을 하시기에, 법문 때는 언제나 많은 신도들이 법당을 가득 메우곤 했읍니다.
조실 스님께서 봉은사로 오실 때만 해도 봉은사는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으니, 열개 회사와 국영기업체의 명의로 넘어간 상태였읍니다. 조실 스님은, 절 땅을 되찾으려고, 그 열개 회사 및 국영기업체의 이사들과 상공부에서 무려 스물한 차례나 회의를 가져 해결책을 찾기에 이르렀읍니다. 그리하여 무려 칠년이란 세월이 걸려 절 땅을 되찾았읍니다. 그런 뒤 대웅전을 확장하고 탑과 석등을 세우고 경판이 산화변질된 화엄경 44장을 보각하는 등 많은 불사를 하셨기에 오늘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밖에도,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에는 모든 행정을 체계화시켜, 재무 교육 문제, 일반 행정 지침, 사무 처리 방침 등모든 행정 업무를 혁신하셨읍니다. 그리고 그 체계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읍니다. 또,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계실 때에는 동국관을 건립하고, 동국대학교 경주 분교를 설립하였으며, 역경원장으로 계시면서 동국대학교의 부속기관이던 역경원을 독립 재단으로 만들기도 하였읍니다.
수행의 길을 걷기에만도 숱한 역경과 고난이 수반되는데, 그토록 어려운 업적을 남기실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조실 스님께서는 늘 9시가 되면 주무실 준비를 하여 10시가 되면 잠자리에 드시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오직 기도와 염불만 하셨읍니다. 그렇게 연로하신데도 일과 중에는 단 한번도 눕거나 다른 것을 하신 적이 없었읍니다. 조실 큰스님은 그 신심을 비할 데가 없는 대수행자이며 또한 대행정가이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들면 그 무엇이든지 끝내 해내고,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무리 작은 실수라도 그 자리에서 지적해 주시고, 그 잘못이 시정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번거롭고 귀찮을 정도로 말씀해주셨읍니다. 그런 한편 잘못을 고치면 늘 칭찬을 아끼지 않는 자상함도 지니셨읍니다.
십이년 동안을 늘 가까이 모시고 법음(法音)을 들어오다가, 세수 81세(법랍64세)로 홀연히 시적(示寂)하시니, 모시는 데에 정성이 부족하여 그리 되시지나 않았나 죄스럽기만 합니다. 자상하게 느껴 오던 그 은덕(隱德)이 더욱 크게 돋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