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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정신의 회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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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87년 06월 64호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보편과 함께 진리에 이르는 불교의 본질을 세속인에게 훈도하고 금욕적 생활을 통해 확보한 고양된 도덕성으로 세속인들에게 예증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다.


1 .석존의 삶에서 출가가 지니는 의미
부처님의 일생을 살펴봄에 있어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교주에 대한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역사 시대를 살다 간 한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조망해 볼 때 세 가지의 중요한 역사 사회적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첫째가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고통에 허덕이는 이웃들과의 만남이다. 당시 정반왕의 아들인 태자 싯달타는 높이 둘러쳐진 성벽 안 궁중 생활의 풍요와 안락에 젖어 이웃들과는 별개의 혜택받은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높이 둘러쳐진 성벽은 싯달타의 혜택받은 특수한 삶을 보편적인 것인 양 왜곡하고 은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사문유관을 통한 고통받는 이웃들과의 만남은 싯달타의 풍요로운 삶이 선택받은 것이라는 자각과 아울러 보편적인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눈뜨게 하였다. 이는 곧 주관적 상황과 조건 속에 매몰된 개인적 삶을, 객관적 상황과 조건 속에서 그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사회적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였던 것이다.
두번째는 유성출가(踰城出家)로서 기득권을 버리는 것이다. 태자 싯달타는 왕위 계승숭자로서 한 국가를 통치하는 엄청난 권력과 부(富)를 보장받고 있다. 그러나 사문유관을 통해 보편적인 삶의 고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작한 싯탈타는 현재의 삶의 모습은 극복되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싯달타에게 남은 것은 선택받은 기득권을 버리고 보편적인 삶의 고뇌를 극복하는 진리의 삶에로의 탈출뿐인 것이다. 유성출가, 이로 인하여 싯달타의 개인적 삶이 사회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세번째는 초전법륜(初傳法輪)으로 역사성을 확보한 것이다. 사문 고오타미는 출가 이후 치열한 구도열로 수행한 결과 비로소 정각(正覺)을 얻게 된다. 깨달음에 이른 석존은 삼칠일간 그대로 선정에든 채 법열(法悅)을 만끽하면서 한가지 고뇌에 빠지게 된다.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니 이대로 열반에 들것인가, 아니면 미혹한 중생들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설파할 것인가. 석존은 결국 중생의 고통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석존이 이땅에 오셔서 최초로 하신 말씀으로의 복귀인 것이다.
석존이 태어나셔서 최초로 하신 말씀은“하늘 아래 땅위에 모든 존재는 함께 존귀하며, 온 세상은 고통 속에 차 있으니 내 이를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였다. 깨달음을 중생에게 회향시키겠다는
결정은 고통받는 중생을 마땅히 편안케 하겠다는 최초의 사명으로 복귀한 것이며 나아가서 석존의 깨달음이 역사성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글의 주제에 걸맞게 출가의 부분만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석존의 삶에 있어서 유성출가가 의미하는 것은 기득권을 버리고 진리의 삶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2. 출가자(出家者)에 대한 올바른 이해
서양에서는 출가자를 몽크스(Monks:승려)로 표현하고 승려의 외형적인 조직을 제공하는 단체를 수도원(Monasteries)으로 표현한다. 본래 종교적 은둔자를 뜻하는 모나쿠스(Monachus)에서 파생된 몽크스(Monks)는 나중에 세상과 떨어져 생활하는 단체의 구성원을 뜻하게 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도에서는 출가자가 비쿠스(Bhikkhus 또는 Bhikshus : 비구)로 일컬어지고 비구의 삶에 외형적인 조직을 제공하는 단체를 샹가(Sangha : 승가)로 표현한다. 비쿠스(Bhikkhus)란 말은 문자 그대로 사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동, 서양의 출가자에 대한 개념 차이는 출가자의 역할까지도 대조적인 차이를 보이게 하였다. 몽크스(승려)는 은둔자로서 세속인과 별개의 삶을 영위하면서 소위 성직자(聖職者)로서 선택되어진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비쿠스(비구)는 탁발과 공양이라는 형태로 세속인과 결부되어져 있어 양가(승가 : 비구 단체)가 사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몽크스는 세속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선택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는 반면에 비쿠스는 그가 영위하는 생활,
추구하는 목표가 세인에게 회향되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몽크스는 세속인에게 군림하게 되고 비쿠스는 세속인의 반려가 되는 것이다.

3. 올바른 출가 정신의 구현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은 무소유를 의미하며 무소유란 생존을 위한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사적 욕망이나 자산의 소유를 포기하는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공적인 자산 즉 세속인에 대한 의존을 뜻하는 것이다. 비구가 받는 공양이란 그를 존경하는 세속인에 의해서 비구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음식을 말한다. 나아가서 그가 입는 옷, 살고 있는 거주지, 다른 물질적인 생활 필수품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비구가 세속인에 의해 제공되는 모든 것을 수락한다는 뜻은 사유 재산을 포기한다는 전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비구는 물질적 경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세속인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기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보편과 함께 진리에 이르는 불교의 본질을 세속인에게 훈도하고 금욕적 생활을 통해 확보한 고양된 도덕성으로 세속인들에게 예증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와 세속인과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초기 불교 경전인 시갈라(Sigala) 가르침을 통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시갈라 가르침은 6조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마지막 조목에 세속인과 승가의 구성원과의 역할이 세분되어 있다. “훌륭한 세속인은 그의 행동이나 말, 그리고 사상 속에서 애정을 표시해야 하며 비구에게 따뜻한 환영과 접대를 해야 하며 물질적인 필요품을 관대하게 제공해야 한다. 반대로 승가의 구성원들은 세속인이 나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며 영예로운 것을 행하도록 권고하며 지식을 나누어 주고 세속인의 어려움과 의문을 다루어 주며 세속인에게 천상에 이르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세속인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비구에게는 그 외에도 하나가 더 있으니 그것은 특별한 환경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일이다.

4. 출가 정신의 사회화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의 어록에 “불교는 사랑에 대한 모든 제한을 제거시키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랑, 바로 그 자체인 진리 속에서 자신을 승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한 내용이다. 왜냐 하면 불교란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예찬하는 종교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를 개인적인 구원과 관계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불교는 개인의 운명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로 감정과 지각이 있는 모든 존재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필연적으로 불교와 사회 경제적 문제와의 관계를 수반시켰다. 하기에 사회적 차원과 분리하여 불교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모하다. 개인주의란 사랑에 제한을 가한다. 그리고 불교가 개인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나는 문제를 다루려는 노력이라면, 또한 타고르가 깨달은 바와 같이 이런 한계를 제거시키려는 수단을 내세운다면 불교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 명백하다. 불교는 결코 현실도피와 출세간의 도(道)만을 부르짖는 사상이 아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출세간의 도리를 설파하는 일면이 있는 이유는 현실을 과거의 속박과 현재의 구조적 모순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고 평등한 내일을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출가자가 세속을 버리고 산으로 가는 것은 마치 그가 숲속에 있을 때는 숲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고 숲을 벗어날 때야 비로소 숲과 산의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있듯이 그는 세속의 모습을 좀더 정확하게 측량하고 헤아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세속을 떠나는 것이다. 독속(世間)에 있으면 독을 굴릴 수없고 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出世界) 또한 독을 굴릴 수 없듯이 독을 굴리가 위해서는 세간과 출세간이 함께 하는 곳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세속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머물면서 세속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佛不染世間法 如蓮華不着水) 이것이 바로 출가의 진정한 의미이며 출가정신의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는 것이다.

5. 무소유에 대한 현실적 인식
출가자가 세속인으로부터 제공받은 공양물을 모두 소비한다는 보장은 없다. 먹는 음식이야 때 맞춰 소비할 수 있겠지만 다른 물품들은 쌓이게 마련이다. 물건이 쌓여서 모인다는 것은 바로 그 물건에 대한 기득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생긴 기득권들을 버리는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은 출가자에게 있어 출가정신을 회복하는 현실적인 관건이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가령 예를 들어 공부하는 학인들에게는 책이 모이게 마련이다. 또한 출가자의 삶에 반려가되는 차생활에 다기와 작설차는 필수품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 자칫 잘못하면 무소유정신을 망각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출가자가 거주지를 이동할때 걸망 하나가 고작이어야 할텐데 용달차 한 대에 가득한 책보퉁이며 심지어는 고급 오디오 시스템이 실려져 있다면 세속인의 이사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출가정신을 살릴 수 있는 바람직한 무소유의 방향은 다음의 두 가지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쌓여서 모인 것은 그 필요한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이웃에게 베풀어 주어야 한다. 둘째, 특별한 물품(가령 다기, 오디오 시스템 등)은 공동체의 다수가 함께 향유토록 하여야한다. 앞에서 예를 든 것으로 적용시켜 보면 다 읽고 난 책들은 아직 못 읽은 도반이나 후학에게 나눠주고 다기와 작설차는 함께 수행하는 승가의 구성원들에게 베풀어 줄때에 진정한 출가정신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